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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9-15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9-15 / [침례받으신 예수;마3:13-17,눅3:21-22] 그 무렵 예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으로 오셔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 10) 그런데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마치 비둘기처럼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ㄷ)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ㄷ. 창 22:2, 시 2:7, 사 42:1) 12) [광야에서의 유혹;마4:1-11,눅4:1-13] 그 일이 있은 직후에 성령께서는 예수를 재촉하여 광야로 가게 하셨다. 13) 예수께서는 거기서 40일 동안 들짐승과 함께 지내면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동안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갈릴리에서의 전도 시작;마4:12-17,눅4:14-15] 요한이 헤롯왕에게 잡혀간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15) `드디어 때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세례를 받으심(9-11)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것은 죄가 있으셔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예수께 성령이 임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직접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백하게 밝히는 공개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받아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세례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영적 신분을 공포하는 중요한 예식이 됩니다.
시험을 받으심(12-13)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가셨습니다. 40일간 금식하시면서 들짐승들과 함께 계시며 가장 악조건 속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저자 마가는 이 시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고 매우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살아가지만 여전히 사탄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광야와 같이 열악한 환경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표현처럼 하나님께서는 끝임없이 우리를 도우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복음 전파(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전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십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표현하므로 복음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적용: 신앙생활 중에 시험과 유혹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물질, 명예, 권력의 유혹 앞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려면 어떡해야 합니까?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는 말에는 누구나 동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계와 사람은 다른 걸까요? 기계는 어떠한 자극에 반드시 동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빈 공간이 있어 어떤 반응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행복은 결정됩니다.
< 설 교 >
광야에서 이기십시오 / 최응희 목사
본문의 말씀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사건을 연결하여 읽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둘째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 받으심, 셋째는 복음전파를 시작하심입니다. 이 세 사건은 서로 별개의 사건이지만 연결해서 읽어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는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오신 예수님의 행동, 행적 자체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 세례를 받으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성자이신 그 분에게 세례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이 되시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면서,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할지를 말씀해주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확신, 날마다 그 영혼 속에서 들어야 하는 하늘의 음성이 이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날마다 이런 하늘의 음성을 영혼으로 들으면서 스스로 ‘나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하늘의 시민이다.’ 이렇게 확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식만큼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하늘에 속한 자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할 때 그 삶의 모습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말이 나오지만, 또 그의 말이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우리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계속해서 믿음의 말들과 소망의 말, 감사의 말들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의 삶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심의 말들, 불만의 말들, 불평의 말들을 자꾸 사용하면 스스로의 삶이 그렇게 불만으로 가득 차고, 있던 믿음조차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의 믿음을 바르고 확실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 나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날마다 이런 고백으로 믿음을 꼿꼿하게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광야로 나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성령께서 몰아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 내셨을까요? 그렇게 확신에 차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고백이 분명한데, 그 충만함으로 바로 나가서 증거하면 됐을 텐데 어찌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 것일까요?
믿음의 뜨거움과 능력은 바로 그 광야를 거쳐야 단단하게 굳어지고, 확실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진 비바람 눈보라를 거쳐본 나무라야 재목이 되고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굳이 예수님이 그러실 필요는 없으셨지만, 인간의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받을 때는 뜨거운데 곧바로 식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야를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든든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광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뜰에서 곧바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곳이 베드로에게는 광야였습니다.
우리도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고 확신에 가득 찰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믿음이 막상 세상 속에 들어가서 여러 문제들 앞에 마주설 때마다 왜 그렇게 무력해지는지, 왜 그렇게 쉽게도 무너져 버리는지, 심지어는 믿음조차를 잃어버리는지.... 왜 그럴까요?
믿음은 단순한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입니다. 모든 믿음은 추상이 아니라 그 거친 광야에서 부딪치고, 견디고,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주 서야 하는 세상은 이렇게 유혹과 시험이 넘쳐나는 광야입니다. 믿음은 광야, 그 거친 벌판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크는 것입니다. 눈보라 비바람을 이겨낸 나무만 우람하게 장성하여 큰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충만해 졌지만 성령께서 광야로 내 모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광야에서 이기는 힘이 있어야 믿음입니다.
요셉과 같이 그렇게 애굽땅에 있을 때에 그곳에서 이겨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다윗과 같이 골리앗 앞에 설 수 있어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사도와 같이 약할 때에 강해지는 힘이 있어야 믿음입니다. 그 힘은 광야를 거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그러셔야 할 필요는 없으셨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생들이 겪어야 할 그 과정을 몸소 겪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어떤 일을 겪으셨습니까? 마가복음에서는 시험을 받으셨다고 간단히 나오지만 마태복음에는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❶ 떡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야 하는 저 광야에는 떡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떡은 돈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만나는 가장 큰 유혹, 가장 자주 만나는 유혹--그것은 물질의 유혹입니다.
❷ 영적인 시험이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성전의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서 네가 정말 하나님 아들이라면 그곳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와 함께 하신다면 터럭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자주 만나는 영적시험입니다. 생활 속에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마다 우리 속에 불끈 불끈 솟아나는 의심,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뜨거운 믿음과 열정어린 헌신으로 믿음생활 하다가 때때로 만나는 인생의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번째의 광야를 만나게 됩니다.
❸ 세상의 멋진 것들과 즐거운 것들, 대단한 것들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노라 유혹하였습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세속적 명예, 인기와 박수소리, 그 짜릿함,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립니다. 마치 에서가 눈 앞에 보이는 팥죽 한그릇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축복의 근원인 장자권을 팔아 버렸듯이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영혼을 팔아버립니다.
광야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광야에는 바로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영혼을 유혹합니다. 시험합니다. 하늘의 음성을 들은 예수님에게 사탄이 다가와 건드리며,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디 한번 해보라며 유혹했듯이 오늘 믿음의 사람들을 건드립니다. 시험합니다. 유혹합니다. 위협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넘어집니다. 바로 그곳이 광야입니다. 사탄이 유혹과 위협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광야에서 이겨야 이기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일어서야 진정한 믿음입니다. 광야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광야에서 이기셨습니다.
3. 복음을 전파하시다.
이런 모든 광야의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 곁에 항상 성령께서 함께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오심을 보셨고(10), 광야로 가실 때, 성령께서 그렇게 이끄셨고(12), 시험받으신 후에는 성령을 통해서 천사들에게 수종 받으셨습니다(13). 은혜가 충만할 때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광야 속에 있을 때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힘들고 지쳤을 때에도 성령께서 곁에 계셨습니다. 성령이 바로 그러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보혜사(保惠師),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σ), 힘주시고, 격려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그러하십니다. 성도들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형편 속에서도 성령께서 거기 함께 계십니다. 힘주시고, 격려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고자 기다리십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8:26
그렇습니다. 우리가 광야--그 거친 벌판에서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지쳐서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길에서나 광야에서나,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고 담대히 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만나는 삶의 현장, 그곳이 여러분에게 광야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에서, 기도 속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 그렇게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가운데 설지라도, 우리는 곧바로 광야로 나가게 됩니다. 사람들 한 가운데, 치열한 경쟁과 마주 서야하는 그 세상 한가운데, 불신앙적이 요소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그 삶의 현장,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유혹의 거리, 그곳이 바로 여러분들의 광야입니다. 때로는 물질적인 어려움이 광야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육신의 연약함이 광야노릇을 합니다. 때로는 직장과 나의 삶의 환경이 광야가 되기도 합니다. 그 광야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 광야에서 말씀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광야에서 예수님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광야에도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응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16:33
성령께서 어디서나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은혜의 손길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거친 광야를 지나서야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세상에서 거친 광야를 만날 때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나를 돕고 계신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늘 승리를 이루며 사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 / 조정헌 목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삶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 개의 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9절에서 11절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고, 12-13절은 광야에서 성령에 이끌리시어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 그리고 14-15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사건을 중심으로 보면 준비와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13절까지가 준비의 단계라고 한다면, 14-15절은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많이 준비하시고 시작하셨는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항상 준비하고 시작하는 것이 성도로서의 올바른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80년을 준비한 다음에 40년을 일했고, 예수님은 30년을 준비한 다음에 3년 동안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얼마나 준비를 많이 해야 하고, 훈련이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위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셨습니까? 훈련을 얼마나 받고 또 준비는 얼마나 하고 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십니까?
■ 한 남자가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는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 채 길을 헤매이고 있는데 얼마 후에 웬 넥타이 장사가 다가왔습니다. "선생님, 넥타이 하나 사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내가 목이 말라서 다 죽게 생겼는데 넥타이를 사서 무엇을 하란 말이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넥타이가 선생님에게 꼭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만 사십시오." "집어치우세요!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넥타이가 아니라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이 더 필요하단 말이요!" 그러자 그 넥타이 장사는 그 남자를 비웃으면서 “곧 후회하게 될겁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습니다. 그가 갈증을 참고 가다보니까 저녁쯤에 한 식당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급하게 달려가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이젠 살았다! 주인 제발 부탁인데 저에게 마실 물을 좀 주세요. 그리고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먹을 음식도 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종업원들에게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아니, 사람이 다 죽게 생겼는데 왜 이러십니까?" 그러자 종업원들이 식당의 문 밖에 세워져 있는 팻말을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정장 차림이 아닌 분은 입장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젊은 남자가 왜 굶어죽었습니까?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장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준비를 잘 하고 시작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복음을 철저하게 준비하신 예수님을 9절 말씀부터 살펴볼 수 있습니다. 9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사실 세례가 필요 없었습니다. 히 4:15에 보면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셨겠습니까?
1. 죄인인 우리와 똑같아져야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13 이하에 보면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도 하셔야 했지만, 그 전에 세례를 받는 것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세례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공포하신 것입니다.
세례는 출생신고와 똑같은 것입니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도 출생한 것이 사실이고, 출생신고를 늦게 해도 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으면 세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갈릴리 나사렛에서 조용히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니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메시아로서의 공생애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세례는 역사적인 계승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독자적으로 복음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서 지금까지 이루어 놓으신 사역을 계속 이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시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역사를 한 번 보십시오. 단절의 역사입니다. 끊어지고 깨지고 나누어지는 역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역사...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에 보시면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이 갈라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로 인해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신의 감정과 고집을 누르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자세로 나아가면 하늘이 갈라지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라고 하니까 걱정부터 합니다. 내가 굴복하면 온전히 헌신해야 되는데 ‘나를 힘든 곳으로 보내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곳으로, 내가 가야할 곳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또 보내실 뿐만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도 함께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능력을 덧입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는 순간까지 계속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의 역사가 떠나버립니다. 물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런 음성도 들려 왔습니다. 11절에 보시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가사에도 보시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음성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께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해도, 소외를 당하고 무시를 당해도 괜찮습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도 외롭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우리를 보배로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그런 나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꼭 가져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신앙의 자세를 가질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12-1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순전히 성령님의 뜻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에덴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사단에게 패하여 인류를 사단의 종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심으로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사명자로 살아갈 때에 반드시 시험이 찾아옵니다.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고, 참소하고, 대적하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에 ‘이렇게 더운 날씨에 예배를 꼭 드려야 하나? 세상을 즐기면서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나? 꼭 이렇게 답답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 다 사단이 가져다주는 생각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단은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왜 광야로 몰아내셨습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사역해야 하시기 때문에 광야에서 훈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훈련소가 편하고 좋은 곳에 있으면 훈련소라고 할 수 없습니다. 흔히 군대에 가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그 쪽을 쳐다도 안본다고 말을 합니다. 그만큼 고생을 해서 생각하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휘청거리면 되겠습니까? ‘어려움 뒤에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없고 시험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 신앙이 견고해질 수 있겠습니까? 흙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역경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 겨우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세워주고 이끌어주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까?
후자의 인생이 되려면 반드시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금 나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민이 있습니까? 괴로움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결코 우연은 없습니다.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이 없는 아들을 한 사람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싫어하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고난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이 능히 이기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본문 13절에 보시면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 옆에 무서운 들짐승들도 있었지만 수종을 드는 천사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시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옥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도단을 에워쌌는데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눈에는 군인들만 보였지만 영적인 눈이 열리니까 천군천사가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천사를 보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본문 14-1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고 하는 말은 고후 6:2의 말씀처럼 지금이 바로 우리가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가서 전해야 할 말이 무엇입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당신이 오늘 구원받지 못하면 정말로 후회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라고 전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삶을 살아갈 때 반드시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이 무엇입니까?
1. 성도의 삶이 회개와 세례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회개에서 출발을 합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은 무의미합니다. 회개가 없는 예배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해도 형제들과 풀지 못하고, 화목을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하나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죄의 문제부터 풀고 화해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 평생 동안 교회와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한 성도가 죽어서 천국 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그를 붙잡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곳을 통과하려면 약간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고 당신이 살아온 삶을 점수로 환산해서 1000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1000점이라구요? 별로 대단하지도 않군요.” “그러면 지금부터 점수에 보탬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보세요.” “예! 저는 30년 동안 선교기관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했지요?” “아, 그래요? 정말로 대단하군요. 당신의 점수는 1점입니다.” “1점밖에 안됩니까! 참으로 이상하군요...... 계속하겠습니다. 저는 충실한 가장이었습니다. 한 여인과 결혼해서 40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고, 아이들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다 목사, 교수 등 존경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늘 행복했습니다.” “정말로 당신은 훌륭합니다. 요즘에 당신 같은 사람이 드문데... 2점을 가산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겨우 2점이라구요? 정말로 모를 일이군요.” 그는 벌써 땀을 흘리면서 긴장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1000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점수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고 조바심이 난 그가 계속 말을 이어 갔습니다. “저는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에 참석했고, 주일에는 장년부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모든 면에서 훌륭하네요. 1점을 더 가산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습니다. “이제 겨우 4점이군요. 그런데 어떡하죠? 더 이상 점수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이 없는데... 주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못되나 봅니다. 이 어리석은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주실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바울이 “이제야 당신은 1000점을 얻었습니다. 들어가도 좋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기뻐하는 가운데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십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확신을 주십니다. 나를 기뻐하시는 증거도 주십니다. 이처럼 회개가 우리 성도들에게 선행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2. 성도들의 삶에도 시험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피해가도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시험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우리가 피해서 될 일이 아니고 극복해야 될 문제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만 탓하고 있다면 어떻게 시험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앞에서 넘어졌지만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아담을 이긴 마귀가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이 뭡니까?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능력으로 나를 사로잡아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3. 성도들의 삶은 반드시 복음전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선물로 보내주시고 그분을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몸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시려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땀과 눈물과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에게 무엇을 드리시겠습니까? 나는 그분에게 무엇을 드릴 것인가를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공산국가인 루마니아 지하교회의 범브란트 목사님의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고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고문으로 실신하여 찬물을 끼얹고 다시 깨우면 '내가 조금 전 어디까지 말했나요?' 하면서 오직 복음전파가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계속 부끄러운 삶을 사시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시험이 오더라도, 그 시험 때문에 넘어질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전파에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천사들이 우리에게 수종을 들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했는데도 어려움이 있다면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는 더 기도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오히려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례
마가복음 1:9-11 / 강성찬 목사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자기의 생일을 묻는 이에게 항상 자신에게는 두 가지 생일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생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고 거듭난 날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기념하는 신성한 의식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육체의 생일과 구별해 ‘영혼의 생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날이야말로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영혼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제2의 탄생일, 영혼의 생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신약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성스러운 예식에 참예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실천하였습니다.
세례( baptivzw 밥티조)는 원칙적으로는 "잠기다"(왕하 5:14, 시 67:23),구체적으로는 "물로 씻는다"로 신약에서 자주 사용되었고(막 7:4, 눅 11:38, 딛 3:5) 또한 일반적으로는 " 뿌린다, 부어준다"란 뜻으로도 번역되었으며 비유적으로는 "거리에 백성이 쇄도하다", "전신에 충만하다"(마 3:11)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칼빈은 이러한 세례의 의미를 "세례란 교회라는 공동체에로의 입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하며,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즉 세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신앙의 성장이며,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고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내적 신앙의 외적인 고백이며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자기의 백성 됨을 인 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를 받으셨고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한 준비의 한 과정에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을 통하여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분이 메시아임을 알고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 3:15).
이러한 요한의 세례는 그의 청중들에게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세례 받는 자는 세례의식을 통해서 회개를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가와 누가에 의해 묘사되어 있으며 또 마가와 마태는 요단에서 세례 받은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세례 요한의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라는 선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선포가 뜻하는 최상의 의미는 세례에 대한 그 결심의 실행이 회개를 구현하며, 완전히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마가와 누가가 사용하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보다 상세한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오실 자의 결정적인 사역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론 세례를 주었으나 에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성령과 불로 베푸는 세례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세례가 암시하는 것은 완고한 자를 멸망시키고, 참회하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정화의 행위, 또는 그 과정입니다.
'세례를 베풀다'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은유인데, 특별히 그 말은 강에서의 세례의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강과 큰물은 구약에서 재난에 의해 압도될 때 사용하는 은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분명히 세례 요한이 오실 자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은유를 사용한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세례를 그 사역의 결과를 상징하고 또 그 사역을 준비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는 신약의 성도가 구원받은 표지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3:21)고 합니다.
구원받은 증거로써 외적인 물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도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 외적 의식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세례는 본질적으로 은혜 언약의 예식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눈에 보이는 행위로 표시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세례는 영적 진리와 신앙고백의 사실인 외적 형식이 결합하여 일치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받는 자체가 어떤 실효를 갖는다기보다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악을 속죄하고 그리스도에게 결합하는 표징과 인침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자체가 중생이나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수량이나 적용하는 방식이나 관리권이 그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어도 온몸이 깨끗하다고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에 적합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10)라 합니다.
세례의 효력에 관하여는 세례 자체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거나, 그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은 그것이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고 세례를 받아도 구원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구원에 있어서 세례의 절대적 필요성을 가르치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세례는 필요한 것이며,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주께서 친히 제정하셨고, 하늘로부터 지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간과하는 것은 불순종이며 불순종은 곧 죄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세례나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나 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이므로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세례란 그리스도로 인치는 표(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세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인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속하여 그리스도께 붙은 자가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목적으로 세례를 주도록 원하셨음이 틀림없었습니다.(행2:38, 41, 8:12, 38,9:18)
고전10:2절에 모세에게 속하여라는 말씀은 그들이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여 그를 신뢰하며, 그의 인도를 받을 것을 다짐함을 의미합니다. 마 28:19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심은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제자가 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로 삼은 후 혹은 제자 됨과 동시에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 4:1에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은 이를 잘 뒷받침해 줍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와 십자가는 죽음과 동일 시 했음이 분명합니다. 세례의 본질이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되어 표현의 일치성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을 합당하게 여기신 것은 고난의 종으로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심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이라 합니다. 하지만 복음 전파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은 것은 1898년이 되어서였습니다. 복음 전파의 문은 서서히 열렸습니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움트기 시작한 호기심은 법으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도사라고 알려진 노춘경(盧春京)이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우연히 한문으로 된 기독교 배척문서를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합니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접근하여 기독교를 알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주저하였다고 합니다. 노춘경은 포기하지 않고 선교사 앨런의 집에 가서 그의 책상위에 놓여 있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가 열심히 읽었다고 합니다. 노춘경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선교사들의 주일예배에도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언더우드에게 세례문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언더우드는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법이 아직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한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서면 안된다는 것을 주지시켰다고 합니다. 노춘경은 자신의 결심은 분명하며 최악의 경우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은 이 세례문제에 민감했다고 합니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느낌을 1886년 7월24일자 일기에 “우리로서는 그 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확신한다.”라고 적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논의와 기도 과정을 거쳐서 1886년 7월 18일 주일에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노춘경은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 땅에서 한국인에게 준 최초의 세례라 합니다. 그리고 그 세례는 목숨을 건 세례였다고 합니다.
세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칭의는 죄 사함을 받은 것과 직결됩니다. 예수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고 합니다. 베드로가 죄 사함 받을 것을 설교한 것(행 2:38)은 참으로 믿고, 주의 죽으심과 함께 세례를 받으면 그와 함께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성결케 합니다. 세례는 단순히 법정적, 객관적 칭의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적 성결에 이른 것을 인친 것이므로, 반드시 이에 이르도록 각자가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고, 심지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선언합니다. 성결은 물로 씻듯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물세례가 성령 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봅니다.
고넬료는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었고(행 10:15), 복음을 믿음으로써 그 마음이 깨끗함을 입었지만, 그 증표와 기념으로 물로 세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베드로는 노아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세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3:20-21)고 했습니다.
홍수는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었지만 새로운 생명으로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표이며 하나님 편에서는 자기의 백성이라는 인침이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세례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1-5)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아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인도를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음은 세상에서 나와 구원받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세례와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2)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강력한 회개의 명령이 전제되어 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길을 예비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는 성령과 불 즉 구원하실 생명과 죄에 대한 심판의 능력이 담겨진 세례를 베푸실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런던 회중 감리교 선교부 목사로 크게 이름을 날린 윌리 랙스가 어려서 세례를 받을 때의 일이라 합니다. 목사는 어린 랙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아이를 안고 있던 어머니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음을 보았다합니다. 세례식이 끝난 후 목사가 그 어머니를 불렀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들 이름을 부를 때, 당신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합니다. "네, 저는 그때 이 아이가 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아이는 후일에 그 어머니의 기도대로 살았고, 런던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의 사람들에게 주님과 교회를 위한 전도 열심을 보여줌으로 그의 이름을 떨쳤다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세례의 행위는 하늘나라 건설에 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고 했습니다.
세례 받는 것과 제자를 삼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세례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옛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태어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6:3-7)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증서는 나의 옛사람의 부고장이며 새로운 세계의 시민등록증과 같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혼증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닦아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하늘의 문이 열려서 하늘이 우리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행2:37-39).
그러므로 세례는 위대한 대관식의 자리입니다. 옛날 헷 족속은 왕의 대관식을 성대하게 가졌습니다. 부왕이 아들에게 왕관을 물려줄 때 찬란한 금관을 손수 아들에게 씌워주고 주위에 모여 있는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을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는 부왕 되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들 한 심령 한 심령에게 하늘의 상속자로 선언을 해주시는 행위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세례는 성도가 받을 위대한 축복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도 이 놀라운 축복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를 받으실 분들은 세례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경건 된 마음으로 이 복에 이르도록 힘쓰며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