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교촌과 문흥리.원당리 자료
김하락 의병장의 아들과 딸에 대한 자료
김하락 의병장의 아들(김병우)과 딸(김영규)의 후손을 찾습니다.국가가 안해도 나는 한다~!
010-2799-5670
의성 문흥리 김하락 의병장의 동생 김응락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김응락은 서울까지 가서 죽었다.옥사?
의성인 김선생은 교촌(다릿골)은 김하락선생이 살던 곳으로 알고 계시다.
김영규(딸)가 남장男裝을 해서 영덕 강구(영덕 남천쑤 전투에서 김하락 의병장은 총상을 입고 순국)로 가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서 시신을 운구해왔고 청로리에 와서 하룻밤을 잤다.그후 외가인 서산(서천?부인은 덕수이씨-김하락 진중일기)에 장례를 치렀다.그것을 추적해서 현충원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김하락 장군은 의성 옥산에 황학산에 가서 공부를 했다(부친의 말씀).김하락과 조성학 선생은 학자였다고 한다.조성학 장군은 팔공산에서 공부를 했는데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한 것 같다.병법과 신수,점괘를 공부하였다고 한다(추측).그래서 전투를 하다가도 중간에 팔공산을 다녀온 기록이있다.
부친의 휘가 김선우...김상승(족보에).홍락.두락.상락.
국문학 전공,중등 국어교사로 40년 봉직.김선생의 조부는 족보에 김덕주金德周로 올려져 있다.-김호길-
[아들이 9살때 부친(김하락)이 55세에 돌아가셨다.아들인 조기락도 88세에 돌아가셨다.조기락의 부인(박사장의 외조모)과 딸.외손인 박창락님이 고등학생일때 묘를 개장하여 화장을하고 산골하였다고 한다.]=대전 박병락 사장님의 증언(어머니의 증언)
매은공파梅恩公派==
일길이 장군의 후손인 김오승 (?)형님한테 가져다 주라고 하여서 번역을 했다.
원당-다릿골-
새골할배 무섭다.신곡新谷.새골할배는 택호인데...새골은 어디일까?새골할배는 김학의병장일까?
의성문화원에 일기(조성학 정토일기) 복사본을 주셨다고 하신다.몇십년전 예기다.누가 숨겼던지..관심이 없었던지.
의성 향토사 하는 분들,기념관 추진위원회 관련자...학예사....군수,군의원,문화원 이사,국회의원 나리들,의성 상공인들,영농후계자와 청년들,기자단들,--이천의 넓고개와 이현, 남한산성 ,제천,죽령,순흥 백운동 답사에 대해서 ....수정사와 안덕전투...의흥현 관아-경주읍성전투--흥해-영덕 강구
수정사와 안덕전투,경주읍성전투 안내판은 예천에다 세우고....아무도 안하면 우리집 마당에...내 서재에다가.....
경주,영덕,청송,의성,안동,예천,제천,이천,광주,성남 관련자들이 합동으로 답사--학술회의까지...
김하락,조성학 의병장 기념사업회는 예천 촌놈이 만들어야 할까?의성분들이 만들어야할까?
김하락 의병진 남하도(사진출처-독립기념관)
딸 김영규(夫君은 정영)가 시신을 수습해서 외가인 서천 앞산(남산,서산?)에 모셔 놓았다.그후...왜놈들의 등쌀을 피해 중국 용정(하얼빈?)에 가서 살던 동생(김병우)을 찾아갔다. 동생과 다투고 미국으로 간다고 했는데,나중에 증조부(김병우)에게 들은 즉(나중에 김병우씨의 후손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의성인 김선생에게 전한 말이다)...미국에가면 독립투사(독립운동하는 분)들을 만날터인데 아버지 이름을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 올려달라고 부탁할 터인데 증거가 있어야하지 않나?목인(의병장 할때 쓰던 의병대장 직인을 달라고 하니 못준다고 하며 싸우다가 누님에게 빼았겼는데,누님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차량에서 헌병대의 검문을 받을 때 겁이나서 강물에 던져버렸다고한다.(김병우씨가 나중에 누이에게 들었고 후손에게 전해진 말이다.)
김영규(부군은 정영)는 부친의 일기를 조장군으로 부터 받았는데(추측)...하와이를 가고자 해서 먼저 중국으로 갔는데, 이모씨(충렬공 송상헌 가문의 며느리)에게 맡기고 갔다.아버지가 전사공파(?)의 후손이니 나중에 내가 안돌아오면 의성김씨 문중에 넘겨주라고 하였다고 한다. 죽을 날이 가까운 며느리 이씨가 80세가 넘어서 까지 안돌아오니....아들에게 전해줬고..아들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전하였다(30년전에는 독립기념관이 없었다).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김하락의 자료를 넘겨받은 의성김씨문중에서는 학자인 김승규씨가 넘겨받아서 번역을 했는데...표지에는 정토일록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김하락 정토일록'이다..상주에서 교장을 지냈고 장학사를 하던 김해승씨가 서훈신청을 했고 대전 현충원(국립묘지)에 모셨다고 한다.
신문--
박작대기(박중양-친일파,대구관찰사)는 독립투쟁가인 김호길(김하락 진중일기에 등장하는포군,의성인 김선생의 조부)이 대구부에 수감되었을 때 풀어주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앞에서는친일,뒤로는 독립투사들이나 의병들을 도와주었다고 하신다.대구에서는 박작대기가 유명하다고 한다.
네이버에서...조성학 의병장을 검색하면 김하락 장군(의병장)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가 보인다.1982년 8월 13일자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81300209210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8-13&officeId=00020&pageNo=10&printNo=18726&publishType=00020
그런데 김하락의병장의 집터는 위 기사의 원당리나 교촌리가 아니고 청로리가 맞는 것같다.19세였던 딸(김영교)이 아버지인 김하락장군의 시신을 모시고 청로리에 와서 하룻밤을 잤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아마도 기사가 나간후 나중에 중국에서 들어온 김병우의 후손(증손자)들이 증언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김승락 선생은 중국까지 가서 후손을 찾고..국내로 초청하여 도움을 줬지만..국가가 못해주는 것(보상)을 개인이 해줄 수는 없었다고 하신다.연락이 끊어진 그 후손을 찾아야 한다.국가가 나서야 한다.국가가 못하면 지역사회가 나서야 한다.공무원이 안하면 지역주민과 이장이... 우리는 의병장의 후손들에게는 보상을 하나도 못해주고 있다,월남전파병군인이나 6.25때 전사상 군경에 대해서...그러나 민주화 공로로 서훈자는 보상을 얼마나 받았더라?
현양사업도..지역주민과 이장이 군수와 군의회의장이나 국회의원 나리들 보다 더 나을수 있다.
의성군과 경북도,이천시와 성남시,경기도와 보훈처는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투사에 관한 현양사업을 지금까지 하나도 못했고....팽개쳐놨다.
눈물이 난다...정말 슬프다.
82년도에 기사가 났는데.. 독재와 투쟁하느라 전부 정신줄을 놓은 것 같다.
머 이런 나라가 있어!!...요놈...저놈,그놈...한놈도 제대로 못했으니...
첫댓글 부디 찾으시길...
찾아야죠.....국사편찬위원회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도 못한 것....제가 해야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