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102]'숨은 별의 성녀聖女' 정난주 마리아
열흘 전쯤 2년여만에 제주도를 찾았습니다. 한참 걷다가 멈춘 올레길 중 ‘추자도 올레길’을 걷고 싶었는데, 미리 배편을 예약해야 하고, 바람이 거세어 그만두는 대신에 대정에 있는‘정난주 마리아 묘소’와 김대건 신부의 ‘표착기념관’을 처음 찾았습니다. ‘정난주성당’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추자도에는 1801년 신유박해때 천주교인 정난주가 제주도 관비官婢로 가면서 갯바위에 떨어뜨렸던 두 살짜리 아들(황경한)의 묘가 있다해 가보고 싶었거든요.
정난주 마리아 님을 아시지요?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서 잘 알지는 못한다해도 들어는 보셨겠지요? 저는 몇 년 전 제주 4·3평화문학상(6회)을 수상한 『난주』(김소윤 장편소설, 2023년 은행나무 펴냄, 342쪽)를 읽으며, 그 비극적인 휴먼 스토리를 알게 돼, 관심이 컸습니다. 정난주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능지처참된 순교자 황사영의 아내이자, 다산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이었습니다. 다산 집안은 남인 명문가였으나, 정조임금 사후 천주교 탄압으로 집안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지요. 중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자산어보>를 남겼으며, 자신은 강진에서 18년이 넘는 귀양생활을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기르고 방대한 실학저술을 남긴 큰 학자(Great Scholar)였지요.
한 달 전쯤 서울 인사동 어느 서예학원 회원전에서 우연히 한문학자로 고명한 정민 교수가 1만3천자가 넘는 ‘황사영백서’를 그대로 옮겨 쓴 작품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정 교수는 무슨 정성으로 그 백서를 옮겨 적었을까, 생각하면서 처음으로 전문을 읽어봤습니다. 물론 모두 한자입니다. 시대상황이 지금과 다르다해도 중국(청)을 바라보는 시각 등이 못마땅한 부분도 많더군요. 물론 종교적으로 탄압당하는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을 빌고자 하는 등 진정성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한 문건이지요. 아무튼, 남편은 순교를 당하고, 양가 집안은 박살난 채, 자신은 두 살 아들과 먼 제주의 관비가 되어 떠나는 한 여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들만이라도 꼭 살아남으라는 비원悲願으로 갯바위에 몰래 떨치고 갔겠지요. 훗날 그 아들을 어느 오씨가 발견해 키우고 있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려겠지요. 이 가련한 모자母子의 이야기가 그저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업동이 오씨에서 졸지에 황씨가 된 아들의 사연으로 추자도에서는 지금도 오씨와 황씨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정난주 마리아 님은 천대받는 관비이면서도, 숨지기 전까지(1838년) 주위 사람들로부터 ‘서울할망(할머니)’이라며 존경을 받았답니다. 양반집 배운 따님답게 배움과 품격이 있어서였겠지요. 돈독한 신앙생활로 주위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감동하게 했겠지요. ‘표착기념관’에는 난주가 숨지자 추자도 아들에게 알리는 부고편지가 전시돼 있어 뭉클하더군요. 어머니와 아들의 주고받은 편지가 보관돼 내려오다 4·3항쟁 와중에서 소실됐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모두가 참 가슴 아픈 얘기들뿐입니다. 제주는 슬픔의 땅, 비극의 섬입니다. 그 아픔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이 많습니다. 김석범의 <화산도>를 비롯하여 현기영의 <순이삼촌>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김소윤의 <난주>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작가는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삶 하나하나가 곧 조선朝鮮이고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느꼈다고 말합니다. 악함과 선함이 공존하고, 고귀함과 비열함이 함께하며, 때론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가 되기도 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 혼란한 세계 속에서도 어떤 선한 결과(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향상시킬 만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난주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과 양심에 있어 남들보다 조금 더 집요하게 다가섰고,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있던 자리를 결코 망각하지 않은 여인이었던 것같다고 말입니다.
기초사실을 바탕으로 꾸며 내려간 소설이긴 하지만, 특정 종교를 떠나 ‘난주’라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일생을 알게 되면서 오늘날의 우리가 배울 것은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야 재가불자인데도 한 여인의 삶을 소설로 읽었으므로 그의 묘소 앞에서 묵념하면서 천주님의 가호가 영원히 함께하기를 빌었습니다. 제주를 찾으셨으면 한번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자 25세에 순교한 김대건(1821-1846) 신부의 발자취나 이해인 수녀가 “희망과 절제를 극기로 신앙을 증거한 숨은 별의 성녀聖女”라고 정의한 정난주 마리아 님의 묘소와 성당을 다녀오셔도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