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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묵상글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 그리스도의 사랑에 다그침 받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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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22. 05:34
- 그리스도의 사랑에 다그침 받는 우리
막달레나 성녀는 어떤 분인가?
어떤 분이라고 함이 가장 합당할까?
이번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인가?
맞는 말입니다.
성녀는 주님을 가장한 사랑한 여인인데
여인 가운데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일 뿐 아니라
사도들과 비교해도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고,
주님을 가장 사랑했다고 하는 요한 사도보다도 더.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른 사도들은 다 도망쳤어도
실제로 요한 사도만은 주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는데
그런 그도 주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엔 사랑이 끝난 듯 주님을 찾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는 빈 무덤을 보고서도 찾아 나서지 않은 그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연인을 찾아 헤매는 아가를 독서로 한 것이 시사하듯
성녀가 주님을 찾아 헤맨 가장 사랑한 여인인 것 맞습니다만
사랑한 여인 이상의 분이라고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성녀의 축일을 축일로 지내게 하였고,
감사송을 특별히 지어 바치며 성녀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명명합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성녀는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성녀도 처음에는 주님 만난 기쁨에만 머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붙잡으려는 성녀에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
그래서일까 아가서의 대체 독서인 코린토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도 다그침을 받습니까?
그래서 사랑을 넘어 사명을 실천하는 오늘 우리입니까?
늦잠을 자서 많은 묵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포르치운쿨라 행진에 들어갑니다.
혹 강론 올리지 못하는 날이 있을지 모릅니다.
저와 행진단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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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얼마 전에 어디를 가다가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 있는 분이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신호가 바뀌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그분을 따라 건너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호가 보입니다. 파란불이 아닌 빨간불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분을 쫓아 건너려고 했던 분이 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일상에서 자주 접하게 됩니다. 대화 중이던 친구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면 제 손도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잡습니다. 내 옆의 사람이 하품하면 저 역시 입을 벌려 하품하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모방 행동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 모두 공동체 안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행동만 연결되어 있을까요? 아닙니다. 감정까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의 힘든 감정을 이야기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도 감정의 동화를 느끼면서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쁘고 즐거운 감정도 전달되어서 상대 역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에 어떤 행동과 감정을 전달해야 할까요? 공동체 자체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다면, 그 영향을 받는 나 역시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가 전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성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끝날 때까지도 주님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십자가의 죽음 뒤, 무덤에 묻히신 다음에도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어서, 누가 주님을 꺼내 갔다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분이 왜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슬픔의 감정, 모든 것이 끝났다는 감정,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고,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며 전합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주님을 알아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세상에 기쁨을 전달해야 합니다. 우리도 기쁨을 속에서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권정생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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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으로, 이러한 관점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실,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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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흘려도 공허한 가슴은 채울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7,53),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여인(루카 8,2),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요한12,3) 등 복음 속의 다양한 여인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차마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고 치유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눈에서 절망의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끝까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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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라./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만물의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해 한 말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빨리 간다./ 우리의 심정은 튼튼하고 용감하나/ 싸맨 북소리처럼 둔탁하게/ 무덤 향한 장송곡으로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 안에서/ 발 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매장하라!/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느님이 있다!/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치느니,/ 우리도 장엄한 삶을 이룰 수 있고,/ 우리가 떠나간 시간의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남길 수가 있느니라./ 그 발자취는 뒷날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다가/ 파선되어 버려진 형제가 보고/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지니./ 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지 않으려나./ 어떤 운명인들 이겨낼 용기를 지니고,/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면서/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지 않으려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멋진 글입니다. 롱펠로우의 삶은 그가 예찬한 것처럼 멋지고,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롱펠로우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우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롱펠로우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롱펠로우에게 힘을 준 것은 바로 부정이 아닌 긍정의 마인드였습니다. 인생은 환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을 고목(古木)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고목의 새순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이 바로 인생의 새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새로운 감정이 생깁니다. 우울한 생각을 하면 우울한 감정이 생깁니다. 감사의 생각을 품으면 감사할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두가 포기했을 때, 모두가 두려워 숨어 있을 때에도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하여라. 나는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전하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옛것의 기준은 시간의 순서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나이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부정과 불평 그리고 불만입니다. 새것의 기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의 순간에도, 역경의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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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마리아 막달레나가 울고 있습니다. 그녀 울음의 근원은 단 하나입니다. 더 이상 주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슬픔으로 그녀는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신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그 시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또 하나의 상실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녀에게 물으십니다. ‘왜 우느냐?’라고 말입니다. 사실 갑작스러운 슬픔이나 두려움에 빠지면 잘 알아듣거나 잘 보기가 어렵습니다. 순간 당황한 마음으로 모든 것이 정지됩니다.
그녀도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주님께서 부르시는데도 그 음성을 못 알아볼 정도면 그 슬픔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을 것입니다.
부르시는 주님께로 돌아섰지만 그녀의 눈물은 주님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윽고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정확하게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라고 말입니다. 마리아는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흐르는 연신 닦아내며 주님을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주님이 그녀 앞에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과도 같은 위로는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무나 그 슬픔이 커서 우리가 못 알아듣고 못 볼 때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이름을 말입니다.
주님을 만난 마리아의 눈물은 이제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들의 슬픔과 눈물도 주님 안에서 기쁨의 눈물로 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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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긁지 말아야 하는 것.
우리가 긁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카드사 광고 중에 이런 광고문구가 있습니다.
카드는 긁어도 마음은 긁지 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긁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로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카드 편하게 긁는 것처럼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편하게 긁습니다.
친하니까 긁고, 편하니까 긁고, 이해해 주니까 긁고, 가족이니까 긁고….
차라리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카드를 긁어주세요. 마음 긁지 마시고요.
카든 긁고 갚아나가면 되겠지만 한번 긁힌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잘 낫지를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마음을 긁으려거든 카드를 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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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리아 막달레나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최고봉”
사도들의 사도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땅,
이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3,2)
벌써 가을이 온 듯 강론을 쓰고 있는 고요한 여름 밤, 풀벌레 청낭한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대는 물론 교회 전 역사를 통틀어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유일한 분이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일 것입니다. 성녀와 예수님의 사랑관계를 보면 이성간의 연정과 스승에 대한 우정의 사랑이 절묘하게 조화된, 그러나 선을 넘지 않은, 하늘을 우러러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는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최고봉처럼 생각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이름 대문자는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아이콘이된 느낌입니다. 얼마전 제가 어느 분의 단편소설에 추천의 글을 썼는데 그 소설 제목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줄인 ‘막달라’였습니다. 성녀의 아침기도 찬미가 아름다운 다섯째 연을 인용합니다.
“향기론 막달라의 고운꽃이여
예수의 사랑으로 도취된이여
당신의 타오르는 사랑으로써
우리의 마음들을 달궈주소서”
26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1998년 12월25일 주님 성탄절에 수녀님으로부터 빨간 칸나꽃을 받고 즉석에서 쓴 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였고 지금까지 무수히 나눴지만 나눌 때 마다 새롭고 좋았던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의 사랑이 이럴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 사랑에 목숨을 건 수도승들의 모범이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일 것입니다.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망라한 소설로 태백산맥을 읽을 때는 40대 수도생활중에도 밤을 새워 읽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인터뷰중 기자가 그의 아내 시인 김초혜는누군가 물었을 때 답변도 잊지 못합니다.
“집사람은 제게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 막달레나에 예수님이 누군가 물었을 때 역시 성녀의 답변도 이와같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그대로일 것이며 제 경우도 똑같을 것입니다.
“그분은 제게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48년전 28세 젊은 교사시절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제모습을 물었을 때 자매님과 주고받은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멋있어요! 인기가 많았겠어요!”
“그때는 멋있는 줄 몰랐어요! 그때는 인기가 좋은 줄 몰랐어요!”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교회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늦게서야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 사랑에 감격한 교회는 2016년, 그러니까 거의 2000년이 지난 다음에야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도들의 등급인 축일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을 받들어 교황청 경시성은 2016년 6월3일 교령 “사도들을 위한 사도”를 통해 ‘이날은 로마 보편전례력에서 사도들의 경축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축일 등급을 지니고 교회의 모든 여성의 모범이고 본보기인 이 여인의 특별한 사명은 강조되어야 한다.’ 밝힙니다. 서방교회는 전통적으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해석에 따라 예수님의 발에 야유를 바르며 참회하는 여인, 마르타와 라자로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한 인물로 결합시킵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도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셨고’, ‘부활의 기쁜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배경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녀에게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는 호칭을 부여했고 바로 교령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예수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한폭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그림처럼 압축적으로 드러납니다. 제1독서 아가서중 신부의 서두와 마지막 말마디는 그대로 성녀 마리악 막달레나의 고백을 방불케 합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 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오늘 복음중 감동적인 몇 대목을 나눕니다. 맨먼저 예수님 무덤에 도착한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 였고, 빈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입니다. “왜 우느냐?”는 천사의 물음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는 성녀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당신을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에 감동하신 부활한 주님께서 나타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아시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묻지만 성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로 착각하고 다시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일편단심의 사랑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르십니다. 새삼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마리아가 아무리 주님을 찾았어도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없었으면 못 만났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나눠야 할 묵상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는데 착각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정원지기 아담의 실패를 완전히 만회하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온 새 에덴 동산의 정원지기 주인공이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으로 바뀌었음을 봅니다. 여기서 또 죽음을 가져온 하와의 실패를 만회하는 생명을 가져온 마리아 막달레나의 지고한 사랑이 빛납니다. 두분의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의 돌아섬은 내적전환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세상에 “마리아야!” 부르실 분은 예수님 말고 누가 있겠으며, “라뿌니!”하고 부를 분은 예수님 말고 누가 있겠는지요? 집착해 붙잡으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류하시며 하시는 말씀에서 언제 어디서나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된 모습을 감지하게 됩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환희에 넘쳐 고백하니 바로 여기에서 “사도들의 사도”라는 호칭의 유래가 됨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덕분에 새 에덴 동산을 상징하는 이 거룩한 미 시간에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생명나무의 열매, 성체를 모시게 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한결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십니다.
“당신의 은총이 생명보다 낫기에,
내 입술이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치올리리이다.”(시편63,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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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직도 그럼에도>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요한 20,1)
아직도
어두울 때에
그럼에도
빛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뿌열 때에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망설일 때에
그럼에도
희망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사릴 때에
그럼에도
사랑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움츠릴 때에
그럼에도
살림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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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5)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주님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 되라
돌이 치워진 것을 맨 먼저 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천사들과 예수님까지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분께 말을 하고그분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분께서 니를 만지지 마라’(요한 20,17 참조) 하시면 멀찍이 떨어져 서십시오. ‘말씀’을 숭배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먼저 나타내신 이들을 아시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우리의 일어남과 깨어남의 결과는 무엇인가? 본 설교와 관련된 성서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모두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루카 7,16) : “아이의 부모는 넋을 잃었다’(루카 8,56). 두려움과 찬양과 놀람이야말로 깨어남의 열매, 곧 무감각한 의식에서 부활한 우리들의 열매다. 우리 존재의 뿌리에서 감사와 사은이 싹튼다. 하느님이 깃들어 있고, 하느님이 둥지를 틀고 있는 이 신성한 우주의 선물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뿐이다. 우리는 존재와 생명과 창조계와 창조주에 압도된다. “그분은 이 모든 선물과 함께 자신까지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한다." 우리가 입 밖에 낼 수 있는 유일한 기도가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뿐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감사의 인사 외에 달리 하느님과 의사를 소통할 길이 없다고 해도,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단순한 기도야말로 모든 깨어남과 일어남의 목적, 깨어 있음의 목적, 곧 영성의 목적이다. 죽은 자까지도 생명을 선물로 받고서 찬양했다.(206)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필리 1,12-25
사도의 삶과 그리스도
형제 여러분, 나에게 닥친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온 경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들이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더욱 대담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지만, 어떤 이들은 선의로 그 일을 합니다.
선의로 하는 이들은 내가 복음을 수호하도록 정해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기심이라는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할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이 일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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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 다가가기만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7-21 ㅣNo.174388
오늘은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로 소개된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축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십자가 밑에 있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묻히실 때,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 또한 성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이로, 그분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하였던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가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로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 그 완전을 뜻하는 일곱 마귀의 의미는 잘 모른다. 그만큼 강력한 악의 세력이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에 질린 그녀를 우리 예수님은 완벽한 본모습을 찾아 주셨을 게다. 그러기에 그녀는 그 어렵고 두려운 순간순간을 온몸으로 예수님을 따른 게 아닐까? 그분의 십자가 길을 성모님과 함께 걸었고, 예수님 죽음의 그 암담한 순간에도 십자가는 물론 무덤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여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부활의 기쁜 소식을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그녀의 ‘극진한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엿볼 게다. 함께 머물러야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신앙에서의 초월적인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막달레나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신앙의 최고 사건들이었다.
그래서 아직 어두운 그 새벽에 성녀는 단신으로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이리라. 이러한 간절함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막달레나가 당신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온갖 두려움을 물리치면서까지 당신을 간절히 찾은 그녀를 부활의 최초 증인으로 선택하셨다.
초대 교회는 여인이 부활을 처음 목격하였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마리아의 증언을 곳곳에 담아 두고 있다. 마리아에 이어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다. 그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았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피를 바탕으로 증언되었다. 목숨 걸고 증언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말보다 힘이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분을 향한 그리움만이 가득한 눈물이다.
예수님은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사랑이 밴 목소리로 부르면 누구나 응답하기 마련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의 그 한 맺힌 눈물을 분명히 닦아 주셨을 게다. 그리고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괴로움도 없는 에덴과 같은 천국에서, 그녀는 기쁨에 겨워 예수님을 지금도 만나고 있으리라. 부활하신 그분은 우리에게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른 같은 그 목소리로 다정히 부르신다.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그분께서 부르시는 그 불음을 알아들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애정으로 부르시는 그 소리를. 그리고 그분을 꼭 껴안아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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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그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들음’을 통하여 힘을 드러냅니다. 특히 ‘들음’은 ‘착한 목자의 비유’(요한 10장 참조)에서 예수님의 양들이 가진 가장 독특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의 양들은 ‘들음’을 통하여 착한 목자와 깊은 일치의 관계를 맺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10,3-4).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가장 먼저 ‘들음’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에 참여하였어도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도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백처럼 우리 믿음도 들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여 참으로 살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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