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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 섬 전투 또는 이오지마 전투(영어: Battle of Iwo Jima, 일본어: 硫黄島の戦い, 1945년 2월 16일~1945년 3월 26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오가사와라 제도의 이오 섬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를 말한다. 미군의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작전(Operation Detachment)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1일에 일본 제국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옥쇄'(玉砕)했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돌격을 했으나 전멸했다. 이것으로 인해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되었다. 2만 933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2만 129명이 전사했다. 피해율은 96%였다.
한편,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은 수백 개의 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미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피해를 넘어선 전투이다(단, 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의 합계). 다만 피해율은 약 40%이다
◆ 이오지마섬 위치
이오지마는 일본 도쿄 남쪽의 1,080킬로미터에, 괌 북쪽 1,13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이오지마는 오가사와라 열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0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어 유황도(硫黄島 -이오지마)라 불렸다.
◆ 태평양 전쟁 당시 미 해병대와 일본군 사이에 격렬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산
유황도의 토양은 화산재라 보수성이 없었고 식수나 용수는 짠 우물물이나 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전에는 유황의 채굴이나 사탕수수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941년 개전 당시, 해군 전투대 약 1,200명과 육군 병력 3,700명 내지 3,800명을 인근 지치지마 섬에 배치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이오지마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개전 후에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병 1,500명과 항공기 20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1944년 2월, 미군은 마셜 제도를 점령하면서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 대본영은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으로 지정해 사수를 결정한다.
방위선 수비 병력으로서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가 지휘하는 제31군이 편성되었다. 그 밑에 오가사와라 지구 집단 사령관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이 취임했다.
이오지마에는 3월부터 시작해 4월까지 증원부대가 도착해 총병력은 5,000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1944년 여름,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해 점령했으며, 마리아나 제도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같은해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의 각지를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거리가 상당했으며 일본군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이오지마에서 미군 폭격기 무리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기 때문에 B-29 폭격기들과는 달리 먼 거리를 비행하지 못하는 호위 전투기들이 곧바로 비행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호위 전투기들을 잃은 B-29 폭격기들이 일본군의 요격을 받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일본군은 이오지마를 근거지로 하여 가까운 마리아나 제도로 내려가 미군의 비행장을 자주 공격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12월에만 11기의 B-29를 파괴시켰다. 그에 따라 미군 태평양 통합작전본주는 이오지마를 점령하고 일본군의 항공기지를 파괴한 뒤 미군의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오지마 공격을 결정하게 된다.
◆ 1945년 2월 19일 이오지마 해변에 상륙하여 전진하는 미 해병대
LCVP 나 차량상륙정(LCM)같은 소형 상륙주정들이 보급품을 해안에 싣고오면 해안부대가 일본군의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양륙하여 여기저기 쌓아놓았다.
그러면 상륙장갑차나 족제비가 이 보급품들을 일선에 전달한 후 부상자를 싣고 해안으로 돌아왔다.
보급품을 양륙한 LCVP 나 차량상륙정들은 부상자를 싣고 병원선으로 개조한 전차상륙함이나 병원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상륙해안의 혼잡과 일본군의 방해로 많은 부상자들이 밤새 후송되지 못하고 해안에 남겨졌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아침이 되기 전에 치료 지연이나 일본군의 포탄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다.
불도저들은 밤새도록 화산재에 빠진 차량이나 장비들을 끌어내어 필요한 장소로 끌고 갔으며 화산재 언덕에 전차가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뚫었다.
공병들은 밤새 지뢰 제거 작업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방해와 적절한 장비의 부족 때문에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 타다미치 구리바야시 (栗林 忠道) 중장
1944년 6월까지 타다미치 구리바야시(Tadamichi Kuribayashi) 중장은 이오지마 주둔군을 지휘하였다. 펠레리우 전투(Battle of Peleliu)때의 방어전략에 영감을 얻은 구리바야시는 일본군의 기존의 원칙을 뒤집는 방어 전략을 고안하였다.
상륙군에 맞서서 해변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하는 기존교범 대신 구리바야시는 중화기를 중심으로 깊숙이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남작 다케이치 니시(Takeichi Nishi) 대령의 전차대를 위장포대로 활용하였다.주력군까지 연계되는 터널 구축을 완성하지 못한 구리바야시는 수리바치 산 주변의 주둔군에게 독립성을 부여하고 북부 주력 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토치카와 벙커에는 터널을 연결하여 미군에 의해 주둔 병력이 전멸하는 경우 터널을 통해 곧바로 일본군이 재점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섬 전체에 지뢰가 매설되었으며 숨겨진 포대와 박격포 진지가 구축되었다.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타다미치 구리바야시역의 와타나베 켄
일본군의 무기 중에는 수도꼭지 박격포라는 의미의 스피갓 모타(Spigot Mortar)라는 것이 있었는데, 빈 튜브를 통해 상당한 로켓이 발사되는 것이었다. 구리바야시는 저격수들의 배치도 잊지 않았으며, 방어 위치를 설계하여 섬 전역에 타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는 미국 함대에 대항하기 위한 카미카제(kamikaze) 자살공격 조종사들을 지원받았는데, 이들은 훗날 미국의 함대에 돌진하여 미군 3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본국은 구리바야시에게 해변 방어 거점도 구축하도록 압력을 넣었는데, 이때 해변가에 구축된 방어진지들은 미군의 상륙 전 폭격에 파괴된 유일한 방어진지가 되었다.
구리바야시는 일본이 승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목표는 오로지 미군 사상자들을 많이 발생시켜 미국이 일본 본토 침공을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 이오지마 해변의 미군 해병 제6사단장 레뮤얼 셰퍼드(Lemuel Shepherd)소장
미군의 공격 계획은 직접적이었다.제4, 제5 해병 사단이 남동부 해안에 상륙하여 수리바치 산과 남부 비행장, 서안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임무를 완수하면 제3 해병 사단이 추가 투입되어 북동부로 진군할 것이었다. 침공에 앞서서 마리아나를 출발한 B-24 리버레이터(Liberator) 폭격기들이 이오지마를 74일간 타격하였지만 정보부 조사 결과 일본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방어는 더욱 견고해져갔다.
공군의 노력과 달리 미 해군은 단지 3일간의 포격만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해병대가 요구한 10일에 한참 못미치는 것이었다. 해군은 오키나와 공격을 위해 포탄을 아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해병대는 해군이 태스크 포스 58(Task Force 58)을 보내 일본 본토 폭격에 대한 일본군의 관심을 돌리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며 비난하였다.
◆ 이오지마 상륙전 함선에서 쌍안경으로 해안을 살펴보는 미 해병대 장교
◆ 1945년 2월 20일 수리바치산 밑의 일본군 거점에 폭격을 가하는 미 해군의 TBM 어벤져 뇌격기와 미 해병대의 37mm 대전차포
◆ 일본군의 거점에 다연발 로켓탄 공격을 가하는 미 해병대
호위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의 공중지원도 이루어졌다.
제15 전투기 그룹 소속 머스탱 전투기들은 3월 6일 이오지마에 도착하였다. 함포로 쏘아 올리던 조명탄도 육상 포병에게 인계되었으며, 미군 통신대 소속 나바호(Navajo) 부족 암호병들도 휴대용 통신기와 SCR-610 배낭식 무선세트를 가지고 전투에 동참하였다.
◆ B-29 슈퍼포트레스 폭격기
B-29 폭격기들도 일본본토 폭격으로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1945년 1월 24일과 29일에 이오지마를 폭격하여 합계 282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오지마 침공이 3주일 앞으로 다가온 1945년 1월31일부터 이오지마에 대한 모든 폭격작전은 이오지마 항공지원 계획에 의거하여 더욱 대규모로 실시되었다.
이 B-29 폭격기들은 정확한 폭격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저공폭격을 감행했다. 이오지마는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사전폭격을 얻어맞은 섬일 것이다.
1944년 12월 8일부터 1945년 2월 16일까지 74일간 이오지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폭격을 받았으며 이 기간 중 투하된 폭탄은 6,000 톤이 넘었다.
◆ B-24 리버레이터 중폭격기
2월에 들어서자 제7육군항공대는 매일 30대 - 35대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들을 출격시켜 이오지마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
1945년 2월 1일부터 16일까지 B-24 폭격기들은 이오지마에 주간 폭격으로 폭탄 602톤과 네이팜탄 1,111발, 야 간폭격으로 504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2월 12일에는 제313폭격비행단 소속의 B-29 폭격기 21대가 수리바치 산의 포대와 이오지마의 대공포 진지, 통신 및 레이더 시설 등을 노리고 84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 이오지마를 폭격하는 B-24 폭격기
침공에 앞서서 마리아나를 출발한 B-24 리버레이터(Liberator) 폭격기들이 이오지마를 74일간 타격하였지만 정보부 조사 결과 일본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방어는 더욱 견고해져갔다.
◆ 일본군의 거점에 로켓탄을 발사하는 미 해병대의 콜세어 전투기
이렇게 압도적인 물량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폭격은 이오지마의 방어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미군의 사전폭격은 이오지마의 항공력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비록 이오지마의 활주로는 폭격을 받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복구하고야마는 일본군의 집념 때문에 전반적으로 사용가능상태를 유지했으나 1945년 들어서면서는 일본군이 이오지마에서 항공력을 운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 수리바치 산을 포격하는 M1 81mm 박격포
미 해군은 단지 3일간의 포격만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해병대가 요구한 10일에 한참 못미치는 것이었다.
해군은 오키나와 공격을 위해 포탄을 아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해병대는 해군이 태스크 포스 58(Task Force 58)을 보내 일본 본토 폭격에 대한 일본군의 관심을 돌리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며 비난하였다.
◆ BB-58 인디애나
이오지마 포격에 참가한 것은 태스크 포스 54 소속 함선들 뿐이었는데, 6척의 전함 R11 아칸사스(Arkansas), 뉴욕(New York), 텍사스(Texas), 네바다(Nevada), 아이다호(Idaho), 테네시(Tennessee) R11과 5척의 순양함 R11 펜사콜라(Pensacola), 솔트레이크 시티(Salt Lake City), 체스터(Chester), 투스카루사(Tuscaloosa), 빅스버그(Vicksburg) R11 그리고 구축함들 뿐이었다.
◆ 1945년 3월 일본군이 은신한 바위 동굴에 화염방사기 공격을 가하는 M4 미군 셔먼 전차
일반 총기나 화포로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미군은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으로 터널 안의 일본군들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의 기술적 혁신중 하나는 해군의 마크 1(Mark I)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8대의 셔먼(Sherman) M4A3R3 중전차였다.
론슨(Ronson) 또는 지포(Zippo) 전차로고 불린 이 전차들은 일본군 진지 타격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셔먼 전차는 저지하기에도 만만치 않았으며, 전차를 향해 돌격하던 일본군 병사들은 수적으로 우월한 해병대 전력에 희생되었다.
식수와 식량, 물자가 떨어진 일본군은 점차 밀리기 시작하였고 전투에는 끝이 다가왔다.
초기에 만세 돌격을 금지하던 구리바야시는 패배가 분명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를 허용하였고, 미군은 뒤늦게 야간 만세 돌격에 시달려야 했지만 기관총과 포병 지원으로 이를 막아냈으며 때로는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상륙지점의 안전이 확보되자 섬 북부를 점거하고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한 병력과 중화기 지원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일본군 병사들은 싸우다 죽는 쪽을 택했다.
◆ 미군의 거점 주변에 작열한 일본군의 포화
◆ 미 해병 대원의 톰슨 기관총 사격
◆ 해안에 상륙하여 이오지마의 내륙으로 전진하는 미 해병대의 앨리게이터 LVT 수륙양용 단정
◆ 미군 M4 셔먼 전차의 측면에 덧댄 방어용 목판에 난 피탄 자국
◆ 지뢰 제거 작업중인 지뢰제거 전차
철이 함유된 화산재로 이루어진 이오지마 섬에 일본군은 많은 지뢰를 숨겼으며 지뢰탐지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 움푹 파인 화산재 지형에서 지뢰제거 전차의 효용성이 떨어지고 미군의 피해가 늘어나자 공병들이 막대기등을 이용해 지뢰를 찾아 제거해야만 했다.
◆ 이오지마에 투입된 미 해병대 수색견 부대 K9
이들의 주요 임무는 일본군 저격병의 탐지와 척후에 의한 적의 소재를 재빨리 파악하여 신속한 정보 전달에 있었다.
◆ 1945년 2월 23일 35일간의 격전 끝에 이오지마를 점령하여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미군 해병대원들
왼쪽부터 아이라 헤이즈, 프랭클린 사우슬리, 존 브래들리, 할론 블럭, 뒤에 잘 보이지 않는 두명은 마이클 스트랭크, 랜 가뇽. 이후 마이클 스트랭크, 프랭클린 사우슬리, 할론 블럭은 이오지마 전투 중 전사한다.
미 해병대가 수리바치산 정상에 꽂아 세웠던 성조기 깃발은 원래는 더 작은 깃발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성조기를 좀 더 멋있게 찍기 위하여 두번째로 찍은 사진으로서 더 큰 깃발을 세우는 장면이다.
맨 처음 새워진 깃발은 전투가 계속되다가 급하게 올리느라 좀 작은 깃발을 사용했다.
◆ 태평양 전쟁 당시 이오지마의 미국 AP통신 종군기자 존 로젠탈
해병대 대대장은 그 깃발을 대대 금고에 반납, 대대 소유물로 보관하고 "대신 더 큰 깃발을 달자!"라고 해서 두 번째로 깃발을 세우다가 사진이 촬영된 것이다.
조 로젠탈이 이 사진을 찍어 퓰리처 상을 받았다.
이 사진은 본국에 보내지자마자 잔악한 일본군에 미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상징이 되었다.
정치적 쇼맨십에 능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이 병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여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한 국채 판매의 광고맨으로 활용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송환 명령이 내려지기 전 3명이 전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해병대원들만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 수리바치산 아래에 묻힌 이오지마에서 숨진 미 해병대 희생자들
해병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제5수륙양용군단은 1945년 2월 19일 하루동안 전사 및 실종 566명과 부상자 1755명, 전투피로증 환자 99명을 포함하여 합계 2,42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해병대는 원래 상륙 당일의 사상자 수를 침공부대 전체의 5% 인 3,050명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해병대의 예상보다는 적다고 할 수 있겠으나, 실제로 상륙한 인원인 30,000 명에 대비해보면 사상자 비율은 8% 에 달했으며, 사상자 중 전사자 비율도 20% 를 넘었다.
2,400 명을 넘는 사상자는 상륙 당일의 사상자로는 타라와 전투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어 태평양전쟁에서 최악의 기록이었다. 극심한 해병대의 병력손실을 보충할 예비대인 해병제3사단의 주력을 태운 수송함대가 2월 19일 밤늦게 이오지마에서 남동쪽으로 130km 떨어진 대기해역에 도착했다
첫댓글 이오지마에도 조선징용자들의 피맺힌 한이 서려잇어요
미해병대 사령부에서 공식적으로 유황도점령을 선언하고 살아남은자들을 파악해보니 조선징용자들이 3백명가량 잇엇다고 문서화 되잇는데
(이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 나와잇어요)
증언에 따르면 약 천명정도가 끌려왓다고..
그 천명이 이오지마 화산섬에 지하갱도를 약 25km 파내엇고 수치상으로 2만명이 거주할수 잇엇다 하네요
아시아 전체가 조선인들 뼈와 한이 서려잇을듯
아하!!
그렇군요
ㅠ.ㅠ.....
TV.에 자주나오던데 전 자세히보지안왔어요.ㅎㅎ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을 같이 봐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