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옴미아드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
1. 이슬람 전통의 옴미아드 왕조(7-8c)
무하마드가 죽은 뒤 아랍인들은 후계자로서 <칼리프>를 선출하였습니다. <칼리프>를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제사장>, <교회지도자>가 되겠네요. 아랍인들은 칼리프의 지도 아래 대규모의 정복사업을 시작하였고, 가장 먼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시리아, 이집트를 비잔틴으로부터 빼앗습니다. 또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예 멸망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정복지가 확대되면서 아립인 지도자간의 내분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제, 3대까지의 칼리프는 마호메트 가족 밖에서 선출했는데, 이것은 유목민족의 부족적 관습에 의거한 것이였죠. 하지만, 정복지가 늘어나면서 아립인 지도자들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합니다. 마호메트의 조카이자 사위인 알리가 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는데, 이것은 마호메트 직계가 칼리프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호메트의 가족들은 사위 알리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칼리프는 세습할 것, 마호메트의 코란에는 주석을 달지 말고 신성하게 여길 것을 주장합니다. 이것을 이슬람에서는 <시아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다수의 이슬람 교도들은 칼리프는 폐쇄적으로 구성하지 말고 선출할 것, 코란에는 주석을 달 수 있도록 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 다수의 이슬람 교파를 <수니파>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와중에 알리가 암살당했습니다. 보통 무하마드의 사후 칼리프를 선출하던 알리까지의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 알리와 대립하고 있던 시리아 총독 무와이야는 <다마스쿠스>에 <옴미아드 왕조>를 개창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수니파>적 사고방식을 가진 왕조네요. 이 옴미아드 왕조는 7-8c 이슬람의 전성기를 열었던 왕조입니다. 7c 말경에 아랍어를 공용어로 확정하였고, 아랍통화를 제정하면서 <아랍>이라는 민족적 단위가 형성되었습니다. 원래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지방의 사막에서 오아시스 농업에 종사하던 유목민을 칭하는 말이지만, 옴미아드 왕조의 영토 확장과 아랍어 수호 운동으로 아랍이라는 민족단위는 더 확대됩니다. 이후 정복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이슬람교도로 개종한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로써 아랍인이라는 개념은 더욱 확장되어 갑니다.
당시 옴미아드 왕조의 점령지역은 아주 넓었고, 영토확장은 거의 지는 경우가 없이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시리아로부터 시작하여 사산조페르시아, 이집트, 중앙아시아, 인더스강 유역, 동로마령 카르타고, 서고트 왕국(에스파냐)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을 건설하였죠. 그러나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패함으로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 전체를 정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옴미아드 왕조의 정복사업으로 광대한 이슬람 세계의 영역권이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에 걸친 3대륙의 대 제국이 형성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교로 정치적인 단결이 쉽게 이루어졌고, 지하드(성전)이라는 교리가 정복사업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당시 국제정세가 이슬람에게 유리했습니다.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오랜 항쟁으로 상호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또 시리아와 이집트의 경우,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지 상태로 남아 이슬람의 정복사업이라는 것이 크리스트인들에게 위협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누가 점령하든 식민지 생활만 청산되면, 종교 교리는 무시해도 된다고 여긴 것이죠.
세 번째로는 개종자에게 부여한 면세의 특권입니다. 이교도에게는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면서 공납만을 요구했으며, 개종자들은 세금의 특혜를 주었습니다. 즉, 종교를 전파하는 <지하드>를 목적으로 삼았기에, 살기 좋은 땅과 전리품을 차지할 뿐 선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착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이슬람교 지도자들은 정복지를 지배할 때,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도 세금을 내면 이슬람교도로 개종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이슬람교가 됨으로서 <지하드>를 완성함과 동시에, 이슬람 문명권 안에서 의사, 통역, 법관 등 다양한 계통의 직업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이슬람교의 교리가 단순하고 평등사상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목민족들은 이슬람 교도들의 승승장구를 알라신의 가호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사제, 신관, 종교계급이 없는 평등한 종교였습니다. 이슬람교는 원칙적으로 모든 신자들은 인종, 성별, 계급, 재산에 상관없이 평등함을 강조합니다. 실제, 투르크계 인종들과 몽골인들도 이슬람교로 많이 개종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이슬람교에서는 아랍어 외에 코란의 번역을 금지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교가 되어 코란을 읽고, 이슬람의 혜택을 받으려면 아랍어가 필수가 되었고, 아랍어를 중심으로 성립된 민족공동체 의식은 쉽게 깨지지 않는 것이였습니다. 민족의 구성단위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언어의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2. 아바스 왕조(8c-)
750년 무하마드의 일족인 아바스 가문이 시아파의 전통을 내걸고, 이란인 계통의 무슬림의 도움을 얻어 옴미아드 왕조를 타다하고 아바스 왕조를 개창하였습니다. 그 성립 배경을 보면 영토 확장으로 이민족 이슬람교도가 상당히 많아졌는데, 이들이 초기 이슬람교도와 정치적으로 평등함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페르시아 이란계 무슬림들이 체제 불만을 갖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아바스 가문은 시아파 전통을 내세웠지만, 실제 주도권은 이란인 계통의 무슬림이였습니다. 결국 시아파는 탄압당하고, 이란인도 우대받는 왕조가 성립되었습니다. 아바스 가문은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국가를 확립합니다.
아바스 왕조는 재상 중심의 동방적 관료제와 상비군을 두었는데, 여기서 아랍인의 특권은 없었습니다. 중요한 직책에는 이란인도 우대받았고, 궁정의 친위부대도 이란계 이슬람교도, 투르크계 노예병(마물루크)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세금제도에 있어서도 아랍인, 비아랍인은 차별이 없었습니다. 이슬람교도이면 누구나 똑같이 인두세를 면제 받았고, 토지세는 누구나 공평하게 내야만 했습니다. 아바스 제국은 민족차별법을 폐지하여 이슬람법에 기초하여 통치하는 진정한 이슬람 제국을 성립시킨 것입니다. 이슬람 제국에서는 누구나 <아랍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3. 아바스 왕조의 국가 성격
아바스 왕조의 국가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페르시아적> 성격이 우세합니다. 즉, 이란계 페르시아 문화가 이슬람 곳곳에 침투한 흔적이 보입니다. 페르시아적인 궁정조직, 동방적인 관료제도로 이루어진 국가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느슨한 봉건제도>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바스 군대가 이민족이 많다는 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바스 왕조에서는 이란계 용병 및 투르크계 노예병(마물루크)가 주류를 이루면서 보수로 토지를 급여했습니다. 즉, 군역의 댓가로 용병에게 토지를 주는 봉건제도가 유행이였죠. 또 정복지 군사령관을 겸한 행정관료(태수)를 임명하는 제도는 점차 독립적인 성향의 봉건영주를 육성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바스 왕조는 문화가 크게 발전한 시기의 국가입니다. 아바스 왕조는 칼리프가 학문, 예술을 장려하고 학자를 보호함으로 문화의 수호자임을 자처했습니다. 특히, 그 지리적 위치가 동서문화의 요충지로서 중계무역의 독점과 무역으로 대도시의 부가 쌓으면서 바그다드, 카이로 등은 예술과 학문의 도시로도 성장하게 됩니다. 이 아바스 왕조는 옴미아드 왕조를 뒤이어 영토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옴미아드 왕조가 지중해쪽에 주력한 영토확장이였다면, 아바스 왕조는 동방 진출에 적극적이였죠. 특히, 중국 고선지 장군이 석국(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을 점령하자, 석국의 왕은 아바스 왕조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로서 거대한 30만의 아바스 대군과 중국군의 아시아 대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아바스 왕조는 중국군을 격파하고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거머쥐게 됩니다. 이 때 포로로 잡힌 중국의 제지 기술자에 의해 종이가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었다고도 합니다.
4. 이슬람 세계의 분열
아바스 왕조가 8c 개창하자 옴미아드 왕국의 일족은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에 후옴미아드 왕조를 개창합니다. 후옴미아드 왕조는 아바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지도자가 문예를 진흥하여 <코르도바>는 서방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습니다. 8c 후반 이후 아바스 왕조의 <느슨한 봉건제도>는 각각의 봉건영주들이 독립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10c 초에는 북아프리카에서 <파티마 왕조>가 칼리프 칭호를 사용하면서 아바스 왕조의 권위를 부정합니다. 이 때, 후옴미아드 왕조도 칼리프를 칭하면서 3인 칼리프 시대가 열립니다.
10c 중반 이란계 시아파의 브와이 왕조는 아예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군사, 행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인 역할만을 담당하는 왕실로 추락하였다가 13c 훌라구가 이끄는 몽고군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몽고의 시대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