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소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데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뽑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음새겼다,
소년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맣은 것을 들었다,
허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특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시골 큰집
신경림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 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새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 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싱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 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꺼나.
술에라도 취해볼꺼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꺼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꺼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꺼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꺼나.
손
신경림
최신 전자제품장수와 싸구려 기성복장수가 다투어 목청을 높인다.
어떤 장꾼은 아침부터 시비만 하고, 어떤 장꾼은 종일 커피전문점만 들락인다.
전대를 가득 돈으로 채우고도 소주릅은 볼이 부었고,
시금치 바구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등 굽은 할머니는 천하태평이다.
생김새도 사는 것도 각양각색이라, 언청이와
혹부리가 길이 다르고 꿈이 다르듯, 그러다가도
문득 국밥집에 들어와 석유난로에 얹는 손들을 보면 닮았다.
쭈그러진 손등의 주름이 같고, 손바닥에 박인 못이 같다.
주름과 못 속으로 팬 깊고 푸른 상처가 서로 닮았다.
나무 1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늙은 소나무
신경림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산동네
신경림
집에서는 왕자처럼 살고
나와서는 잡초로 행세하는 자들이 싫어서
일년 내내 동네 밖을 안 나가는
딸기코 대서방 서사는 내 바둑동무다
남 앞에서는 옳은 소리만 하고
전문지식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면서
자기 자식들은 몰래
외국으로 빼돌려 공부시키는 자들이 미워
신문도 방송도 안 본다는
허리 굽은 양복점 주인은 내 술동무다
한 스무 해 징역을 살고 나와보니
온갖 잡짓으로 돈벌고
또 여편네 앞장세워 출세한 것들이
무사가 되고 지사가 된 세상이 어이없어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지만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보는 줄 알지만
아아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눈도 코도 없는 줄 알지만......
여름날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철길
신경림
내 형제들의 피를 빨고
땀을 짜서 놓은 철길을 타고 가서
구경하는 금강산은 아름다울까
내 친구들의 졸라맨 허리와
앙상한 갈비뼈를 짓밟은 발들과 나란히
밟아보는 북녘 들판은 부드러울까
내 이웃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피묻은 붉은 손에 이끌려
잡아보는 동포들의 손은 따스할까
꿈의 나라 코리아
신경림
때와 먼지에 절은 술상에는
신 김치와 두부 무침
목에 켜켜로 쌓인 탄가루를 씻어내려고
부지런히 소주 주발을 들어올리는
시커먼 손들
진폐증으로 입원한
아들을 보러 간 주모 대신
굴속 같은 술청을 드나들던 쥔사내가
광부들보다도 먼저 취했다
광산살이 서른 해에
얻은 것은 가난한 병뿐이라고
셈날 아직 멀어
하나둘 외상을 긋고 나가는
문밖에 내리는 비도 검고
꿈의 나라 코리아
꿈의 나라 쾨아
테레비전 속 여가수의 하얀 목소리가
대낮인데도 밤처럼 검은
집과 사람들을 놀려대고 있다
파도
신경림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저 바다 언제까지나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저 파도 일제히 일어나
아우성치고 덤벼드는 것 보면.
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인가
그 성난 물결 단번에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
씻어내리리 생각하면.
끊어진 철길
신경림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꾼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 주며 말한다
"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
세밑 사흘 늦어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농사꾼 이철웅씨는 남방한계선 근처 자연꿀따기는
올해부터는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푯말이 붙은 인근
버렸던 땅값 오르리라며 자식들 신바람 났지만
통일도 돈 가지고 하는 놀음인 것이 그는 슬프다
그에게서는 금강산 가는 철길뿐 아니라
서울 가는 버스길도 이제 끊겼다
팔월의 기도
신경림
내 목소리로
내 노래를 부르게 해 주십시오
내 말로
내 얘기를 하게 해 주십시오
내 형제를 형제라 부르게 해 주시고
내 원수를 원수라 미워하게 해 주십시오
온 땅에 깔린
하늘에 바다에 강에 널린 넋들이여
오월의 넋들이여 팔월의 넋들이여
내 꿈은 작고 소박합니다
사십년 동안 갈라져 있던 형제들 동무들 모여
아흔 낮 아흔 밤을 목놓아 우는 것
이 땅을 짓이기고 뭉개는 구둣발을
갈가리 갈라놓고 찢어놓는 총칼을
내 노래 내 얘기 폭풍되어
몰아내게 해 주십시오
형제를 형제라 부른다 해서
원수를 원수라 미워한다 해서
뭇매질하고 발길질하는 더러운 발들을
동해바다 한복판에 쓸어넣게 해 주십시오
오월은 내게
신경림
오월은 내게 사링을 알게 했고
달뜨는 밤의 설레임을 알게 했다
뻐꾹새 소리의 기쁨을 알게 했고
돌아오는 길의 외로움에 익게 했다
다시 오월은 내게 두려움을 가르쳤다
저자거리를 메운 군화발소리 총칼소리에
산도 강도 숨죽여 웅크린 것을 보았고
붉은 피로 물든 보도 위에서
신조차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오월에 나는 증오를 배웠다
불없는 지하실에 주검처럼 쳐박혀
일곱밤 일곱낮을 이를 가는 법을 배웠다
원수들의 이름 손바닥에 곱새기며
그 이름 위에 칼날을 꽂는 꿈을 익혔다
그리하여 오월에 나는 복수의 기쁨을 알았지만
찌른 만큼 찌르고 밟힐 만큼 밟는 기쁨을 배웠지만
오월은 내게 갈 길을 알게 했다
함께 어깨를 낄 동무들을 알게 했고
소리쳐 부를 노래를 알게 했다
길
신경림
길을 가다가
눈발치는 산길을 가다가
눈 속에 맺힌 새빨간 열매를 본다
잃어버린 옛 얘기를 듣는다
어릴 적 멀리 날아가버린
노래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갈대 서걱이는
빈 가지에 앉아 우는 하얀 새를 본다
헤어진 옛 친구를 본다
친구와 함께
잊혀진 꿈을 찾는다
길을 가다가
산길을 가다가
산길 강길 들길을 가다가
내 손에 가득 들린 빨간 열매를 본다
내 가슴 속에서 퍼덕이는 하얀 새
그 날개 소리를 듣는다
그것들과 어울어진 내
노래 소리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시인의 집
신경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마당에 피워놓은
모닥불은 훨훨 탄다
삼십년 전 신혼살림을 차렸던
깨끗하게 도배된 윗방
벽에는 산 위에서 찍은
시인의 사진
시인의 아내는 옛날로 돌아가
집 앞 둠벙에서
붉은 연꽃을 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옛 백제의 서러운 땅에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모닥불 옆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는
몇 개의 굵고 붉은 낱말들이여
두물머리
신경림
"조심조심 지뢰 사이를 지났지
긁히고 찢기면서 철조망도 넘었지
못다 운 넋들의 울음소리도 들었지
하얀 해골 덜 삭은 뼈에 대고
울면서 울면서 입맞춤도 하였지"
"내 몸에 밴 것은 눈물뿐이라네
쫓겨난 농투산이들 한숨뿐이라네
눈비 바람은 갈수록 맵차고
온 벌에 안개 더욱 짙어가지만
나는 보았네 땅 뚫고 솟는 빛살을
노래처럼 힘차고 굵은 빛살을"
"얼싸안아보자꾸나 어루만져보자꾸나
너는 북에서 나는 남에서
온갖 서러운 일 기막힌 짓 못된 꼴
다 겪으면서 예까지 흘러오지 않았느냐
내 살에 네 피를 섞고
네 뼈에 내 입김 불어넣으면
그 온갖 것 모두 빛이 되리니
춤추자꾸나 아침햇살에 몸 빛내면서"
갈구렁달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산에 대하여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돼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울어지는
사람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북한강행
신경림
왜 날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가
팔다리 잘려나간 험한 몸통으로
원수 앞에서 뒤뚱걸음치게 하는가
용서하라고 모든 걸 용서하라고 하는가
목에 들여댄 칼 앞에서 웃으라는가
강바람 산바람 매운 줄 너는 모른다
온갖 새울음 짐승울음 서러운 줄 너는 모른다
욕지거리 발길질 아픈 줄도 너는 모른다
서른 해 그 긴 죽음 지겨운 줄 너는 모른다
왜 그 모든 걸 다 잊으라는가
인연없는 낯선이의 팔에 매달려
우쭐우쭐 허재비춤을 추게 하는가
원수들의 큰 웃음소리 속에서
원통한 날 왜 두 번 죽게 하는가
내 누웠던 강가로 되보내다오
그 차디찬 흙 속으로 되보내다오
밤마다 팔다리 없는 몸통 흙 털고 일어나
천리 만리 원수 찾아 날아가리니
원수의 칼날 앞에서 억지로 웃는 내 입에
날 선 낫 한 자루 물린 거 너는 모른다
길음 시장
신경림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
팔도 각 고장에서 못살고 쫓겨온
뜨내기들이 모여들어 좌판을 벌인 장거리
예삿날인데도 건어물전 앞에서는 한낮에
윷이냐 샅이냐 윷놀이판이 벌어지고
경로당 마당에서는 삼채굿가락의
좌도 농악이 흥을 돋군다
생선장수 아낙네들은 덩달아 두레삼도 삼고
늙은 씨름꾼은 꽃나부춤에 신명을 푸는데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이라도 시작되면
일 나간 아낙들이 돌아올 시간이라면서
미지기로 놀던 상쇠도 중쇠도 빠지고
싸구려 소리가 높아지면서
길음시장은 비로소 서울이 된다
너희 사랑
신경림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명매기 집
신경림
옛고장 사람들은 우리들더러
도망질쳤다고 종주먹질하고
이 고장 사람들은 또
숨어들어왔다 눈흘긴다
저쪽에선 되돌아오지 말라 침 배앝고
이쪽에선 발 들여놓지 말라
금줄 쳐 막는다
달구지에 용달차에 화물차에 실려온
누더기라 헌 짐짝 서덜에 풀어놓고
산비알에 까맣게 움막을 치니
그래도 좋아라 갈갬질치는 내 새끼들아
이게 간데없이 명매기 집이로구나
우리가 왜 모르겠느냐
너희 눈에 담긴 눈물이 머잖아
파랗게 불꽃으로 번득일 것을
활활 세상을 태우는
불꽃으로 타오를 것을
<명매기> : 여름 한철 개울가 바위 벼랑에 집을 짓고 사는 새.
불길한 새라 하여
사람들이 동네 안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데,
그 눈에서 파란 빛이 일면 큰 재앙이 온다는 얘기가 있음.
4월 19일
신경림
치워다오
내 목을 짓누르고 있는 이
투박한 구둣발을 치워다오
풀어다오
내 손발을 꽁꽁 묶고 있는 이
굵은 쇠사슬을 풀어다오.
저승길 구만리
짓눌린 채,
묶인 채로야 어디 가겠느냐.
진달래 피고 무덤가에
개나리가 피어도
볼 수 없는 이 짙은 어둠 속을
손발 묶여 목 짓눌린 채로야
어디 가겠느냐.
치워다오
내 머리를 겨누고 있는 이
흉한 총칼을 치워다오.
막아다오
말끝마다 내 이름 들먹이고는
골방에서 숨어 키들대는
저 더러운 웃음을 막아다오.
내 땅
신경림
제주도에서 나서
4.3난리도 겪고
서울에서 징역살이도 했다.
3.8선을 넘어가서는
또 평양에서 징역을 살고,
압록강을 건너
흑룡강성까지 도망쳤을 때는
다시는 내 땅을 밟지 않으리라
혀를 깨물었다.
만주벌 매운 바람에 몸 웅크리며
이를 갈고 또 갈았다.
그러나 삼십 년,
그는 지구를 멀리 반 바퀴 돌아서
내 땅 가까운 일본까지 왔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우울한 소식뿐이건만
매일처럼 바닷가에 나와
내 땅을 바라보고 섰다.
무엇일까 내 땅이란 무엇일까,
동경 뒷골목 선술집에서
나는 그에게 묻고
그는 말없이
가슴과 등줄기에 남아 있는
채찍 자국을 내보인다.
고향 길
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윗소리 요란한 엿장수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도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려네
아우라지 뱃사공
신경림
산과 물이 지겨워 아우라지 뱃사공의 아내는
세 아들딸을 두고 대처로 떠났다.
아우라지 뱃사공은 산과 물이 싫다.
산과 물을 좋아하는 대처 사람이 싫다.
종일 배를 건너 손에 쥐는
천 원 안팎의 돈 그것이 싫다.
세상이란 잘난 사람들끼리 그저
잘난놀음으로 돌아치는 곳,
그를 가엾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는 싫다.
딸애는 바람막이도 없는 난달에서
구미호를 삶아 저녁밥을 짓고
아들놈은 단칸 셋방 맨바닥에 엎드려
몽당연필로 제 어미에게 편지를 쓴다.
보낼 수도 없는 서러운 편지를.
아우라지 뱃사공은 그들을 보는 세상의 눈이 싫다.
정선아라리의 구성진 가락이 싫다.
세월
신경림
흙 속을 헤엄치는
꿈을 꾸다가
자갈밭에 동댕이쳐지는
꿈을 꾸다가......
지하실 바닥 긁는
사슬소리를 듣다가
무덤 속 깊은 곳의
통곡소리를 듣다가......
창문에 어른대는
하얀 달을 보다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강물 1
신경림
한 이레 하늘과 땅 갤 줄을 모르고
새와 벌레 서러워
울음 멈추리라 생각했다, 그이 가면
가게들 첩첩으로 문 닫아 걸고
나루에 저자에 인적 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보라, 그 화려한 꽃상여
고샅 돌아 산길 오르기도 전에
계집들 눈웃음으로 사내들을 흘리고
사내들 구전 찾기에 눈에 핏발이 섰다.
대장간에서 어물전에서 난장판에서
계집 사내 어우러져 시새우고 다투고
가다간 어깨 너머로 눈 맞추는구나.
그 큰 뜻 그 바람 시들었는데도.
한밤에 깨어 강물소리를 듣는다.
사람 사는 일이란 무릇 이러한 건가,
빗소리 천둥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고
꽃샘 잎샘에 잠시 목 움츠릴 뿐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 같은 건가.
새벽
신경림
보이나, 저 사람들이 보이나.
화해의 시대라고 야단들을 치는군.
배에 기름 끼인 간사한 꾀만 늘지.
죽도록 고생한 자들까지 왜 덩달아 맞북 치지.
늙고 지쳤으니까.
암, 늙고 지쳤으니까.
우리도 이렇게 함께 앉았으니 이것이 화해인가.
서로 쏘고 찌른 상처 매만지며 함께 앉았으니까.
아닐세, 우린 서로 미워한 일 없지.
아닐세, 우린 옛날로 돌아가면 되지.
자 떠나세, 동이 트네.
자, 떠나세, 날선 낫 하나씩 들고.
자, 떠나세, 원수를 찾아서.
- 이른 새벽 휴전선 부근,
경지정리로 파헤쳐진 무덤 속에서
두개골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달 넘세
신경림
넘어가세 넘어가세
논둑밭둑 넘어가세
드난살이 모진 설움
조롱박에 주워담고
아픔 깊어지거들랑
어깨춤 더 흥겹게
넘어가세 넘어가세
고개 하나 넘어가세
얽히고 설킨 인연
명주 끊듯 끊어내고
새 세월 새 세상엔
새 인연이 있으리니
넘어가세 넘어가세
언덕 다시 넘어가세
어르고 으르는 말
귓전으로 넘겨치고
으깨지고 깨어진 손
서로 끌고 잡고 가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크고 큰 산 넘어가세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디딜 것은 디디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넘어가세 넘어가세
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달 넘새> : 흔히 '달람새'라고도 하는데
경북 영덕 지방에서 하는 여인네들의 놀이
'월워리 청청'의 한 대목으로,
손을 잡고 빙 둘러앉아 하나씩 넘어가면서 '달 넘세' 노래를 부름.
'달을 넘어가자'는 뜻의 '달 넘세'는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일을 상징한다고 함.
떠도는 이의 노래
신경림
너는 나를 칼날 위에 서게 한다
너는 나를 불 앞에 서게 한다
너는 나를 물 속에 뛰어들게 한다
한밤에 길을 떠나게 한다
외로운 고장 썰렁한 장바닥에서
진종일 떨며 서성거리게 한다
귀먹은 땜장이 길동무삼아
산마을 갯마을을 떠돌게 한다
지는 해 등에 업고 긴 그림자로
꿈 속에서 고향을 찾게 한다
엿도가에서 옹기전에서 달비전에서
부사귀 몽달귀 동무되어 뛰게 한다
새벽에 눈뜨고 강물소리를 듣게 한다
너는 나를 불을 두려워하게 한다
물 속에 뛰어들기를 물리치게 한다
그래서 한밤에 다시 돌아오게 한다
골방에 깊이 숨어서 떨게 한다
그러나 너는 나를 되떠나게 한다
비틀대고 절뚝거리는 이들 데불고
버려진 포구에서 썩어가는 갯벌에서
마파람 하늬바람에 취하게 한다
너는 다시 나를 칼날 위에 서게 한다.
씻김굿
신경림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밤도 낮도 없는 저승길 천리 만리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보리밭 풀밭 모래밭에 엎드려
피멍든 두 눈 억겁년 뜨지 말고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잡으라네 갈가리 찢긴 이 손으로
피묻은 저 손 따뜻이 잡으라네
햇빛 밝게 빛나고 새들 지저귀는
바람 다스운 새 날 찾아왔으니
잡으라네 찢긴 이 손으로 잡으라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로는 나는 못 가,
피멍든 두 눈 고이는 못 감아,
못 잡아, 이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을 나는 못 잡아.
되돌아왔네, 피멍든 눈 부릅뜨고 되돌아왔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하늘에 된서리 내리라 부드득 이빨 갈면서.
이 갈가리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 나는 못 잡아,
골목길 장바닥 공장마당 도선장에
줄기찬 먹구름되어 되돌아왔네,
사나운 아우성되어 되돌아왔네.
<씻김굿> :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하는 굿으로,
원통한 넋을 위로해서 저 세상으로 편히 가게 하는 것이 목적임.
故鄕에 와서
신경림
아내는 눈 속에 잠이 들고
밤새워 바람이 불었다
나는 전등을 켜고
머리맡의 묵은 잡지를 뒤적였다
옛친구들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고 부끄러웠다
미닫이에 달빛이 와 어른거리면
이발소집 시계가 두 번을 쳤다
아내가 묻힌 무덤 위에 달이 밝고
멀리서 짐승이 울었다
나는 다시 전등을 끄고
홍은동 그 가파른 골목길을 생각했다
어둠으로 인하여
신경림
복사나무 노간주나무 아래
여자들이 울고 있다
잡목숲 넝쿨 사이 스쳐온 한숨
모랫벌에 뱃전에 부서지는 물소리
고샅에 디딜방앗간
어둠이 엉겨 붙고 술렁이고
소용돌이치고 서로 부르고
원귀가 되어 잡귀가 되어
밤새껏 미친듯이 맴을 돌고
춤을 추고
여자들이 울고 있다
형제들을 부르고 있다
노간주나무 물푸레나무 아래
어둠으로 인하여
원통한 죽음들로 인하여
찔레꽃
신경림
아카샤 꽃냄새가 진한 과수원 샛길을
처녀애들이 기운없이 걷고 있었다
먼지가 켜로 앉은 이파리 사이로
멀리 실공장이 보이고 행진곡이 들리고
기름과 오물로 더럽혀진 냇물에서
아이들이 병든 고기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한 그루 찔레꽃을 찾고 있었다
가라앉은 어둠 번지는 종소리
보리 팬 언덕 그 소녀를 찾고 있었다
보도는 불을 뿜고 가뭄은 목을 태워
마주치면 사람들은 눈길을 피했다
겨울은 아직 멀다지만 죽음은 다가오고
플라타나스도 미루나무도 누렇게 썩었다
늙은이들은 잘린 느티나무에 붙어앉아
깊고 지친 기침들을 하는데
오직 한 그루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냇가 허물어진 방죽 아래 숨어 서서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을 울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신경림
차고 누진 네 방에 낡은 옷가지들
라면 봉지와 쭈그러진 냄비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너희들의 힘으로 살쪄가는 거리
너희들의 땀으로 기름져가는 도시
오히려 그것들이 너희들을 조롱하고
오직 가난만이 죄악이라 협박할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벚꽃이 활짝 핀 공장 담벽 안
후지레한 초록색 작업복에 감겨
꿈 대신 분노의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투박한 손마디에 얼룩진 기름때
빛 바랜 네 얼굴에 생활의 흠집
야윈 어깨에 밴 삶의 어려움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우리들 두려워 얼굴 숙이고
시골 장바닥 뒷골목에 처박혀
그 한겨우내 술놀음 허송 속에
네 울부짖음만이 온 마을을 덮었을 때
들을 메우고 산과 하늘에 넘칠 때
쓰러지고 짓밟히고 다시 일어설 때
네 투박한 손에 힘을 보았을 때
네 빛 바랜 얼굴에 참삶을 보았을 때
네 야윈 어깨에 꿈을 보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네 울부짖음 속에 내일을 보았을 때
네 노랫속에 빛을 보았을 때
비 오는 날
신경림
물 묻은 손바닥에
지난 십년 고된 우리의 삶이 맺혀
쓰리다
이 하루나마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아내의 죽음 위에 돋은
잔디에 꿇어앉다
왜 헛됨이 있겠느냐
밤마다 당신은 내게 와서 말했으나
지쳤구나 나는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비틀대는 걸음
겁먹은 목청이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소매끝에 밴 땟자국을 본다
내 둘레에 엉킨
생활의 끄나불을 본다
삶은 고달프고
올바른 삶은 더욱 힘겨운데
힘을 내라 힘을 내라고
오히려 당신이 내게 외쳐대는
이곳 국만산 그 한골짜기 서러운 무덤에
종일 구질구질 비가 오는 날
이 하루나마 지쳐 쓸지려는 몸을 세워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君子에서
신경림
협궤열차는 서서
기적만 울리고 좀체 떠나지 못한다
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
봄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
염전을 쓸고 오는
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
산다는 것이 갈수록 부끄럽구나
분홍 커튼을 친 술집문을 열고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나그네를 구경하고 섰는 촌 정거장
추레한 몸을 끌고 차에서 내려서면
쓰러진 친구들의 이름처럼 갈라진
내 손등에도 몇 줄기의 피가 배인다
어차피 우리는 형제라고
아가씨야 너는 그렇게 말하는구나
가난과 설움을 함께 타고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형제라고
역앞 장터 골목은 누렇게 녹이 슬고
덜컹대는 판장들이 허옇게 바랬는데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헐떡이는
기차에 뛰어올라 숨을 몰아쉬면
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
내 등뒤에서 이렇게 아우성이 되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을
다시 남한강 상류에 와서
신경림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울고
나는 진종일 여관집 툇마루에 나와
잿빛으로 바랜 먼 산을 보고 섰다
배론땅은 여기서도 삼십리라 한다
궃은 날 여울목에서 여자 울음 들리는
강 따라 후미진 바윗돌을 돌라 한다
목 잘린 교우들의 이름 들을 적마다
사기가마 굳은 벽에 머리 박고 울었을
황사형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친구들의 목숨 무엇보다 값진 것
질척이는 장바닥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누룩제비 참새떼 몰려 웃고 까불어도
불과 칼로 친구들 구하려다
몸 토막토막 찢기고 잘리고 씹힌
그 사람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번개가 아우성치고 천둥이 울부짖을 때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기며
그 아내 원통해 차마 혀 못 깨물 때
누가 그더러 반역자라 하는가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우는
다시 남한강 상류 궁벽진 강촌에 와서
그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4월 19일, 시골에 와서
신경림
밤새워 문짝이 덜컹대고
골목을 축축한 바람이 쓸고 있다.
헐린 담장에 어수선한 두엄더미 우에
살구꽃이 피고 어지럽게
피어서 꺾이고 밟히고
그래도 다시 피는 4월.
나는 남한강 상류 외진 읍내에 와서
통금도 없는 빈 거리를 헤매면서
어느새 잊어버린
그날의 함성을 생각했다.
티끌처럼 쏠리며 살아온 나날.
돌처럼 뒹굴며 이어온 세월.
다시 그날의 종소리가 들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밤은 어두웠다.
친구를 생각했다. 찬 돌에 이마를 대고
깊은 잠이 들었을 친구를
그 손톱에 배었을 핏자국을.
4월이 와도 바람은 그냥 차고
살구꽃이 피어도 흐느낌은 더 높은데
축축한 바람은 꽃가지에 와 매달려
친구들의 울음처럼 잉잉댔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피고
꺾이고 밟히고 다시 피는 4월
밤은 좀체 밝아오지 않았다.
밤길
신경림
강 하나 건너왔네 손도 몸도 내어주고
갯비린내 벽에 쩌른 엿도가집 행랑방
감나무 빈 가지 된서리에 떨면서
내 여자 몸 무거워 뒤채는 그믐밤
고개를 넘어섰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협궤차 삐걱대던 면소재지 그 새벽도
못 박힌 손바닥에 팔자로 접어뒀네
내 여자 숨이 차서 눌아눕는 시린 외풍
험한 산길 지나왔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엿기름 달이는 건넌방 큰 가마솥
빈내기 화투 소리 늦도록 시끄러운
내 여자 내 걱정에 피말리는 한자정
강 하나 더 건넜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험한 산길 또 지났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어허 달구
신경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바람이 세면 담 뒤에 숨고
물결이 거칠면 길을 옮겼다
꽃이 피던 날은 억울해 울다
재넘어 장터에서 종일 취했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사람이 산다는 일 잡초 같더라
밟히고 잘리고 짓뭉개졌다
한 철이 지나면 세상은 더 어두워
흙먼지 일어 온 하늘을 덮더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차라리 한세월 장똘뱅이로 살았구나
저녁 햇살 서러운 파장 뒷골목
못 버린 미련이라 좌판을 거두고
이제 이 흙 속 죽음 되어 누웠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목계 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네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江
신경림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산읍기행(山邑記行)
신경림
장날인데도 무싯날보다 한산하다.
가뭄으로 논에서는 더운 먼지가 일고
지붕도 돌담도 농사꾼들처럼 지쳤다.
아내의 무덤이 멀리 보이는
구판장 앞에서 버스가 섰다.
나는 아들놈과 노점 포장 아래서
외국 자본이 만든 미지근한 음료수를 마셨다.
오랜만에 보는 시골 친구들의 눈은
왜 이렇게 충혈돼 있을까.
말이 없다. 그저 손을 잡고
흔들기만 한다. 그 거짓된 웃음.
돌과 몽둥이와 곡갱이로 어지럽던
좁은 닭전 골목. 농사꾼들과
광부들의 싸움질로 시끄럽던 이발소 앞.
의용소방대원들이 달음질치던 싸전 길.
장날인데도 어디고 무싯날보다 쓸쓸하다.
아내의 무덤을 다녀 가는 내 손을
뻣뻣한 손들이 잡고 놓지를 않는다.
그날
신경림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산일번지(山一番地)
신경림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 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얹는다
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맇여 산 일번지에는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前夜
신경림
그들의 함성을 듣는다
울부짖음을 듣는다
피맺힌 손톱으로
벽을 긁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가난하고
억울한 자의 편인가
그것을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려 가는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쓰러지고 엎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죽음을 덮는
무력한 사내들의 한숨
그 위에 쏟아지는 성난
채찍소리를 듣는다
노랫소리를 듣는다
갈길
신경림
녹슨 삽과 괭이를 들고 모였다
달빛이 화난 가마니 창고 뒷수풀
뉘우치고 그리고 다시 맹세하다가
어깨를 기어 보고 비로소 갈길을 안다
녹슨 삽과 괭이도 버렸다
읍내로 가는 자갈 깔린 샛길
빈 주먹과 뜨거운 숨결만 가지고 모였다
아우성과 노랫소리만 가지고 모였다
잔칫날
신경림
아침부터 당숙은 주정을 한다
차일 위에 덮이는 스산한 나뭇잎.
아낙네들은 뒤울안에 엉겨 수선을 떨고
새색시는 신랑 자랑에 신명이 났다.
잊었느냐고, 당숙은 주정을 한다.
네 아버지가 죽던 날을 잊었느냐고.
저 얼빠진 소리에 귀 기울여 뭣하랴.
마침내 차일 밑은 잔칫집답게 흥청대어
새색시는 시집 자랑에 신명이 났다.
트럭이 와서 바깥 마당에 멎었는데도
잊었느냐고, 당숙은 주정을 한다.
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눈길
신경림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잔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난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아낙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제삿날 밤
신경림
나는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른다.
구죽죽이 겨울비가 내리는 제삿날 밤
할일 없이 집안 젊은이들은
초저녁부터 군불 지핀 건넌방에 모여
갑오를 떼고 장기를 두고,
남폿불을 단 툇마루에서는
녹두를 가는 맷돌 소리.
두루마기 자락에 풀 비린내를 묻힌
먼 마을에서 아저씨들이 오면
우리는 칸데라를 들고 나가
지붕을 뒤져 참새를 잡는다.
이 답답한 가슴에 구죽죽이
겨울비가 내리는 당숙의 제삿날 밤.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그 당숙의 이름을 나는 모르고.
파장(罷場)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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