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제국이고, 독일은 민족이며, 프랑스는 개인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는 세 나라의 특징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했다. <프랑스 혁명사>라는 대작을 후세에 남긴 쥘 미슐레의 이 말은 한 세기 이상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제국(empire)'이었던 영국이 제국의 영향력을 미국에 넘겨주어 '왕국(royaume)'으로 격이 낮아졌다는 사실만 덧붙이면 될 것이다.
프랑스의 인구는 1997년 현재 5,900만이다. 미국, 러시아 등에 비해 훨씬 적고 일본의 절반도 안 되며 남북한을 합친 인구보다 1,000만 명 가까이 적다. 이렇게 인구로는 열세이지만 문학, 사상, 예술 등 특히 개인의 창조성이 요구되는 분야에선 프랑스인들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누구도 함부로 부정하지 못한다. 이처럼 숫적인 열세를 뛰어넘어 남다른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5,900만의 개성이 서로 다르므로 모두 자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 모두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프랑스는 5,900만으로 나누어져 있다"라는 표현도 하고 있다. 남한 인구가 4,500만이라면 "남한은 4,500만으로 나누어져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예컨대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고 말한다면, 프랑스인들은 당장 "뭉치면 죽고 헤어져야 산다"고 응수할 것이다.
요컨대 프랑스인들은 모두 개인주의자들이다. 개인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나'다. 그래서 항상 나를 앞세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건,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건 나의 존재에 관한 문제가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첫 번째로 제기된다. 주체인 나가 있고 나 이외의 모든 것을 객체로 보는 데카르트적 전통은 '프랑스의 영광'을 끊임없이 주장하여 프랑스 대(大)민족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기도 했던 드골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프랑스의 영광'을 주장할 때도 항상 "나, 드골은......"을 앞세웠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진 에밀 졸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은 에밀 졸라가 아니라, 유태인이란 이유 때문에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뒤집어썼던 드레퓌스 대위였다. 그렇지만 에밀 졸라의 고발문은 "드레퓌스는 억울하다!" 등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나는 고발한다!"로서 사건 자체로 보면 제3자인 에밀 졸라의 나가 앞섰다.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인들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통치하기 어려운 국민이라고 말했다. 이 세상의 어느 국민들보다 구심점을 향하기보다는 원심력에 더 끌리는 사람들이라 하겠으니 통치자의 처지에서 보면 실로 통치하기 어려운 국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흥미있는 점은 그렇게 말한 드골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런 프랑스를 사랑했고 또 그런 프랑스 사람들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엿볼 수 있는, 장 폴 사르트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알제리 독립과 프랑스
장 폴 사르트르가 196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마디로 거부하였을 때, 세계의 참새들 중에는 그의 행위를 가리켜 알베르 카뮈보다 나중에 상을 주는 것에 대한 분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사르트르보다 여덟 살 어린 카뮈에게 7년 일찍 노벨문학상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따위의 해석은 역시 참새들다운 해석이라 하겠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둘 다 실존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둘 사이에는 다른 점이 분명히 있었다. 바로 그 차이가 사르트르에게 노벨상 수상을 거부케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알제리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알제리 전쟁은 프랑스의 현대사에서 '비쉬 정권'과 함께 가장 '어두운' 역사로 자리매김되고 있고, 드골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문제는 오늘의 프랑스를 알기 위해서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프랑스는 탈제국주의의 길을 걷는 대신에 과거의 식민지들을 재빨리 추스르는 길을 택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쫓겨났던 인도차이나를 다시 식민지화하려고 나서, 전쟁이 끝나면 당연히 독립되리라고 기대했던 인도차이나인들을 철저히 배반하였다. 그러므로 베트남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해방전선이 제국주의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1954년에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군은 민족해방전선군에게 완전히옥쇄당했고 결국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그 바톤을 이어받은 게 미국이었고 곧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트남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프랑스 제국주의를 몰아낸 베트남 민족은 다시 미제국주의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데 이때 한국은 제국주의 편에 가담했다).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여 물러났다는 소식은 당연히 알제리인들의 독립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했다. 베트남에 투입되었던 병력들이 알제리에 재투입되어, 제국주의 군대의 '칼'은 늘어났지만 알제리인들의 독립 의지는 오히려 충천했다. 그런데 당시의 프랑스는, 비록 베트남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고 하지만, 알제리에서는 쉽게 물러날 상황이 아니었다. 즉 알제리로부터의 철수에는 '싫음'뿐만 아니라 '어려움'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기름이 나오지 않는 프랑스는 천연가스가 무궁무진하고 기름도 나오는 광활한 땅 알제리를 놓치기 싫었으며, 동시에 알제리 땅에 거류하는 100만이 넘는 프랑스인들을 비롯한 유럽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도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위에 거리가 아주 먼 인도차이나와 달리, 지중해만 넘으면 닿는 코앞의 땅이라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프랑스의 일반 국민들에게도 알제리와 인도차이나는 달리 인식되고 있었다. 즉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니라 '자기 땅'이라는 인식이었다. 그것은 인도차이나가 식민성(植民省) 관할이었던 반면에, 알제리는 행정구역상으로 프랑스 본토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도(道)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무부 관할이었다는 차이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에게 알제리 땅은 완전한 '자기들의 땅' 이었다. 물론 알제리인들의 눈으로 보면 실로 가당찮은 '그들의 땅'이었지만.
"프랑스의 알제리!"
알제리인들의 독립 의지에 반대하여, 알제리 내의 프랑스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 구호를 외쳤다. 결사적인 식민지 유지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장난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이들 '식민지 결사유지'파 중에는 파리코뮌 전사들의 손자, 증손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코뮌 때 '앵테르나시오날(인터내셔널)'을 외쳤던 코뮌 전사들의 일부가 식민지당 알제리에 추방되었는데 추방지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씨를 뿌린 셈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프랑스 국내에서는 공산당 등의 좌파를 제외하곤 거의 모두 식민지 유지를 지지했다. 예컨대 프랑수아 미테랑도 골수 식민지 유지파에 속했다. 프랑스는 완전히 둘로 갈라졌다. 유지파와 철수파 사이의 골은 드레퓌스 사건 때나 1930년대 극우파와 싸웠던 인민전선 때보다 훨신 더 깊고 날카로웠다. 급기야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그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프랑스에서도 좌우 사이에 시민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9지금은 프랑스 공산당의 지지율이 10%선이지만 당시에는 30% 상당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 심각한 위기의 순간에 다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드골이었다. 2차대전의 위기에서 프랑스를 구했던 인물이 13년을 기다린 뒤에 두 번째로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는 국민들의 부름에 응하면서 대통령중심제 헌법 개정을 요구하여 관철시켰고 스스로 대통령에 올랐다. 바로 제5공화국이 시작된 것이다.
드골 대통령은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알제리에서 철수하는 길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고민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진압하는 데 있지 않았고, 결사적인 식민지 유지세력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와 피에느와르(알제리의 프랑스인)들을 어JEgrp 문제없이 환국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우선 드골은 알제리를 방문하여 그 유명한 "나는 당신들을 이해했습니다(Je vous ai compris)"라는 말로 알제리의 프랑스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 말이 실은 절묘한 정치적 표현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알제리는 프랑스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이해했다'라는 말이 실상은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이해했다'는 게 '명예로운 철수'정책으로 가시화되었다. 이 철수정책으로 드골은 '자칼의 복수'로도 잘 알려져 있듯이 암살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알제리에서 식민지 유지파들이 결국 쿠데타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고 드디어 1962us에 알제리는 독립을 획득하여 130년 간에 걸친 식민지 신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피에느와르들은 주로 프랑스 남부 미디 프로방스 지방으로 환국하였다. 대량의 환국 조처가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호경기를 누리고 있던 프랑스의 경제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나중에 프랑스의 현대 역사가들은, "당시에 드골이 없었다면 프랑스의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며 우파의 수장이면서도 우파 여론을 다스려 잠재웠던 그의 위대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알제리 전쟁은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정치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극우파 국민전선의 우두머리인 장 마리 르팬은 알제리에서 공수부대요원으로 활동한 자였고, 현재 국민전선을 피에느와르들이 많은 미디 프로방스 지방에서 가장 많은 지지율을 획득하고 있다,. 국민전선파가 시장에 당선된 툴롱, 마리냔, 오랑쥐시 등은 모두 이 지방에 속하는 도시들이다. 많은 피에느와르들이 알제리 땅에서 쫓겨난 원한을 아직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도 프랑스야!
알제리 독립전쟁이 시작된 1957년은 알베르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였다. 그는 "조국을 배반할 수는 있으나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를 배반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식민지에도 반대하지만 알제리에서 프랑스인들이 쫓겨나는 것에도 반대한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소설 <페스트>로 알 수 있듯이 카뮈는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간과계와 명분 사이에서 주저했다면 사르트르는 단호했다.
사르트르는 말과 글로 식민지의 반인간성, 반역사성을 강력하게 외쳤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으로까지 나섯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들이 갹출한 독립지원금이 들어 있는 돈가방의 전달 책임자를 자원했던 것이다.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피해서 그의 책임 아래 국외로 빼돌린 자금은 알제리인들의 무기 구입에 필요한 돈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반역행위였다. 당연히 사르트르를 법적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골 측근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이에 대해 드골은 이렇게 간단히 대꾸했다.
"그냥 놔 두게. 그도 프랑스야!"
'그도 프랑스야!'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20세기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을 만나고 또 그 두 사람이 가장 프랑스적인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만난다. 사르트르가 프랑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사상가, 문필가였다면 드골 역시 프랑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정치 지도자였다. 어쩌면 드골이 한 수 위였는지 모른다. 그의 위대성은 "그도 프랑스야!"와 "나는 당신들을 이해했습니다"의 두 마디에 농축되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는 "그도 프랑스인이야!"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도 프랑스야!"라고 말했다. 둘 사이에는 말의 묘미 이상의 차이가 있다. 예컨대 "한총련 학생들도 한국인이야!"와 "한총련 학생들도 한국이야!"의 사이에는 실로 큰 차이가 있지 아니한가. 학교의 왕따는 사회의 산물
여기서 잠깐 한국에서 요즈음 커다란 사회 문제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는 왕따 현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솔직히 말해서, 내 자식들이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강요된 이방인의 삶의 일정 부분을 메꾸어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외국인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프랑스의 학교와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기는커녕 기도 죽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왕따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이란 생각을 잠시라도 할라치면 나는 곧 착잡해지고 만다. 한국 사회에서 내 아이들은 왕따 대상 제1호에 가까웠을 터이다. 남의 나라에서 당하지 않는 왕따를 제 나라에서 당한다면 그것은 서글픔 이상의 것이다.
왕따란 결국, "너는 우리가 아니야!"라는 주장에서 비롯되는 행태이다. 반역행위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사람까지 '그도 프랑스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에 왕따가 설 자리는 없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왕따 현상은 일본에만 있는 것으로, 즉 남의 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게 지금은 오히려 일본보다 더 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항상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먼저 수입되고 또 수입된 뒤에 더 심해지는 경향을 갖고 있다.
단언하건대, 한국의 왕따 현상은 학교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사회에서 비롯된 사회의 산물이다. 왕따 현상을 분석해 보면 우선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 가혹한 입시경쟁, 장래에 대한 불안 등 어린 학생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억압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줄기차게 억압받음으로써, 욕구불만의 덩어리가 돼버린 학생들이 그 욕구불만을 기형적으로 돌출시켜 나타난 것이 왕따라는 것이다. 따라서 왕따는 학교 책임이 아니라 그런 학교를 온존시키고 있는 한국 사회의 책임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왕따가 한국과 비슷한 입시경쟁 체제를 갖고 있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 한국의 왕따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사회에 없는 왕따를 학생들이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의 왕따는 사회 안의 왕따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호남사람들이 당했던 게 다름아닌 사회적 왕따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나, 저급하고 비열한 사회적 동물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것'은 결코 한국인의 특성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 안에 살면서 자기보다 못한 인간이 있기를 기대한다. 자기는 중심에 있기를 기대하고 다른 사람은 주변에 있기를 기대한다. 자기가 주변에 있어도 더 주변에 있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한다. 부자는 왜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만 부자를 느끼는 것이다. 소수 외국인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내쫓을 때 내국인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편하고, 차별받는 지역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즐겁다. 이런 저열한 인간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똘레랑스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정치가, 종교인, 교육자, 언론인, 학자들의 임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확인하여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왕따라오!
학생들의 욕구불만 해소 행태로서의 왕따는 그들이 보고 느끼는 사회현상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따르면서 나타난다. 예컨대 일본학교의 이지메는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일과 부라꾸민(部落民)을 차별하고 따돌리는 일본 사회, 그런 차별과 따돌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본 사회의 다수여론이 이를 묵인, 방조하고 있고,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인과 부라꾸민은 이런 현실에 체념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극우파 국민전선은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다수 여론은 그들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반격을 하고 있다. 비록 아직도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이 프랑스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들은 공격성을 띠지 못하고 수세에 있다. 따라서 북아프리카 출신 아랍인들은 체념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점이 일본과 다른 점이고 바로 이 점에서 이지메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나온 것이다. 요컨대 왕따 현상은 "너는 우리가 아니야!"라는 주장과 당하는 사람의 체념이 합쳐져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왕따가 일본에서 수입된 두 번째 이유를 알게 된다. 정리하자면, 왕따란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혹한 입시경쟁체제'와 '차별하는 사회에 대한 다수의 묵인, 방조와 당하는 사람의 체념'이 만나서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 결식 아동에게 '거지밥을 먹는다'고 왕따시키는 무서운 아이들이 어떻게 나왔는가를 보자. '가난이 죄이고 부끄러운' 사회가 되었기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나오리라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옛날에는 가난이 죄도 아니었고 부끄러움도 아니었다. 지금은 가난이 죄이고 부끄러운 사회가 되어버렸고 이를 다수가(물론 겉으로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받아들이고 있다.
예컨대 30년 전에 말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지금 말하고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옛날과 달라진 점은 오늘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 현실에 체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력이든 돈이든 가진 자들의 뻔뻔스러움은 가히 공격적인데 그게 버젓이 통하고 있으니, 그것도 50여 년 동안 통해왔으니, 가지지 못한 자들은 자들은 체념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바로 이것, 체념이다. 여기서 한국의 왕따가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들이 왜 당하고만 있는가? 체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하고만 있지 말고 떳떳이 밝히고 대들라"고 말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보지 못한 데서 온, 겉으론 좋은 말이나 속 내용이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가난이 죄'라는 지배적인 사회 인식에 대하여 한국 사회가 - 말뿐이 아니라 - 반격을 해서 지배 여론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식 아동을 왕따시키는 무서운 아이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개선시키기보다는 더욱 악화시켜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에서 추방하고 주변화시키는 현실, 정리해고로 쫓겨난 실업자들의 책임을 그들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는 일, 힘없는 여성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해고시키는 일, 반대자를 여차하면 감옥에 집어넣는 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모른 체하는 일, 억울한 죽음들의 억울한 사연을 밝혀 그 원혼을 달래주지 않고 모른 체하는 일...... 이런 일들이 한국의 사회적 왕따의 구체적 모습들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까지 왕따시키고 있는 사회에 어떤 왕따 현상이라고 나오지 않겠는가?
위와 같은 점에서 볼 때, 이해찬 교육부장관이 신학기를 맞아 30여만 대학신입생들에게 편지를 보낸 일은 사회에서 왕따를 없애야 하는 '국민의 정부'의 시대적 사명을 정면에서 배반한 것이었다. 대학 새내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메시지를 따지고 보면 결국 학생 운동권 선배들 특히 한총련 선배를 멀리하고 따돌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왕따 현상에 앞장서서 싸워야 할 교육부장관 스스로 학생들에게 왕따를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다.
교육부장관으로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런 따위의 편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운동권 학생의 선배로서 후배들과 마주 앉아 대화하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왕따 당하고 감옥생활까지 강제당하고 있는 한총련 학생들도 "한국이야!"라는 메시지를 사회에 던져주어야 했다. 그래야 '보통사람 교육부장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보통사람의 길을 택하였다.
이해찬 장관 자신이 예가 되었듯이, 한총련을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은 나중에 한국에서 중요한 동량이 될 수 있는 사회의 활력소들이다. 그의 편지 보내기는 '위에서 일방적으로 내리는' 권위주의적인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조차 부정하는 행위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모델인가, 개인모델인가?
1998년 세계 축구경기(월드컵)에서 프랑스팀이 우승하자, 독일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팀의 단결과 강한 체력이 요구되는 축구경기 같은 시합에서는 자기들이 프랑스에 비해 월등하다고 믿어왔고 또 실제로 지금까지 그래왔는데 이번에 그 믿음이 깨졌던 것이다.
월드컵 축구경기를 눈여겨본 사람들은 알 수 있었듯이, 프랑스팀에는 거의 모든 인종이 다 섞여 있었고 독일팀은 순수 게르만족 일색으로 구성되었다. 터키 출신의 2세들 중에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독일 국적을 주지 않아 당연히 독일의 국가대표팀에 낄 수 없었다. 독일 땅에서 태어났고 독일의 공립학교에서 공부한 터키인의 자식들에겐 독일 국적을 주지 않았던 반면에, 옛 소련 땅이나 헝가리, 폴란드 땅에서 4, 5대째 살았고 독일어를 못하더라도 게르만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에겐 독일 국적을 주었다. 프랑스인의 눈으로 보면 지독한 핏줄 우선주의였다. 20세기 최대의 비극에 얽힌 불가사의한 질문, 즉 "유럽에서 가장 개명된 국민들 중의 하나였던 독일인들이 어떻게 히틀러와 나치즘에 열광할 수 있었고 유태인 학상에 동조할 수 있었던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도 우선 "독일은 민족이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 독일에서 속인주의 전통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월드컵 축구의 결과도 꽤 영향을 주었다. 새로 집권한 사민-녹색 연정의 슈뢰더 정부가 국적법을 개정하여 터키인 2세에게 2중국적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던 것도 그런 반성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속인주의 전통은 워낙 두터웠고 사민-녹색 집권당이 헤센주 선거에서 패배함으로써 국적법 개정안은 중도에서 주춤했다. 결국 원래의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에게만 독일 국적을 주는 선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인들을 특히 독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민족주의에 대하여 경계심을 나타낸다. 내가 몇몇 프랑스인들과 가진 토론 중에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그 필요성에 대하여 설명해 보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동의하려 들지 않았다. 베트남을 예로 들면서, 저항적 민족주의도 결국은 팽창적 민족주의 혹은 공격적 민족주의로 자동 발전하게 되어 있느데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어떤 것이든 태생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진보적인 경향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민족주의를 배척하였다.
프랑스인에게 민족은 없다. 개인이 중요하지 누구의 피를 받아 태어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 땅에 태어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땅에 태어나지 않았어도 5년 이상 학교교육을 받은 뒤에 프랑스 사회의 일원이 되겠다고 선언하면 프랑스인이 될 수 있다. 요컨대 독일에선 독일인들이 독일 사회를 만들고 있다면, 프랑스에선 프랑스 사회가 프랑스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팀 축구선수 중에 원래 프랑스 출신 선수는 서넛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흑인, 아랍인, 칼레도니아인, 바스크족, 중앙아시아계 아르메니아인 등 이방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다. 극우파 국민전선이 "그게 무슨 프랑스 국가대표팀이냐! 세계에서 용병들을 모아 놓은 것이지"라고 떠들어댈 만도 했다. 선수 중에 식민지 칼레도니아 출신인 크리스티앙 카랑뵈는 자기 민족의 독립을 원한다는 뜻에서 경기 시작 전에 다른 선수들이 '라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열심히 부를 때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반국가적 침묵 시위는, 그러나 팀에서는 물론이고 프랑스의 여론에서도 용납되고 있다. 개인이 우선이고 개인의 자질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개인이 프랑스 삼색기의 유니폼을 입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1968년 5월 학생혁명 때 파리 10대학 학생으로서 다른 학생들을 지휘했던 다니엘 콘벤디트는 독일인이며 유태인이다. 외국인인 그가 프랑스 학생들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땅이었기에 가능했다. 출신이 어떻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통솔력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프랑스 학생들은 다니엘 콘벤디트에게 "너는 독일인이고 유태인이니까 조용히 있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일로 추방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반발하여, "우리는 모두 유태인이고 독일인이다!"라고 선언하여 그가 추방되는 것을 막았다. 이와 반대로, 독일 땅에서 프랑스 학생이 학생운동을 이끈다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독일 학생들은 외국인에게 아무리 지휘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 콘벤디크가 1999년 6월에 실시되는 유럽의회선거에서 프랑스 녹색당 후보리스트 1번이 될 수 있는 것도 프랑스 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럽연합(EU)인은 어느 나라에서든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할 수 있어서 생긴 일이다. 그러나 다니엘 콘벤디트의 예와 반대되는, 즉 프랑스인이 독일 녹색당의 리스트 1번에 영입되는 일은 영구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1번은커녕 아마 10번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다. 이 점에서도 프랑스는 프랑스인보다 프랑스 사회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가 깨지면서 낳은 두 개의 기형아
연전에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는 18가지 이유> 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한국이 굳이 일본을 따라잡아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한테 한국이 프랑스를 따라잡을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말하라면 우선 프랑스인들의 창조적 개성을 들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집단의 단결력'보다 '개개인의 능력의 총합'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 가설이 맞는지는 앞으로 독일과 프랑스를 비교, 관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집단의 단결력을 보다 더 중시했고 프랑스는 각 개인들의 능력과 창의력을 살려왔다. 이 점에서 이번 프랑스 축구팀의 월드컵 우승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나라 국민이 창조적인 개성의 국민이 되고자 한다면 우선 집단주의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집단주의인 지역주의를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실 한국 당의 지역주의는 독일식 민족모델도 가로막고 프랑스식 개인모델도 가로막고 있는 한국 사회의 암)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의 우리에겐 프랑스식 개인모델뿐만 아니라, 독일식 민족모델도 함께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쪽에선 민족주의로, 다른 한쪽에선 개인주의로 밀어붙여 지역주의가 설 자리를 없애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프랑스인들 앞에서 내가 방어하고자 했던 한국의 민족주의는 실상 분단과 전쟁으로 여지없이 깨진 지 반세기를 넘겼다. 우리는 흔히 단일민족을 내세우고 한국적 민족주의니 하면서 민족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민족주의는 알맹이도 없고 구호뿐이어서 북한에 대하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교포, 중국 교포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나듯 실제 동포를 생각하고 도와주는 일에는 독일인들의 근처에도 가지 못할 만큼 아주 초라하고 볼품없는 것이다. 또 이것은 허술한 민주주의와 연계된 것으로서 재외 국민에게 투표권도 주지 않고 있다. 웬만한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뒤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민족주의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는데, 그 자리에 민족주의가 깨지면서 낳은 두 개의 기형아가 대신 들어앉았다. 첫째 기형아는 극우반공주의이고, 둘째 기형아는 지역주의이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극우반공주의는 분단 후 처음으로 미미하나마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집만, 지역주의는 오히려 기세를 더하고 있다.
두 기형아는 공생관계에 있고 보완관계에 있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의 '지역주의 부추기기'는 극우반공주의의 약화에 따른 힘의 열세를 지역주의로 강화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역주의를 척결하지 않으면 극우반공주의는 언제나 다시 돌아와 아직 허약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다. 또 역으로 극우반공주의를 척결하지 않으면 지역주의 또한 끈질기게 극성을 부릴 것이다. 나에게 우스갯소리를 한 가지 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이런 얘기를 할 것이다. 나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보수라는 사실과 TK가 아니라는 사실말고는 그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두 가지 더 알고 있는데, 하나는 각종 바람-총풍, 세풍, 지역품-으로 부러진 대쪽이 되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나의 선배가 된다는 것이다). 또 한나라당의 김윤환 씨도 보수인데 TK라는 사실말고는 그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
나는 오늘날 프랑스의 영향력있는 정치인들의 국가관, 정치철학, 가치관 등에 대하여 웬만큼 알고 있다. 비록 멀리 있지만 나는 한국신문들을 구독하고 있고 열심히 읽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정치인들의 인생관, 민족관, 국가관, 정치철학 등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보수라는 점과 TK, PK, 충청이니 하는 출신 지역만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독자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이회창 씨나 김윤환 씨 그리고 다른 정치인들에 대하서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인생관, 민족관, 국가관, 정치철학의 한 조각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손들어 보시라!"고.
이 현실은 실상 우스운 게 아니라 서글픈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한국의 정치인들은 지금까지 모두 보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수란 그 실상에서 극우반공주의와 큰 차이가 없다. 요컨대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인들은 인생관, 민족관, 국가관, 정치철학에 대한 검증없이 정치인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오직 한국논단과 조선일보가 요구했던 사상 검증, 즉 극우반공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만 검증되면 되었다. 즉 오늘날까지 한국 정치인의 자격 요건은 한국의 민족주의가 깨지면서 낳은 두 기형아인 극우반공주의와 지역주의에 영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한국의 정치가 실종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프랑스식 개인모델이나 독일식 민족모델을 취하고자 한다면 우선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의 정치판을 지배해온 극우반공주의와 지역주의를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정치판이 이런 상태로 남아 있게 된 되에는 동의하고 있다. 개인주의는 어쨌든 지역이기주의를 깨부수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구촌이니 세계시민이니 하는 소리를 하며 이른바 세계화 주장을 부추기고 있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세계시민은 '세계사회'를 상정하지 않고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사회도 사회인 만큼 힘의 논리, 지배, 피지배의 논리가 작용한다. 세계화 주장이나 영어공용화 주장은 이 논리를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려는 데서 나온, 우리가 경계해야 될 소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사회통합은 사회정의로
그러면 개인주의자들이 모인 프랑스 사회에서 사회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어떻게 갖가지 모습과 서로 다른 개성을 갖고 있는 동물들이 한 동물농장 안에서 화합하여 살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에는 독일처럼 민족도 없고 영국처럼 구심점이 될 여왕도 없다. 프랑스대혁명은 구심점이었던 왕을 없야버렸다. 프랑스에서 대혁명 이후에도 다른 데선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사회투쟁이 격력하게 벌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피를 흘리면서 프랑스 고유의 공화주의 전통을 살찌웠으며, 사회통합의 가장 중요한 고리로서 '사회정의'를 쌓아 올려왔다.
한국도 공화국이지만 그 공화국에는 역사성이 없다. 지금 한국이 제6공화국인지 제7공화국인지 부끄럽게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 그 숫자가 반영하는 것은 다만 권력자 마음대로 헌법을 바꾸었던 것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고 내용도 없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내가 부끄러워할 까닭이 별로 없다.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태동한 이래 제2, 제3공화국 등이 되었을 때마다 그것들은 모두 사회투쟁의 결과물로서였다. 즉 프랑스의 공화국에는 공화주의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
공화국에 역사성이 담겨 있고 없고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예컨대 몇 년 전에 김영삼 대통령이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활동을 가리켜 '국가전복기도'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프랑스였다면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공화국의 대통령은 "짐이 곧 국가다"라고 했던 루이 14세가 아니다. 프랑스에서 국가는 전복되는 게 아니다. 체제가 바뀌고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뿐이다. 국민이 그것을 바라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왔다. 공화국이란 게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것이다. 한국도 헌법 제1조에 밝혔듯이 공화국인데 그것도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에서는 공화국 개념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도 이 말을 사용한다. 예컨대 자크 시락은 '프랑스의 대통령' 이라고 말하지 않고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를 이해하려면 프랑스의 공화주의 전총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핵심 요체는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곧 사회정의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이기주의를 경멸하고 서로 연대하는 개인주의자가 될 수 있는 배경은 이와 같은 공화주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공화주의 전통의 요체이며 사회통합의 가장 중요한 고리인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라는 화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