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은 2·8독립선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독립선언의 배경에 일찍부터 중국과 노령으로 건너가 개인의 영달을 포기한 채 목숨 내놓고 활약했던 선각 항쟁가의 결정적인 공헌이 있다는 것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1918년 무오년 11월, 독립운동가 39명이 망라된 조선 최초의 독립선언문을 내놓았다. 이른바 ‘무오독립선언문’이었고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선언문’이었다. 2·8독립선언문은 이 선언문을 전범으로 삼은 것이다.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게 하라.’고 요구한 이 선언문은 2천만 동포에게는 육탄 혈전을 주문했고 일제에 대하여는 무력적 대응을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일면 선전포고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이 손병희와 최남선의 의도로 온건하게 바뀌면서 내세운 명분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말대로 과연 조선의 민중은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과연 누구를 위한 비폭력이고 무엇을 위한 질서 존중이었는지를 회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을 민족 대표라고 여기는 사람도 그 시대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나약성과 타협성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무단정치의 공포 분위기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구국 행위였다. 그들의 용감한 활동이 전국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운동 벽두부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약속한 시간과 장소인 오전 10시와 탑골공원을 일방적으로 바꿔 버렸다. 그들의 말로는 폭동의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사후 공판의 변론에서 유효하게 작용했다. 그들은 오후 3시, 명월관이 이름을 바꾼 요릿집 태화관에서 모였다. 그들은 민중의 동향이 예상보다 거칠어지자 스스로 운동의 주도권을 놓아 버렸다.
그들 중의 다수는 국제 정세를 읽는 실력이 부족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적국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에 그쳤고 미국의 도움을 과신하는 타협적이고 의존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33인의 대표 격으로,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손병희는 이미 러일전쟁 때 ‘일본이 패망하면 동양이 파멸한다.’고 생각하여 일본에 군비 일만 원을 헌납한 일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운동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민중은 자기들처럼 무슨 일을 흉내나 내고 그만 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은 채,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 설명으로 대신하고 곧장 요리를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승에 줄줄이 달려가는 모습을 민중이 본다면 얼마나 감격할 것인지를 헤아리는 두뇌도 없었다.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의 일부는 혀를 찼고 나머지는 비웃었다고 한다.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박희도)’ 장소를 변경했다고 그들은 법정에서 말했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볼 때, 그들 33인을 민족 대표라고 존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을 가리켜 더 이상 민족 대표라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국내 종교계 대표라는 칭호가 적합하다.
3·1운동의 주체는 중국 독립 운동가들과 방방곡곡의 초동급부들이었다. 그들은 비폭력 타협주의의 한계를 깨고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탄압에 대한 반발에서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폭압적 본질을 피부로 느낀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3·1운동이란 용어에도 문제가 있다. 조선인들은 3, 4월 두 달에 걸쳐 200만 명이 시위에 가담했고 7,500명이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 33인을 보고 비웃었던 일본 헌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바로 민중들이었다.
민중은 자발적으로 뭉쳤고 그 뭉친 이들 중에서 지도자가 나왔다. 33인은 길어야 3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학생과 농민 지도자들은 15년씩이나 되는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동학란이 아니라 갑오년 항쟁이라면, 3·1운동은 최소한 ‘기미년항쟁’으로 용어 변경을 해야 마땅하다.
어리석은 공동체는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한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의 희생과 선각자의 공로를 가로채 유명인사가 되는 사람은 많다. 어리석은 국민일수록 유명인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점도 같다. 더민당과 국민의당과 정의당 사람들, 그들이 과연 야당일까? 여기에다가 정치인 이상으로 기만적인 지식인들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유명세를 타며 득세하고 있다.
첫댓글 민중(인민대중)의 피와 땀으로
금뺏지를 단 야당 의원들에게
묻고 싶네요.
당신들은 정말 분단된 조국과
고통받는 민중들앞에
떳떳할수 있습니까...?
혹 위 글의 33인 같은
비굴하거나 비열한 삶을
살고 계신것은 아닌지요...?
파고다 공원이 아닌
요릿집 태화관에 숨어서
선언문 달랑 한장 낭독하고
일제의 탄압이 두려워
불순분자 폭동을 핑게삼는
33인과...
밀실 야합으로
통진당을 종북으로 규정
독재와 타협하는
현실 야당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저들도 나름대로 처지에 맞게 독립운동에 기여를 했겠지요. 단지 김갑수씨 말대로 그 공이 너무 과대평가 돼 있는 것이고... 여기 카페에서 그런 글을 봤던가? 33인이 먼저 맨 앞에 이름을 올리겠다고 다툼이 벌어지자 어느 누가 서명 순서는 먼저 목이 날아갈 순서라고 하자 조용해지더라는... 글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아무런 공없이 제1 야당 대표를 날로 잡수신 전직 대표, 그 어떤 분이 얼른 떠오른다는...
@무시칼수록 용감해져야 한다 "이미 그들은 1918년 무오년 11월, 독립운동가 39명이 망라된 조선 최초의 독립선언문을 내놓았다." .... 모르고 있던 역사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본문의 전체 글도 찐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틀린 말 하나도 없습니다. 그 때 33인과 작금의 더민주 포함 야당 똑같습니다. 저도 야당에 대한 환상 없습니다. 일단 저는 구 통합진보당 당원이었습니다. 이정희 대표를 너무 좋아하는 ...
@각시잠자리 단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
@각시잠자리 그 때는 일제직접통치였고 지금은 교활하게 식민지 민중의 눈을 속이는 ㅁㅈㄱㅈ 통치입니다. 나라가 없던 그 때는 선각자(독립운동가)와 민중이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있고, 이 속에 '대한민국형 애국자'(제가 이 들을 정말 증오하죠)가 양산됬고요 ... 전체 국민의 35%~50%를 차지하는 이 대한민국형 애국자들은 남녘의 선각자를 싫어하고, 구 통합진보당을 싫어하고, 북을 싫어하고, 이게 현실이죠 ...... 노동자와 민중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새누리당은 '대한민국형 애국자' 들의 지지에 힘입어 소위 선거라는 합법적
인 방법으로 권력을 계속해서 부여 받고 .....
@각시잠자리 목이 터지도록 분명히 말합니다. 더민주가 새누리보다 낮다는 게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정치의 선거
라는 환경에서 민중은 여당위정자놈들과 야당위정자놈들의 구도를 잘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하나의
민초일 뿐이지 그 무슨 '한국정치인 심사위원' 이 아닙니다. 새누리당이 앞뒤 안 가리고 노동자를 급속히 고통
송으로 몰아 넣는 당이라면 더민주는 압뒤 눈치 봐가며 서서히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당입니다. 이것을 이용하
면서 (최후승리의 그 날까지) 민주노조 사수하고, 자기 가정 지키려 하는 노동자입니다.
@각시잠자리 그리고 한마디 더 한다면 이번 총선 ..... 최악의 상황? 새누리당 180석? 못 얻습니다. 택도 없습니다. 많이 건져야 160석 미만입니다. 160석 미만으로만 떨어뜨려도 선방입니다. 총선 후에 그네, 자기 맘대로 못합니다. 무성이가 서서히 용틀임(?) 할 겁니다.
@각시잠자리
무성이는 미제끄나플 1중대입니다.
2중대에 약간의 기대감은 이해가 갑니다만..
무성이가 박통과 싸워줄거란 기대.??..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언플에 일희일비 하다보면..
도끼자루 다 썩습니다.^^.
@역사나무 댓글 감사합니다. 유념하겠습니다.
"이미 그들은 1918년 무오년 11월,
독립운동가 39명이 망라된 조선 최초의 독립선언문을 내놓았다.
이른바 ‘무오독립선언문’이었고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선언문’이었다.
2·8독립선언문은 이 선언문을 전범으로 삼은 것이다.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게 하라.’
고 요구한 이 선언문은 2천만 동포에게는 육탄 혈전을 주문했고
일제에 대하여는 무력적 대응을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일면 선전포고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이
손병희와 최남선의 의도로
온건하게 바뀌면서"
글쿤요...
일종에 노조 무력화를 위한 어용노조?..
분명 미제의 계략이..
작동 했을겁니다.^^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게 하라.’"
그 당시에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듯 싶군요.
일본은 섬이라서 유리했던..
물류 뱃사공 역활로 돌아가고..
조선은 반도 본연의 임무인..
인간의 사상적 각성 사업으로 돌아오고..
고려는 대륙의 망가진 터전을 정비하여..
생산을 회복할수 있게 하라.^^.
이런 체재를 회복하기 위해서..
2천만 동포들이 육탄 혈전을 불사 해서라도..
서세 제국주의를 기필코 물리칠것을 다짐하며
조선(대한)이 자주 독립국임을..
세계 만방에 선포 하노라.!!..
.^^.
위와같은 선언문 이였을듯.. 요.^^.
김활란과 유관순 상관관계 도 조사해보시면 매우 흥미로울것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키호테 회색2중대가 테러방지법을 애초부터 막을 생각이었다면
상임위에서 부터 어떻게든 막아볼려고 했을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2016년도 예산안 처리과정에서
노동법과 북한인권법등,,모든 민주악법을 이미 본부중대와 합의한바 있다는군요..
그러니 필리버스터인지 나발인지는 지랄생쑈로 끝날수 밖에 없을것을
진~~~즉 부터 알았지요............
@키호테 국민당 빠의 안타까움이 묻어나옵니다.
@키호테 다행이군요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33명의 종교인들이 비판에 몰리자..
이제는 3.1운동에 먼저 의의를 두고 33명이 운동을 이끌었다며 그들을 두둔하는 글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3.1 운동은 선동에 속아 갑작스레 일어나 많은 인민이 희생당한 실패한 운동이고..
그 실패의 원인은 33명의 종교인의 선동질 때문이었기에..
그 33명을 역사의 죄인으로 삼아 훗날 같은 일을 되풀이 하면 안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