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무던한 사람 -
文霞 鄭永仁
내가 자주 지나다니는 아파트에 늘 보이는 레이라는 경차 한 대가 서 있다. 색깔은 갓 거피한(去皮-) 녹두를 물에 불려 껍질을 다 흘려버린 녹두의 색깔이다. 그 차 앞 유리창에는 스티커 자국이 늘 남아 있다. 그 자국이 1년여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차 주인이 꽤 무던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가끔 가다가 세차를 했을 텐데….
무던한 사람!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그리 많지 못하다. 앞차가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뒤에서 빵빵 거리는 군상들 천지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무던한 사람들은 학처럼 고고하지 않은가?
이런 무던한 친구도 있다. 인천에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태안에서 아침에 눈길을 밟아 모임에 참석했다가 바로 태안으로 달려가는 친구다. 나 같았으면 귀찮아서 참석을 안했을 덴데 말이다.
지금은 무던한 사람이 별로 없다. 조금만 자기에게 피해를 간다면 화를 내고 핏대를 세운다. 앞차기 1초만 늦게 출발해도 뒤차는 참지 못하고 “빵빵! 거린다. 우리는 1~3초도 못 참은 세계에 산다. 반도체는 몇 나노 속도의 경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인가. 한국이 초고속 발전한 원동력은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에 있다고 한다. 이젠 빨리빨리가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공통적인 언어가 되 가고 있다.
무던한 사람은 선한(善-) 사람이 아니었나 한다. 원래 우리 민족은 선한 민족이었을 것이다. 감나무에 까치를 위하여 까치밥을 남기고, 콩을 심을 때도 한 구덩이에 세 알을 심었다. 한 일은 하늘을 나는 날짐승을 위해 다른 한 알은 땅속 벌레를 위해, 나머지 한 알이 사람의 몫이었다.
수챗구멍에 뜨거운 물을 버릴 때도 “벌레야, 벌레야 뜨거운 물 나간다. 눈을 감아라”했다. 봄에 먼 길을 떠나는 길손은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두 종류를 매달고 떠났다.
오합혜(五合鞋)와 십합혜(十合鞋)였다. 오합혜는 씨줄이
열 개, 십합혜는 씨줄이 열 개인 성긴 짚신으로 십합혜는 마을길을 갈 때 신고, 오합혜는 산길을 걸을 때 알을 까고 나오는 벌레들을 깔려죽을 까봐 듬성듬성 엮은 짚신을 신은 것이다. 여인들은 3덕(三德)이라 해서 식구 수에 세 명으로 몫을 더해 밥을 짓는 것을 부덕(婦德)이라 여겼다, 걸인이나 가난한 이웃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대개 걸인이 오면 아무리 어려워도 밥 한 술 주어 보내는 넉넉한 마음을 가졌었다. 밭두렁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러 한 술 같이 뜨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넉넉한 인심이나 인정을 가진 민족이었다. 그래서 미국 소설가 펄벅 여사는 장편소설 ‘살아있는 갈대’에서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로 표현했다. 고상하고 무던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인 것이다.
전철을 타면 빨간 표시가 된 임산부석은 비어 있을 때가 많다. 어떤 때는 물색없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을 때도 있지만 …. 경로석이 비어 있는 경우도 무던한 심성 때문이고,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 뒤에 오는 사람이 있으면 열림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사람도 무던한 사람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찾아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거나 집 앞에 놓인 택배 물건이 그대로 있는 경우도 한국은 아직도 무던한, 선한(善-) 사람이 많다는 증좌일 것이다.
모임에서 늘 커피를 타오는 친구, 소소하지만 과자를 가지고는 친구, 다 무던한 친구들이다. 이 무던함은 우리 생활의 윤활유(潤滑油)이다. 거기에는 따뜻함, 선함이 깃들어 있다. 친구 중에 자기 이름에 ‘착한 善’자가 들어가 있다고 자신은 선한 사람이다고 말하는 그도 무척이나 자타가 무던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무던하던 우리 심성이나 사회가 조급함 때문에 박 터지게 싸우고 있다. 권력을 먼저 잡으려고 온 나라가 피터지게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정치인들도 농부가 콩 세 알 심듯 한 알은 상대편을 위해, 하나는 자신을 위해, 한 알은 국민을 위해 심는 무던한 정치인이 되었으면 한다.
윤학 변호사는 “누군가를 공격하는 일에만 평생을 바쳐온 사람들이 무엇을 새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을 리 없다”라고 했다. 독기를 품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무던하거니 선할 수가 있겠는가. 고사 시루떡 한 판 쪄서 고수레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입을 좀 무던히 하라고……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