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 전사자 유가족들 “무관심 이해되지 않는다“
"효순 미선이는 기억하면서…" 서해교전 전사자 유가족들 "무관심 이해되지 않는다"
시중에 떠도는 루머 한 토막이다. 지난 5월 노무현 대통령 미국 방문에 앞서 워싱턴을 찾은 한국의 정치인에게 부시 행정부의 한 고위관계자가 물었다.
“지난해 6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여학생 이름을 압니까?”
정치인은 자신있게 답했다.
“효순이와 미선이요.”
부시 행정부의 고위관계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서해교전에서 죽은 장병들의 이름은요?”
“….”
이 관계자는 동맹군의 차량 사고에 의해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은 기억하면서, 적국의 흉탄에 희생된 군인의 이름을 모를 수 있느냐고 했다.
이같은 얘기를 전해들은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방문에 앞서 부시 대통령이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올까봐 워싱턴에 가면서 서해교전 전사 장병들의 이름을 부리나케 외워갔다더라.
그렇다면 우리들 중 위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고(故) 윤영하 대위,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작년 6월 29일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발생한 남북 해군 간 교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이다.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보낸 유가족은 1주기가 가까워지는 요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쓰린 나날을 보내고 있다.
▲ 고 한상국 중사 유가족들
1. 한 미망인의 이야기
포털 사이트 `다음`의 한 카페에는 ‘서해교전전사자 추모본부’(cafe.daum.net/pkm357)라는 동호회가 있다. 회원수 100만명을 넘는 연예인·유머·컴퓨터 카페에 비해서는 턱없이 작은 규모이지만, 서해교전전사자 추모본부 카페는 오프라인 모임까지 결성하며 거사를 준비중이다. 이들은 오는 29일 서해교전 1주년을 맞아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대규모 추모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 카페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접속 상태로 있는 ‘sunnyup’이란 아이디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고(故) 한상국 중사(당시 27세)의 부인 김종선(29)씨다. 채팅창을 통해 대화를 하던 그는 상대방이 기자라는 사실에 멈칫했다. 여러번의 설득 끝에 그와의 전화 인터뷰가 가능했다.
김씨는 “남편이 죽은 이후 성격이 많이 예민해졌다”고 했다. “누가 조금만 뭐라고 해도 상처를 입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싫고, 피해의식이 많아진 것 같아요.”
김씨의 남편 한상국 중사는 서해교전 당시 침몰한 참수리357정 조타장으로 전투에 참여해 실종됐다가 사건 발생 41일만에 시체로 발견됐었다. 한 중사의 시신에는 총탄이 옆구리와 등쪽을 관통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한 중사는 총격을 당하고도 조타실의 방향타를 끝까지 놓지 않은 자세로 발견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나라를 지키다 죽은 군인들에게 왜 그리 무심하죠?
남편 사망 후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김씨는 거의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작년 9월 머리도 식히고 분노도 삭힐 겸 캐나다에 있는 언니한테 갔었어요. 그러다 다음카페에 서해교전 전사자 추모카페가 있다는 걸 알고 올 초 귀국해 그 분들과 추모행사 준비를 하며 지내고 있어요.”
“우리 국민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여중생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심이 높으면서 왜 나라를 지키다 죽은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죠? 정말 이해가 안돼요.” 김씨는 “서해교전 1주년 추모행사가 촛불시위처럼 크게 진행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며 “그저 사람들이 남편을 기억해주고, 남편 사진 앞에 꽃이라도 한 송이 갖다주면 그걸로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추모행사가 끝나고 김씨는 다시 캐나다로 떠날 계획이다. “확정된 건 아니지만, 캐나다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싶어요. 영어 실력을 쌓아서 외국인들에게 서해교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 게 제 바람입니다.”
“서해교전 전사자들 흉상과 참수리357정이 전쟁기념관에 전시되고, 그들 얘기가 교과서에도 실리도록 할거예요. 일반인들에게 왜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하는지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남편의 그늘 아래 얌전한 새댁이었던 김씨는 남편 사망 후 투사로 변해있었다.
2. 한 아버지의 이야기
9일 고 황도현(당시 22세) 중사의 아버지 황은태(57)씨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 가로공원’에서 만났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쓰인 해병전우회 광고판 아래 서있던 기자에게 고무신을 신은 중년의 남자가 걸어왔다.
 ▲ 고 황도현 중사 아버지 황은태씨 / 김재은기자
◆피묻은 아들 군복 빨았다
“도현이가 죽은 후 달라진 건 없어요. 도현이 방도 그대로 있고, 도현이 물건도 그대로고.” 1평 남짓한 황 중사 방에는 책상과 옷걸이, 장식장이 그대로 있었다. 황 중사의 코트, 스웨터, 일기장, 지갑, 앨범, 상장, CD플레이어…. 달라진 게 있다면 책상 위에 황 중사의 영정사진과 꽃병, 향, 염주가 추가됐을 뿐이다.
화물트럭을 운전하는 황은태씨는 트럭 속에서도 아들의 흔적을 꺼내 보였다. 황 중사가 전사할 당시 입었던 군복과 사진, 그가 썼던 시(詩)를 정리해놓은 공책이었다. “피가 잔뜩 묻은 찢어진 군복을 깨끗이 빨았습니다. 아들의 유품을 보며 ‘살아있는 동안 도현이를 잊지 말자’고 다짐하죠.”
◆아버지 형, 아들이 북한군에 죽었다
아들만 둘을 가진 황은태씨에게 황 중사는 자랑스런 둘째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 하고 시도 잘 짓고 피아노도 잘 쳤어요.” 숭실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 황 중사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유아원과 장애인 보육시설을 찾으며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도현이가 죽기 1주일 전 1박 2일로 특별휴가를 나왔어요. 휴가를 나오자마자 형과 월드컵 응원을 갔다가 다음날 새벽에야 들어왔어요. 출근하는데 보니 도현이가 자고 있어 퇴근 후 대화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퇴근하기 전 벌써 부대로 복귀했더라고요.”
황씨는 그 날 잠든 아들을 깨워 대화를 못한 것을 후회했다. “내가 운수업을 하다 빚을 져 가정형편이 어려워졌어요. 도현이는 학비를 벌겠다고 하사관으로 입대해 매달 집으로 돈을 부쳤죠. 아들 일기장을 읽다보니 이 녀석이 고등학교 때 차비 500원을 아끼려고 매일 학교를 걸어서 다녔더라고요.” 침착하던 그는 이 대목에서 끝내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들에게 미안해서 보상금 받은 것, 성금 받은 것에 손을 못대겠습니다.”
▲ 고 황도현 중사의 방
“우리 아버지, 형이 6·25 때 인민군한테 잡혀가 죽었어요. 우리 아들도 북한군한테 총 맞아 죽고…. 3대 중 나만 남은 셈이네요.” 그는 “이북 찬양하는 사람들을 보면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금강산 관광은 돈 주고 가라도 싫다”고도 했다. ‘북한’이란 단어, ‘김정일’이란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린다는 그이지만, 황씨는 말을 아끼려 했다.
“요즘 북한과 교류도 하는 분위기인데, 도현이만 내세우면 시대에 역행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북한 사람들도 같은 민족이니 통일을 해야할텐데, 자꾸 복수만 하면 언제 통일을 하겠어요. 세상 흐름에 맞춰 살아야죠.”
기자와 헤어지며 황씨는 다시 관심을 보여줘 고맙다고 했다. 1년 전 그의 휴대폰은 인터뷰를 하자는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댔고, 그의 집은 아들의 사진을 얻으려는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황도현이란 이름은 벌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워졌다.
(박내선기자 nsun@chosun.com )
(김재은기자 2ruth@chosun.com )
(동영상=빈석진 PD jupiter@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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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어쩌다가 요모양 요꼴 됐지 바로 세워야죠 이제부터라도
서해교전은 전쟁이였습니다. 아직도 이 전쟁을 기억속에서 지워버리려는 무리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6.29일은 우리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잊을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