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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31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오 14,1-12
‘나쁜 사람’ 안 되는 법: 사랑은 ‘나’를 포기하게 만든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왕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헤로데가 되살아난 것이라 여깁니다.
두려움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입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와 살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잘 추자 그녀의 뜻대로 요한을 처형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왕이면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고 군중과 가족들에게 휘둘립니다.
그리고 결국 예언자를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 살다가는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이 됩니다. 나뿐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 삽시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자기 주관대로 살자는 말입니다.
책 제목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 『잊지마,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등의 제목으로 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나’로 산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성찰하지 못한 말들입니다.
헤로데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되어 살려는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나’라는 말은 나의 정체성과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귈 사람을 규정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화 ‘트와일라잇’은 ‘벨라’란 한 인간 여인을 사랑한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늑대인간 ‘제이콥’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영화이지만 ‘나’라는 정체성이 어느 세계에 속하게 만들고 누구와 사귀게 되느냐를 말해주는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집니다. 뱀파이어지만 착한 뱀파이어입니다.
동물들의 피만 먹고 사람의 피는 먹지 않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작정한 몇 안 되는 뱀파이어 가족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벨라 옆에는 사람의 피를 먹는 뱀파이어들도 득실댑니다.
자신을 사랑하다가는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그녀를 떠납니다.
이때 늑대 인간 제이콥이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뱀파이어가 아닌 한 보통 인간을 사랑하고 싶어
조금씩 그에게 의지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음에 사랑했던 뱀파이어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제이콥은 벨라가 걱정돼 전화를 건 에드워드에게 벨라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드워드는 살 의욕을 잃고 햇빛에 자신을 노출시켜 자살하려 합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벨라는 자살하려는 에드워드를 구해주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에드워드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뱀파이어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인간들 안에서 숨어서 살며 인간을 해치지 않으며 모든 위협을 참아내며 살아가야 하는 뱀파이어의 삶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벨라도 이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너무 강렬했기에 뱀파이어는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듭니다.
여기서 ‘나’는 늑대, 인간, 뱀파이어로 나뉩니다. 그리고 뱀파이어도 좋은 뱀파이어와 나쁜 뱀파이어로 나뉩니다.
이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은 ‘나’라는 정체성입니다.
내가 뱀파이어를 사랑하고 뱀파이어의 세상에서 뱀파이어를 사랑하려면 ‘나’가 뱀파이어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인간은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 인간의 삶을 포기합니다.
헤로데는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 사람들과의 친교를 위해 예언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나를 바꾸지 않기 위해 나를 바꾸기를 원하는 이를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믿는 ‘나’가 ‘사람’이라는 인간들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친교를 넘어서는 더 높은 수준의 친교가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새장이나 어항에 머물며 그 안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이 아닌 바다와 창공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고 그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음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길은 나를 이 세상에 가둬놓는 ‘나’라는 정체성을 더 큰 ‘나’와 교환하는 것입니다.
벨라가 인간이라는 협소한 세상을 벗어나 영원히 죽지 않는 뱀파이어의 사랑을 하기를 원해 한 일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나는 뱀파이어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주어 교환하는 행위입니다.
나뿐인 사람은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인 ‘나’를 포기하고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나’로 삼으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로 살면 나를 살리기 위해 ‘나’가 속은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헤로데처럼 괜히 삶의 주체가 ‘나’가 됨으로써 세상의 노예이면서도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하며 세상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다는 말은 우리 전 존재의 정체성이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하느님 자녀들이라 믿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위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나도 그리스도요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마태오복음 13,54-58
내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습니다.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습니다!
언젠가 짧게나마 맛봤던 영신수련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가 우리 신앙의 후예들을 위해 선물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지도 신부님의 안내에 따른 집중 관상기도를 통해 제 자신의 적나라한 내면 상태를 뚜렷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영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짙은 어둠과 무질서를 확인하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실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성찰작업은 저를 한 가지 특별한 깨달음에로 안내했습니다.
‘내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구나.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구나.
결핍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넘치는 부분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토록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항상 나를 지속적으로 사랑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
‘이토록 부족하고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런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두려움에 대해 일러주십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세례자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로데에게 지치지 않고 진언을 합니다. 혼인 관계에 관한 하느님의 뜻을 두려움 없이 전한 것이지요. 무소불위의 힘과 세력을 지닌 이에게 진리를 일깨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이 박해받고 죽음을 당한 것이지요. 결국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마태 14,5)
헤로데라고 뭐가 옳은지 그른지 모를 리는 없지만 욕정이 눈을 가리운 데다 주위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니 어느새 옳고 그름의 기준마저 모호해졌을 테지요.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고 싶은 마당에 요한이 계속 양심을 건드리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불의한 권력자 해로데의 해법은 진리의 숨을 막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을 죽이려 했지요. (사실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에서는 헤로데의 나름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설명하기는 합니다만...)
여기서 헤로데가 요한을 없애는 데 단 하나 걸림돌이 있다면 군중입니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존경하기 때문에 후폭풍이 두려웠던 게지요. 천하의 헤로데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던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그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자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란 점이지요.
그는 인간의 눈에 들고 싶어하고,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인정받고 칭찬받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는 성향인 듯합니다. 그런 헤로데였기에 경솔하고 경박하게 맹세를 남발하다 결국 체면과 허세를 지키려 역사에 길이 남을 불의한 살인을 저지른 셈이지요.
여기서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하느님의 사람과 악인, 예언자와 박해자 사이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라는 차이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희년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레위 25,10)
희년은 말 그대로 기쁨의 해입니다. 그동안 삶의 질곡에서 얽히고섥히면서 잃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했던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보장해 주는 장이라 할 수 있지요.
희년에는 어떤 이는 자기 소유지를 되돌려받고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며, 또 어떤 이는 그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축적하며 달려온 탐욕의 질주를 멈추고 과잉으로 축적한 것을 돌려주어야 하지요. 가나안 정착 시절 하느님께서 땅을 고루 나누어주시면서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해 주셨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가능한 제도일 겁니다. 사실 현대의 자본주의적 경제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요. 가진 자는 세습을 통해 계속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하고 오히려 제도가 이를 뒷받침해 주니까요.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레위 25,12)
마치 일주일에 하루 있는 안식일처럼 그 해에는 파종이나 추수, 수확 등의 모든 생산활동이 금지됩니다. 이를 그저 게으르게 놀고 먹기만 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온전히 의탁하라는 의미일 겁니다.
노동과 경제활동은 생계 유지와 자아 계발, 공동체 발전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빈부격차의 심화와 차별 등의 불합리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악이 사람 안에 깃든 하느님의 모상성을 자기중심성으로 비틀어 이기심을 부채질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어느새 하느님에게서 골고루 나누어받은 재화에 대한 감사를 잊고 자기와 가족의 부와 안위를 위해 내달립니다. 그게 타인을 억압하고 해치고 짓밟는 일이어도 그렇게 하지요.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레위 25,17)
안식일 법이나 희년 제도는 결국 하느님 경외를 알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잊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며 얕은 체세술과 끝없는 탐욕으로 제 이익만 추구하던 사람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깨닫게 해 주는 시간이 곧 희년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갑자기 새로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그동안 자기를 가려 주고 보호하던 장치들을 내려놓고 벌거벗게 되면 찾아오는 근원적 인식입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면 어느 때건 반드시 맞게 되는 각성과 통찰의 때이기도 하지요. 그 때와 시간, 방법이 각자 다를 테지만 은총의 순간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구를 두려워하는지 자신의 영혼을 잘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자녀라면, 그리스도의 벗이고 성령의 거처라면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는 주님이시지요.
희년의 실천이 세속을 살아가는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의 해, 희년 정신의 근본은 하느님 경외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니, 탐욕스럽고 방만한 물질주의 세상 안에서 부족하고 미약하나마 그 정신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려 애쓰는 우리 모두는 참으로 복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