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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이미지는 자유이자, 실재다
가상과 실재의 이분법을 넘어서
현실을 넘는 이미지의 힘을 포착하다
이솔, 이미지로 둘러싸인 낯설고 새로운 세계 살펴
('이미지란 무엇인가', 아솔 지음, 민음사, 2023년 11월)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다. 이미지가 우리를 울고 웃게 하고, 이미지가 우리의 집중력을 앗아간다. 이미지의 막대한 영향력을 두려워하며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진짜 현실을 보라는 잔소리도 가득하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에서 동영상 플랫폼까지 우리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야말로 이제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서강대 철학과에서 이미지 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22년 서산 신진철학연구자상을 수상한 이솔은 민음사의 인문 시리즈 ‘탐구’의 일곱째 책으로 낸 저서 『이미지란 무엇인가』(민음사)에서 이미지를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정교하게 파고든다. 이미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힘과 가능성을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에게 세 편의 ‘동굴의 우화’가 던지는 질문이 있다. 동굴 속에 사람들이 묶여 있다. 그들은 동굴 벽만 바라볼 수 있다. 빈 벽에는 사물의 그림자만 비치지만, 죄수들은 이것이 실재라고 믿으며 일평생을 살아간다. 플라톤은 이 동굴의 우화를 통해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일까?’라는 불안을 드러낸다.
또한 들뢰즈는 “각각의 동굴 뒤에는 열려 있는 그리고 보다 깊은 다른 동굴이, 각각의 표면 아래에는 보다 넓고 낯설고 풍부한 지하 세계가, 그리고 모든 밑바닥, 모든 정초 아래에는 훨씬 깊은 지하 세계가 존재한다”라면서 동굴 뒤에 더 깊은 동굴이 있다고 말한다. ‘낯설고 풍부한 지하 세계’라는 이미지는 단 하나의 원본을 상정한 플라톤을 부드럽고 강력하게 반박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있다. 동굴 같은 방에서, 자야 할 때를 넘긴 늦은 밤에 나는 깨어 있다. 스마트폰을 붙잡고 이 영상에서 저 영상으로 계속해서 넘어간다. 쏟아지는 이미지들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동시에 지긋지긋하다는 감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 책 『이미지란 무엇인가』가 그리는 지금의 상황이다.
이 책은 서양 형이상학이 견지해 온 이미지 관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이래 데카르트와 흄의 철학은 세계에 대한 경험이 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나’의 의식에 주어지는 표상 즉 이미지를 실재와 분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나에게 주어진 것 너머의 실재가 있다는 환상을 낳거나 나의 세계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유아론을 예비한다.
현대 철학을 열어젖힌 사르트르와 들뢰즈는 이미지를 해방시킨다.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인 상상력을 중시한 사르트르에게 이미지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한편 영화의 역량을 포착한 들뢰즈에게 이미지는 무언가의 모방이 아니라 ‘실재를 구성하는 블록’이다. 두 철학자에게는 실재를 자아의 밖에서 파악하려는 의지가 있다. 이미지란 낯설고 새로운 세계, 타인의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저자 이솔은 말한다. “나는 이미지에 관한 5년간의 탐구를 마친 연구자이자 스마트폰 중독자로서 이 책을 썼다.” 2000여 년 전 철학과 디지털 예술작품, 인스타그램의 ‘좋아요’를 넘나드는 저자는 낡은 생각에 대해서는 단호해지고, 복잡한 현실 앞에서는 솔직해진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사고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불면의 밤에서 탈출할 길을 찾는 ‘이미지 탐구’는 한 줄기 바람처럼 독자의 생각을 신선하게 한다.
이솔은 서강대 철학과에서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이미지 이론을 분석한 「이미지란 무엇인가」로 석사 학위,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이미지 이론을 비교 분석한 「이미지에 관하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르트르의 최초 철학서인 『자아의 초월성』(공역)을 번역하고 『사르트르의 미학』(공저)을 출간했다. 현재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며 가톨릭대, 서강대, 성신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사르트르와 유아론(solipsisme)의 문제」, 「사르트르와 들뢰즈에서 잠재성의 문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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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데카르트, 플라톤, 흡, 사르트르, 뒬레즈까지 철학자들의 사상을 정반합 관계로 비판하고 따라가며 계속 질 문을 던집니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는 전통 서양철학에서 이미지에 대한 인식 방식을 비판하며 현재 이미지를 대하는 관점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상이나 미디어가 없는 과거 서양 철학자들에게 이미지는 눈으로 보고 지각하는 사물이었으며, 그들은 머릿속의 이미지와 실제의 그것이 같은지 아니면 내 눈에 비친 표상일 뿐인지 끊임없이 질문 을 던졌습니다. 그럼 이제 그들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데카르트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는 참된 앎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으로 성찰한다.
지각하는 것은 실제가 아닌 이미지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그는 자신이 보는 것이 실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거짓일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고 단 하나의 확신을 발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 내가 속는다고 해도 속임을 당하는 나의 존재는 확실한 것이 아닌가?" 데카르트가 발견한 최초의 인식인 바로 cogito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데카르트에게 경험이 가상이고 오류라 생각했던 반면 흄은 경험 대한 관찰을 통해 탐구했다 사유끝에 그는 인간은 지각들의 다발 또는 집합일 뿐이며 정신은 일종의 극장이라 말하며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거부했다. 그는 경험에 의해 상상력이 나오며 그로부터 다양한 이미지를 연합해 관념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두 철학자 모두 상상과 기억,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고대 그리스때부터 내려오는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미지는 원본보다 격이 떨어지는 모방의 모방이다. 플라톤의 세계는 영원불변한 진리이자 진정한 실재인 이데아와 감각에 의해 알수 있는 대상(이데아의 모사)이 있고 이미지는 그를 모방한 것이므로 실재의 모방의 모방으로 본 것이다.
플라톤의 이 우화를 보자
이 기묘한 이야기는 동굴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곳에는 일평생을 동굴의 빈 벽만을 바라보도록 사지가 구속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벽 위로 비치는 그림자들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들이 볼 수 없는 등 뒤에는 불꽃이 있다. 불꽃 앞으로 사물들이 지나가며, 바로 이 사물들에 의해 그림자가 만들어진다.
그러한 사실을 알리없는 사람들은 사물들이 아닌 그림자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실제라 믿는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이 동굴에서 해방된다.
그에게 이미지는 실재를 부정하는 의식의 역량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의식은 활동이며 우리가 상상을 중단하는 순간 그 대상은 사라진다. 이것이 단순한 지각과 상상의 차이다.
기존 사상이 이미지를 단순히 지각의 대상으로 타성을 부여했다면 그는 상상이라는 자발적 활동으로 이를 설명한다. 더 나아가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을 상상력으로 규정한다.
사르트르에게 플라톤의 동굴 속 인간은 자신을 꼼짝없이 구속하는 상황에서도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다못해 그들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자유롭게 동굴을 벗어날 상상을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더 나가서 베르그손의 운동-이미지를 토대로 기존의 고정적이고 고체적인 관점을 벗어나 이미지가 운동 변화의 한 국면이라는 점을 보인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 순간 이미지는 한 시점으로 굳어지는데, 그는 운동과 시간 개념으로 이를 새롭게 관철한다.
결론적으로 들뢰즈에게 모사본은 또 다른 원형이며 플라톤의 동굴은 더 깊고 낯설고 풍부한 지하세계가 펼쳐진다
그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세계와 마주할 때 경험하는 것을 이미지라 이름붙인다.
특이한 부분인데 그는 영화에서 이러한 지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공간 특정 지점에서 대상을 지각하려는 자연적 지각의 한계를 벗어나 중심과 고정점을 갖지 않는 특징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탈중심화된 물적 상태에서 중심화된 지각으로 이행하는 대신 영화는 탈중심화된 물적 상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상태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p196
과거 철학자들이 바라보는 지각의 기준과 달리 기술발전으로 자연적 지각의 조건을 초월하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우리의 내면은 떠오르고 사라지는 수많은 감정들이 있다. 빠르게 흐르고 사라지는 이 사유와 상상들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이를 명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미지를 읽는 것을 멈추고 이미지를 이미지로 바라볼 때 단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낯선 것, 타자가 출현한다.
새롭고 낯선 타자와 대면할 때 우리의 세계는 확장된다. 이미지 탐구의 종착점은 일반적 지각을 구성하는 클리셰를 깨트리고 실재의 새로운 국면과 마주하는 것이다.
온라인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낯선 타자의 기록과 흔적이다. 그러나 기술발전으로 취향에 따라 무리를 이루고, 유형화된 알고리즘에 의해 필요한 것만을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타자를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야한다
이미지란 무엇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이미지 속에 살고, 소비하며 살아간다는건 분명한 사실이며 벗어날 수는 없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로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