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의 묘미, 대구(對句)와 운(韻)
한시한답네 하고 필자가 광고(?)를 하고 다녀서 인지는 몰라도 적잖은 지인들이 漢詩에 관심을 보이고, 특히 몇몇 벗은 직접 한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기에 기쁜 마음과 함께 경쟁자로서의 두려움 조차 느낀다. 특히 최근에 한시공부를 선언한 K옹의 경우 한번 맘먹으면 철두철미 파고들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격임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시에 관심이 있는 벗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동안 필자가 홀로 배우면서 느꼈던 망막함과 어려움을 생각하여 몇 발짝 먼저 출발한 자의 얄팍한 정보나마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한시의 틀과 내용
漢詩를 하드웨어인 틀과 콘텐츠인 내용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시에서 틀이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나 당나라 시대를 전후하여 굳어진 형식으로 그후 대부분 이런 틀에 맞추어 시를 지었기에 무시할 수는 없다. 한시를 한줄에 몇자의 글자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5언시와 7언시로 나누고, 한 수의 시에 몇줄이 포함되느냐에 따라 4줄 짜리의 절구(絶句) 형식, 8줄 짜리의 율시(律詩) 형식 그리고 12줄 이상의 배율(排律) 형식으로 나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런 하드웨어적인 것에 대해서는 상술하지 않겠다.
대구(對句)에 대하여
한시는 우리 글과 달리 뜻글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즉 한글은 소리글이기에 들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보고 파악하기에는 뜻글자인 漢文이 훨씬 빠르다. 일본에서 연구한 바에 의하면 교통신호 표지판에 일본글인 가나로 표기한 것보다 한자로 한 것이 내용을 감지하는데 훨씬 빠른 것으로 조사된 바, 실제로 도로 표지판에 널리 적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한문의 특성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대구(對句)인데, 이는 詩 내용의 이해와 상상력을 도울 뿐 아니라 제한된 글자 수에서 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효적절한 방편이기도 하다. 한자에서 유래한 단어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대구들(難兄難弟, 夫唱婦隨, 南男北女, 千軍萬馬 등)이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한시의 경우는 이런 대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멋진 對句의 한시
모든 한시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혹은 은유적인 다양한 대구를 쓰고 있는데, 그동안 필자가 올렸던 한시 중에 멋진 대구를 이루고 있는 시를 뽑아 여기에서 다시 감상해 보기로 한다. 우선 당나라 이전의 시인으로 도연명(陶淵明 : 365 ~ 427 東晉)의 사계(四時)를 보자.
春水滿四澤 봄 물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峰 여름 구름 기이한 봉우리를 만드네
秋月揚明輝 가을 달 밝은 빛을 날리고
冬嶺秀孤松 겨울 산마루 외로운 소나무 빼어나누나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각구의 첫자는 春夏秋冬을 제시어로 하여, 두번째 자는 물(水), 구름(雲), 달(月) 그리고 산마루(嶺)가 각각 대구를 형성하고 있다. 세번째 자는 용언(用言) 대구로 가득하다(滿), 많다(多), 날리다(揚) 그리고 빼어나다(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 2자는 사방의 못(四澤), 기이한 봉우리(奇峰) 그리고 외로운 소나무(孤松)가 멋드러진 대구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다음은 송나라 야보선사(冶父禪師)의 선시 대구를 감상해 보자.
滿塢白雲耕不盡(만오백운경부진) 둔덕 가득 흰구름은 갈아도 끝이 없고
一潭明月釣無痕(일담명월조무흔) 못속 밝은 달은 낚아도 자취가 없네
塢 : 둑 오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섬돌에 드리운 대나무 그림자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月光穿沼水無痕(월광천소수무흔)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위에는 흔적이 없네
滄海難尋舟去迹(창해난심주거적) 푸른 바다 배 지나간 자취 찾을 길 없고
靑山不見鶴飛痕(청산불견학비흔) 청산에는 학 날라간 흔적 볼 수 없다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두번째 시*의 대구에 대해서만 논해 보기로 하자. 우선 대나무 그림자(竹影)에 대해 달빛(月光)으로 받았다면, 섬돌을 쓸다(掃階)에 대해서는 연못을 뚫다(穿沼)로 대구하였다. 먼지(塵)에 대해서는 물(水)로, 일어나지 않는다(不動)에 대한 대구로 흔적이 없다(無痕)가 받고 있다. (필자의 호, '달그리메(月影)'가 이 시 구절에서 따왔음을 밝힌다) 물론 나머지 구절들도 이에 못지 않은 멋진 대구를 이루고 있다.
다음은 널리 회자되고 있는 김삿갓과 공허(空墟)스님 간에 오갔다는 대구를 소개한다
(공)朝登立石雲生足(조등입석운생족) 아침에 입석봉에 오르니 구름이 발 밑에서 생기네
(삿)暮雲黃泉月掛脣(모운황천월괘순) 저녁에 황천담의 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는군
(공)絶壁雖危花笑立(절벽수위화소립) 깎아지른 절벽에도 오히려 꽃은 웃고 있네
(삿)陽春最好鳥啼歸(양춘최호조제귀) 화창한 봄은 더 없이 좋아도 새는 울며 돌아가지
(공)影浸綠水衣無濕(영침녹수의무습) 그림자가 푸른 물에 잠겼건만 옷은 젖지 않소
(삿)夢踏靑山脚不苦(몽답청산각불고) 꿈에 청산을 두루 다녔지만 다리는 아프지 않네
부언은 오히려 번문이 될 듯하여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음은 춘향전에서 어사출두 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시.
金樽美酒千人血 금동이의 맛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 옥쟁반의 맛난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樽 : 술통 준, 肴 : 안주 효
*燭淚落時民淚落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도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도 높더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뒤 두 구절*의 경우 각 구 자체내에서도 대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한시의 소리(平仄, 韻)에 대하여
소리와 관련된 것으로 한시에 적용되는 평측(平仄)이란 것이 있는데 중국어의 성조인 4성과 관련된 것이다. 음이 비슷하고 단어가 짧은 한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생겨난 것이 4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ma)라는 발음의 예를 들면 계집 녀 변에 말 마를 쓴 글자(女馬)는 어머니라는 뜻으로 높낮이 없는 평성(平聲)이고 麻자는 끝이 올라가는 상성(上聲), 馬자는 짧게 끊어 발음하는 거성(去聲)이다. 한시에서는 평성과 나머지 소리를 구분하여 뒤에 것을 측(仄)이라 하며 평(平)과 측(仄)에 일정한 배열 규칙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가 다른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평측을 맞춘다는 것은 매우 번거로운울 뿐만 아니라 한시를 시조처럼 읊지 않는 한 어찌보면 우스운 일이기에 여서는 부언하지 않겠다(사실 이에 대한 필자의 내공도 심히 부족하고...)
한편, 漢字가 소리날 때 자음 부분을 성모(聲母)라 하고 모음 부분(실제로는 모음에 받침까지 포함한 부분)을 운모(韻母)라 부른다. 따라서 한시에서 운(韻)이라 함은 바로 이 받침(終聲)을 포함한 모음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첫머리나 마지막 글자의 운을 맞추는 것을 압운(押韻)이라 하는데, 특히 짝수 구 마지막 자는 반드시 운을 일치시켜야 한다.
짝수 句 끝자의 운(韻)을 맞춰야
우선 詩仙이라 불리는 당나라 이백(李白, 701~762)의 山中問答을 보자. 짝수 구의 끝자가 閑과 間으로 운은 안이 되는데, 첫 구 끝자의 운(山)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푸른 산중에 왜 사느냐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대답없이 빙그레 웃으니 마음 한가롭다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물에 아득히 떠내려가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라네
杳 : 어두울 묘, 아득하다
이백과 함께 당나라의 대시인으로 詩聖이라 불린 두보(杜甫, 712~770, 唐)의 절구(絶句),
江碧鳥逾白(강벽조유백)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산청화욕연) 산이 파랗니 꽃이 불타는 듯 하다
今春看又過(금춘간우과) 올 봄도 건듯 보고 또 지나가니
何日是歸年(하일시귀년) 어느 날이 내 돌아갈 해인가
逾 : 남을 유, 더욱
중국의 황진이라 할 수 있는 설도(薛濤 770~805 唐)의 봄을 기다리며(春望詞)의 일부 구절
(김억 번역시에는 제목을 동심초로 하였음).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부결동심인)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라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渺 : 아득할 묘
*우리 글로 보면 묘(渺)는 로(老)나 초(草)와 운이 다를 것 같은데 漢文에서는 같은 운으로 분류됨
고려 중기 대시인 정지상(鄭知常, ?~1135)의 대동강,
雨歇長堤草色多(우갈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강둑에 풀 색 짙어 가는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임 보내는 남포엔 구슬픈 노래 소리
大洞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고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파도에 보태니
歇 : 쉴 헐, 그치다, 개다
이달(李達 1561~1618)이 송광사 불일암(佛日庵) 인운 스님에게 준 시
(이달은 조선 중기 사람으로 서얼로 태어나 불우하게 살다간 천재시인, 허난설헌과 허균의 詩 스승)
寺在白中雲 (사재백중운) 절이 구름 속에 묻혀 있기로
白雲僧不掃 (백운승불소) 흰구름이라 스님은 쓸지도 않네
客來門始開 (객래문시개) 손님이 와서야 문 열어 보니
萬壑松花老 (만학송화로) 온 골짜기 송화가 다 쇠었네
壑 : 골 학, 골짜기
조선 중기 송한필(宋翰弼,생몰연대 미상)의 어재 비(昨夜雨),
花開昨夜雨(화개작야우)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花落今朝風(화락금조풍) 오늘 아침 바람에 지누나
可憐一春事(가련일춘사) 가련타 짧은 봄의 일이라
往來風雨中(왕래풍우중) 비바람 속에 왔다 가누나
별난 운(韻)을 지닌 한시들
앞에 對句 항에서 소개한 바 있는 야보선사(冶父禪師)의 시에서는 운을 같은 글자 흔(痕)으로 일치시켰음을 알 수 있다
滿塢白雲耕不盡(만오백운경부진) 둔덕 가득 흰구름은 갈아도 끝이 없고
一潭明月釣無痕(일담명월조무흔) 못속 밝은 달은 낚아도 자취가 없네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섬돌에 드리운 대나무 그림자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月光穿沼水無痕(월광천소수무흔)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위에는 흔적이 없네
滄海難尋舟去迹(창해난심주거적) 푸른 바다 배 지나간 자취 찾을 길 없고
靑山不見鶴飛痕(청산불견학비흔) 청산에는 학 날라간 흔적 볼 수 없다
필자가 여러번 올려 분석한 바 있는 황진이의 상사몽(相思夢)은 4구의 끝자 모두의 운을 맞춘것으로
다른 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相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 만나보고 싶어도 꿈속에서 뿐
儂訪歡時歡訪儂(농방환시환방농) 내 임을 찾아가면 임도 날 찾아나서
願使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아득한 님 다른 밤 꿈에서는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로중봉) 같은 때 같이 떠나 길 가운데서 만나 보고파
儂 : 나 농
한시로 장난을 잘 치기로 정평(?)이 난 김삿삿의 이별이라는 제하의 시는 가련(可憐)이란 글자를 각구 앞뒤에 2번씩 써서 지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可憐門前別可憐(가련문전별가련) 가련이의 문 앞에서 가련이과 이별하려니
可憐行客尤可憐(가련행객우가련)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可憐莫惜可憐去(가련막석가련거) 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나감을 슬퍼하지 말라
可憐不忘歸可憐(가련불망귀가련) 가련이를 잊지 않고 가련이에게 다시 오리니
같은 김삿삿의 시로 중국사람들은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대(竹)로 라는 시는 더욱 파격적이다.
此竹彼竹化去竹(차죽피죽화거죽)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風打之竹浪打竹(풍타지죽랑타죽)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飯飯粥粥生此竹(반반죽죽생차죽)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고
是是非非付彼竹(시시비비부피죽)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놔둬라
賓客接待家勢竹(빈객접대가세죽) 손님 접대는 집안 형세대로
市井賣買歲月竹(시정매매세월죽) 시장에서 장사는 세월 가는 대로
萬事不如吾心竹(만사불여오심죽) 만사 내 마음대로 못하니
然然然世過然竹(연연연세과연죽)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