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업공덕(身業功德)]
【왕생론】
相好光一尋,色像超群生。
【번역】
상호에서 나오는 광명이 일심(一尋)이고
색신(色身)의 용모는 일체중생을 뛰어넘네
*심(尋): 두 팔을 벌렸을 때 두 손끝 사이의 거리를 1심이라 부른다. 이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대략 여섯 자에서 여덟 자 정도 되고, 극락세계 아미타불의 경우는 60만억나유타항하사 유순이다.
【왕생론주】
此二句,名「莊嚴身業功德成就」。
佛本何故莊嚴如此身業?見有佛身,受一丈光明,於人身光,不甚超絕,如轉輪王相好亦大同,提婆達多所減唯二;致令阿闍世王以茲惑亂,刪闍耶等敢如螳螂,或如此類也。是故莊嚴如此身業。
案此間詁訓,六尺曰尋。如《觀無量壽經》言「阿彌陀如來身高六十萬億那由他恆河沙由旬,佛圓光如百億三千大千世界」,譯者以「尋」而言,何其晦呼內反乎!里舍間人,不簡縱橫長短,咸謂橫舒兩手臂為尋。若譯者或取此類,用準阿彌陀如來,舒臂為言故稱「一尋」者,圓光亦應徑六十萬億那由他恆河沙由旬。
是故言「相好光一尋,色像超群生」。
【번역】
이 두 구절을 “장엄신업공덕성취(莊嚴身業功德成就)”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인지에서 무슨 이유로 이 신업을 장엄하기로 발원하였는가? 어느 부처님의 몸을 보니, 1장 남짓의 광명밖에 없어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광명에 비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였다. 예컨대 (부처님의 상호는) 전륜왕의 상호와 대체로 비슷하다. 제바달다의 상호는 (부처님보다) 두 가지 상호만 적을 뿐이어서 아사세왕이 (제바달다의 상호에) 홀려 제바달다를 새 부처님으로 착각하기에 이르렀고, 산자야 등의 외도들도 감히 사마귀가 앞발을 들어 수레와 맞서려 하듯이 부처님께 대들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는 까닭에 법장보살이 일체중생을 훨씬 뛰어넘는 상호광명을 장엄하기로 발원한 것이다.
한문의 해석에 따르면, 여섯 자(尺)를 1심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 말하기를 “아미타여래의 신장이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고, 부처님의 둥근 광명(圓光) 은 백억 개의 삼천대천세계와 같으니라.”라고 하였으니, (왕생론을) 번역한 이가 “심”이라고만 말한 것은 얼마나 불분명한가! 시골에 사는 무식한 사람들은 체격이 크든 작든, 뚱뚱하든 마르든 모두 옆으로 두 팔을 폈을 때의 길이를 1심이라고 부른다. (만약 번역한 이가 이것을 예로 든 것이라면, 즉 아미타불께서 펴신 두 팔의 길이를 1심이라고 한 것이라면) 아미타불의 둥근 광명도 그 직경이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어야 한다.
(아미타불께서 신업공덕장엄을 성취한) 까닭에 “상호에서 나오는 광명이 일심(一尋)이고, 색신의 용모는 일체중생을 뛰어넘네”라고 말한 것이다.
*산자야(刪闍耶): 부처님 시대 육사외도 가운데 자연외도로서, 원래 사리불과 목건련의 스승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도는 구할 필요 없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고苦가 다하고 도를 얻게 된다고 한다.
【왕생론주】
問曰:《觀無量壽經》言「諸佛如來是法界身,入一切衆生心想中。是故汝等心想佛時,是心即是三十二相、八十隨形好。是心作佛,是心是佛。諸佛正遍知海,從心想生」,是義云何?
【번역】
묻기를: 《관무량수경》에서 말하기를 “제불여래는 법계신이므로, 일체중생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느니라. 그런 까닭에 너희들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곧 32상과 80수형호이니라. 따라서 마음이 부처를 짓고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모든 부처님의 정변지해(正遍知海)는 마음의 생각에서 생기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법계신: 법계를 몸으로 삼기에 몸이 법계에 편만해 있다. 제불여래는 진리의 존재이고, 부처님의 몸은 일체 법에 편만해 있으므로 “법계신”이라고 부른다. 또 법계가 곧 중생의 심법(心法)이므로, 부처님의 몸은 일체중생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다.
*정변지해: 정확하고 남김없이 일체 만법을 깊이 알 수 있는 지혜를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왕생론주】
答曰:「身」名集成,「界」名事別。如眼界,緣根、色、空、明、作意五因緣生,名為眼界。是眼但自行己緣,不行他緣,以事別故。耳、鼻等界亦如是。
言「諸佛如來是法界身」者,法界是衆生心法也,以心能生世間、出世間一切諸法,故名心為法界。法界能生諸如來相好身,亦如色等能生眼識,是故佛身名法界身。是身不行他緣,是故入一切衆生心想中。
「心想佛時,是心即是三十二相、八十隨形好」者,當衆生心想佛時,佛身相好顯現衆生心中也。譬如水清則色像現,水之與像,不一不異。故言佛相好身即是心想也。
「是心作佛」者,言心能作佛也。「是心是佛」者,心外無佛也。譬如火從木出,火不能離木也。以不離木故,則能燒木;木為火燒,木即為火也。
「諸佛正遍知海,從心想生」者:「正遍知」者,真正如法界而知也。法界無相,故諸佛無知也;以無知,故無不知也;無知而知者,是正遍知也。是知深廣不可測量,故譬海也。
【번역】
답하기를: (법계신의) “신(身)”은 (여러 가지 요소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계”는 사물 간의 차이를 말한다. 예컨대 안계(眼界:눈의 경계)란, 안근(根), 색경(色), 공간(空), 빛(明), 작의(作意) 등 다섯 가지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을 “안계”라고 부른다. 이 안근(눈)은 자기와 상응하는 색경(色境)만 반연할 뿐, 기타 외경(外境)을 반연하지 않는다(눈은 색만 볼 수 있지,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 간에 (안근의 기능은 색계色界를 식별하는 것이므로, 색계는 성계聲界, 향계香界, 미계味界, 촉계觸界, 법계法界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귀, 코, 혀 등의 경계 역시 이와 같다.
“제불여래는 법계신(諸佛如來是法界身)”에서 법계란, 일체중생의 심법(의근意根이 반연하는 대상)을 말한다. 마음은 능히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법을 생겨나게 할 수 있는 까닭에 마음을 법계라고 부른다(눈은 만물을 볼 수 있고, 마음은 만법을 생기게 할 수 있으므로, 각자의 기능과 작용의 영역이 있다). 법계가 능히 제불여래의 상호를 구족한 몸을 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이 마치 색법 등이 안식(眼識)을 생기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까닭에 부처님의 몸을 “법계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몸(법계신)은 (다만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함에 의해 나타날 뿐) 다른 경계를 반연하지 않는(意根은 오로지 法界만 반연하여 일체중생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까닭에 “일체중생의 마음속에 들어가느니라.”라고 말한 것이다.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곧 32상과 80수형호(心想佛時,是心即是三十二相、八十隨形好)”란, 중생이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 부처님 몸의 상호가 중생의 마음속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이 맑으면 주변 사물의 그림자가 물 위에 비쳐 나타나는 것과 같은데, 물과 그림자는 동일(同一)하지도 않고 상이(相異)하지도 않은 (만일 동일하다면 물이 곧 그림자여야 하는데, 물은 결코 그림자가 아니므로 그림자가 사라져도 물을 그대로 남아있다. 만일 상이하다면 그림자는 물 밖에 있어야 하나 물 밖에는 그림자가 없고 물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중생의 마음은 맑은 물과 같고, 부처님 몸의 상호는 물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중생이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의 몸이 중생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은 마치 “물이 맑으면 사물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처럼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하지도 않다) 까닭에 “부처님의 상호를 구족한 몸이 곧 마음속의 생각(佛相好身即是心想)”이라고 말한 것이다.
“마음이 부처를 지음(是心作佛)”이란, 마음은 능히 부처를 지을 수 있다(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의 상호가 마음속에 나타난다)는 말이고, “마음이 곧 부처(是心是佛)”란, (자기 마음속에서 부처님의 몸이 나타나므로) 마음밖에 부처가 없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두 나무를 비벼서 얻은) 불은 나무에서 나오므로 불은 나무를 떠날 수 없고, 나무를 떠나지 않는 까닭에 나무를 태울 수 있으며, 나무가 불에 타므로 나무가 곧 불이 된 것이다. ('불은 나무에서 나온다'란 부처님 몸의 상호가 염불하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에 비유한 것이고, '불은 나무를 떠날 수 없다'란 부처님의 몸은 중생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에 비유한 것이고, '나무가 불에 타므로 나무가 곧 불이 된다'란 부처님의 몸이 중생의 마음속에 들어가 범부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되었으므로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중생의 마음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마치 나무가 불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이미 불이 붙은 나무와 같으므로 불이라고 한 것이고, 중생은 아직 붙지 않은 불과 같으므로 나무라고 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정변지해는 마음의 생각에서 생겨난다(諸佛正遍知海,從心想生)”에서 “정변지”란 여실하게 법계를 아는 것을 말한다. 법계에는 상이 없는 (법계에는 생멸生滅, 래거來去, 상단常斷, 일이一異 등 허망한 상이 없다. 허망한 상이 없는 이상, 제불의 지혜에도 ‘앎’이란 없다. 왜냐하면 인식의 대상이 없으면 대상을 인식하는 ‘앎’도 없기 때문이다) 까닭에 모든 부처님은 아는 바가 없고(진실한 지혜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분별이 끊어졌다), 아는 바가 없는 까닭에 모르는 것이 없다(부처님의 지혜가 대상을 반연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면서 모든 법을 아는 것은, 대상에 대한 반연 없이 아는 것이 본성의 자연스런 조견照見이기 때문이다. 법계는 허망한 상을 여의였기에 아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마음은 앎의 주체가 되고 법은 앎의 대상이 되므로, 이때 법계를 남김없이 비추어 아는 진정한 앎을 장애하게 된다. 반면에,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가지 희론戱論이 사라지면 마음이 곧 법계이고 법계가 곧 마음이므로, 자연히 일체를 남김없이 알게 된다). 아는 바 없이 아는 것이 “정변지”이다. 이 앎이 깊고 넓어 헤아릴 수 없는 까닭에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 일체 생사의 법을 “세간”이라 부르고, 생사에서 벗어난 열반의 법을 “출세간”이라 부른다. 고와 집은 “세간”이 되고, 멸과 도는 “출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