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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6: 6-9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스스로 고안해 낸 생각에 매여 행동함으로서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수습 방책은 그 일들을 더 어둡게 하고 꼬이게 하기 일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알지 못하고, 또 알았다 하더라도 끝까지 그 길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수습해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소망 없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1. 본문 6절 상반은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입니다.
아브람의 위대한 겸손과 겸허한 성품이 그의 대답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말다툼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록 자기야말로 가장 훌륭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갖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며 열심히 변호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그의 다른 아내를 자원하여 포기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회복하기 위하여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하갈이 분노가 등등한 자기 안주인의 뜻을 따라 떠나갈 때에 아브람은 그녀를 자기 아내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그녀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는 그의 소망의 대상까지 무가치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분노를 감내하면서 조용하고 평온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래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보아도 그녀는 언제나 순종하는 아내로서 자기를 도와왔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막대한 경멸을 받으면서도 자기 성질을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복된 자손을 그가 돌봐줘야 되는 그 마음이 그 속에서 어떻게 사라져 버릴 수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갈은 아이를 임신해 있는 실정입니다.
아브람은 이 세상의 구원이 약속된 자손은 바로 그녀에게서 나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래를 제쳐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의 사랑과 소원을 사래보다는 하갈쪽에다 더 집중시키지 않고 있습니까? 정말로 우리는 여기서 모든 일반적인 재간이나 계획들은 지나가고 연기 속에 사라져 버리며 특별히 서글픈 시험이 닥칠 때는 그와 같이 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된 아내를 취한 그는 그 아내가 임신한 것을 보았을 때 과연 일이 척척 잘 되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어리석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화가 갑자기 야기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소망도 다 차버리고 심지어는 그것마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치되는 일을 할 때마다 역시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계획은 시험이 발발하는 초기에 벌써 낙담되며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전의 유일한 기초는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그분의 종의 믿음을 녹슬은 곳으로부터 다시 순결하게 해주시고 계십니다. 자기 상상과 자기 아내의 상상을 하나님의 말씀에다 함께 혼합시키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자기 신앙을 질식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의 찬란함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을 절단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의 죄악스런 계획에 반대하시면서 우리의 어리석은 자리에서 온전한 정신을 다시 찾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여기서 ‘내가 네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 하는 간단한 약속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사래의 허식이 계속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녀는 자식을 가질 수가 없고 오직 하갈에 의하여 가짜 자식을 가질 수가 있다고 여기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이 무참히 짓밟혀지고 더럽혀지는 인간적인 상상의 수렁 속의 시궁창은 반드시 먼저 깨끗이 세척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브람이 다른 근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그의 자식을 끌어내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본문 6절 하반은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입니다.
히브리어 “학대” (아나흐)라는 말은 모세가 여기서 고통을 주며 천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려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이 하갈을 복종하게 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몸종의 방자함을 다시 억누르려고 하는 과정에서 화가 난 여자가 자신의 분수를 지켜서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향하여 사래가 지나치게 분을 발산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그 하녀가 범한 것을 보복하는 데에 사래가 해야할 마땅한 정도를 지나쳐서 훨씬 그 이상의 화풀이를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여기서 더 이상 비난을 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하게 언급된 것에만 국한시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를테면 사래가 자기 하녀의 거만함을 제재하는 데에 자기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권위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의심할 나위 없이 그 사건에서 우리는 한가지 판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갈이 도망가게 된 것은 그녀가 주인에게 불복종한 것만큼 그 주인의 잔인성에 못 견디어 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그녀의 양심이 자신을 고발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도망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래가 그렇게 많은 그리고 정말로 잔인스런 모욕된 일만 아니었더라도 그렇게까지 격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 근성과 굽힐 줄 모르는 포악성에 차 있는 그 여자는 자기 잘못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사과하여 주인의 총애를 받은 것보다 차라리 도망가는 것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3. 본문 7절은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입니다.
우리는 이제 여호와의 백성들이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그래도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전에는 아브람과 사래의 형벌을 감면시켜 주신 것과 같이 이제는 부성애적인 인자하신 모습을 하갈에게 돌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모든 가족에게 그분의 호의를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토록 아끼신 것은 그들이 죄악을 버리지 않고 간직해 두라고 그런 사랑을 베푸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친절한 치료 방법으로 그들을 교정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술 광야로 가는 하갈이 자신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막과 광야에 대해서만 언급되는 것은 처참하게 고생을 하는 하갈이 사자가 그녀를 만날 때까지는 사람들 눈을 피해서 방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모세가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이 사자는 사람의 몸에 옷을 입고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하늘 나라 영광에 대한 분명한 표가 역력히 나타났을 것입니다.
4. 본문 8-9절은
“⑧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⑨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입니다.
1) 8절 첫머리에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식적인 명칭을 사용하여 그 사자는 하갈이 비록 자기 여주인 손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아직까지 종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살짝 도망간다거나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으로 취득되는 것이 아니라 해방증서로 자유가 취득되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으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국민정치 제도를 인정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가 없다는 것도 보여주십니다. 그 당시의 노예생활의 상태는 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야만적인 제도가 철폐된 것을 여호와께 감사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종들은 반드시 멍에를 매야 된다고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선포하십니다. 또 그 같은 사실이 바울 사도의 입에서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그들의 주인들에게도 그 노예들을 부리는 권리를 박탈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두 부류들에게 친절하게 그리고 관대하게 서로 대해줄 것을 명령합니다(엡6:4).
그리고 그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가 추론해 낼 수가 있는 것은 국민의 정부가 필수적인 것으로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합법적인 권위들에게는 양심을 따라서 순종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도망자가 된 하갈은 강제로 더 이상 순종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녀의 상태가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또 한 그 같은 논증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즉 통치자들이 부당한 매서움으로 자기들의 피지배자들을 대한다거나 주인들이 어느 때라도 그들의 종들을 혹심하게 다룬다면 그래도 그것을 견디어 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치게 자기들의 권력을 행사한다고 할지라도 그 종들이나 피지배자들이 자기들의 멍에를 떼어버릴 적당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기만하고 속여 빼앗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고 우리의 고유한 소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이 나라의 통치자들로부터 나오는 바 그들의 음성을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등뒤에다 손을 대시고 밀어서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마음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편 피지배자들을 그렇게 포악하게 그리고 교만스럽게 통치하는 자들은 언젠가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행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대사면권으로 처참한 상태에 처할 자들을 일으키시려고 압박받는 자들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때 까지는 그들 통치자들의 폭정을 견디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비교가 생기면 고대의 통치력보다 현대 통치자들의 권세가 훨씬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성애적인 권위가 그 자체의 성질 안에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갈이 도망가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금지되었다면 사람들이 자기들의 집권자들에 대항하여 부리는 그들의 방종은 더욱 더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들의 말을 불순종하고 떠돌아다니는 자들의 외고집도 용서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2) 8절 나머지와 9절까지는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입니다.
사자는 여기서 미심쩍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하갈에게 이제 전혀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자는 단호하게 그녀가 도망하는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네가 네 자신의 위치를 버렸으니 그렇게 방황해 봐야 절대로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너를 그곳에 두신 하나님의 손을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들려집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에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성소였던 아브람의 가족, 즉 그 집을 떠난 그 여종을 책망한 듯합니다. 하갈은 하나님이 거기서 특이한 방법으로 경배를 받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녀가 자기의 여주인의 면전에서 도망쳐 나오므로 간접적으로 사래를 잔인하게 비난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모든 피난처를 절단하기 위하여 그 사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녀 자신을 겸손하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말로 그 사자는 첫째로 복종하는 속박은 지나친 엄격함으로나 또는 통치자의 무능한 지배력으로도 풀어질 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자는 그 일의 잘못을 하갈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여주인을 대항하는 자리에 고집을 부리면서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상태는 망각해 버리고 나면서 여종으로 된 신분보다 훨씬 더 자신을 추켜 올려서 교만스럽고 거만하게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그녀가 자기 잘못에 대하여 정당한 벌을 받고 있을 때 사자가 그 잘못들을 바로잡아 줌으로 치료책을 추구하라고 그녀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를 주관하고 있는 자들의 잔혹성에 호소하고 그것을 완화시키려면 순종과 인내 이외에 더 이상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특별히 노력을 하여 우리가 교만함으로 인하여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는 겸손하게 처세하여 그들이 우리를 온순하게 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3) 이렇게 본문은 적용 범위가 넓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의 공예배와 일상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