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현주는 서울역에서 재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 몸이 비에 젖은 현주는 약간 떨고 있었다. 두껍게 입고 나오지도 않은 현주는 비에 젖은 와이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지나가는 남자들이 그런 현주를 힐끗거리는 것이 보였다. 현주는 어서 빨리 재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주야."
역 입구에서 재호가 나타났다. 한가득 배낭을 매고 있는 재호는 과연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 온 것 같았다. 현주와 재호의 비자와 이모님의 초청장, 그리고 약간의 입을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이제는 현주가 다이아몬드를 찾는 일만 남았다. 그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둘이서 영국으로 간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현주는 추위에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면서도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만큼의 불안도 느꼈다. 평생에 이토록 절실한 희망이 눈앞에 보이는 때가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불행 속에서만 뒹굴어온 것이 현주의 삶,
선택받은 자의 삶이었다.
현주는 아직 재호에게 다이아몬드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다이아몬드는 현주가
직접 찾을 작정이었다. 물론 재호를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는 경우 재호마저 그 위치를 알고 있게 된다면 재호 역시 위험해지는 것이었다. 현주는 그것이 싫었다. 재호 역시 현주의 그런 맘을 이해했다.
"마산행 기차표를 끊었어."
재호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기차표 두 장을 꺼냈다. 오늘 밤 안으로 마산으로
간 다음 그 곳에서 '장위사'를 찾아 다이아몬드를 찾은 후 영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제 이 땅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정확히 하루 정도
남은 것이었다.
떨고 있는 현주를 본 재호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현주의 어깨에 얹어주었다. 현주는
이제 몸이 좀 따듯해지는 듯 했다. 사실 몸은 아까부터 추위에 떨었지만, 마음속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희망으로 끓어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현주와 재호는 나란히 승강장으로 향했다.
출발을 기다리며 조용히 서 있는 밤기차에 올라탄 둘은 열차표에 적혀진 번호표를 보고 둘의 자리를 찾아갔다. 객차 안은 반이 채 차지 않은 상태였다. 재호는 현주에게 창가 쪽 자리로 들어가라고 했다. 현주는 재호의 말대로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비 내리는 야경이 창 밖으로 태평스럽게 보였다. 이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현주는 새삼 감상에 젖어들었다. 스무 해 남짓을 살아온 서울. 그 중 반은 어느
알지 못할 기관에서 끔찍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왔다. 현주는 아직도 그 기관의 위치가
어딘지 알지 못했다. 그곳으로 들어갈 때에는 물론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을
하지를 못했지만, 나올 때 역시 눈을 가리고 빙빙 둘러서 나오는 바람에 그 곳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었다.
이제는 마지막이라면 약간은 섭섭한 마음도 들 법하건만 현주에게는 그런 마음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오직 이제는 벗어난다는 해방감만이 있을 뿐. 기관을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의 하얀 건물들, 하얀 복도, 하얀 바닥, 정원에 있는 만지지
못하는 꽃들, 어느 것 하나 그리운 것은 없었다. 언제고 다시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주를 수렁에서 구해주는 것은 언제나 우연이었다. 재호를 만나서 이런 일을
겪게 되고, 그 바람에 그것이 다시 전환점이 되어 이 지긋지긋한 땅을 떠나게 되었듯,
기관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한 우연 때문이었다. 아직은 어리고 적응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흉기에서 기억을 읽는 일이 그다지 잦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물건에서 기억을 읽는 능력을 지닌 사이코메트리가 기관에 몇 명 정도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 사람들이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미해결 사건이 많았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현주가 약간은 여유롭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현주가 어리기
때문이었다. 너무 일찍 정신이 돌아버리거나 자살을 기도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는 견딜만하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1주일에 한 번이나 2주일에 한 번 정도 그런 끔찍한 기억을 읽고 나면, 나머지 나날들은 그나마 행복하게 지나갔다. 현주는 평소에
갖은 기억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 시간이었다. 기관 내에 있는 정원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정원 내를 산책하는 일은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시간만큼만 허용되는 일이었다. 선생님의 철저한 감시 속에 산책 또한 이루어졌고, 정원에 피어있는 꽃 하나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현주는 정원의 외곽 쪽, 그러니까 기관의 높다란 담 근처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구슬이었다. 목걸이나 팔지 같은 것의 끈이 떨어지면서 흩어진 구슬 같기도 했다. 나무로 만든 작은 구슬이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었지만 기관
안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작은 물건 하나도 떨어져 있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운영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주는 산책을 하는 내내 그 구슬을 어떻게 하면 주울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딱히 탐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관이 놓쳐버린 그 작은 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꽃잎이 떨어졌어요."
현주는 일부러 꽃잎을 줍는 척 허리를 숙이려고 했다. 세 걸음쯤 떨어져서 쭉 현주를
감시하며 따라오던 선생님은 얼른 현주의 팔을 잡아챘다. 현주를 살짝 뒤로 당겨내고는 떨어진 꽃잎이 어디에 있는지 바닥을 살펴보았다.
"저리로 날아갔는데."
현주는 다른 쪽을 손가락질했다. 선생님은 몇 걸음 걸어가며 바닥을 살폈다. 현주는
선생님이 자신에게 눈을 뗀 짧은 순간 아주 빠른 동작으로 바닥에 떨어진 구슬을 집었다. 현주의 동작이 워낙에 빨라 선생님은 현주가 그것을 주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현주는 구슬을 손안에 꼭 쥐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을 죽일 때 쓴 흉기들에서
나오는 기억들 못지 않은 무시무시한 기억이 담겨 있었다.
소년은 이제 막 코밑에 거뭇거뭇 수염이 돋는 정도의 나이였다. 소년의 얼굴을 창백하고 언제나 겁에 질려있었다. 그리고 그의 팔목에는 작은 구슬이 꿰어진 팔찌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방으로 불려갔다. 소년은 눈을 가리고 의자에 묶여 있는 덩치가 산만한 남자의 뒤로 걸어갔다. 남자는 뚫린 입으로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이 시발 새끼들. 지금 뭘 하자는 거야! 내가 누굴 죽였다고 그래! 증거가 있으면 가지고 와 보라구. 이런 개새끼들. 지금 누굴 모함하는 거야! 내가 나가기만 하면 너희 새끼들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 버릴 거야!"
소년은 와들와들 떨며 남자의 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소년의 뒤에는 또 다른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따라가고 있었다. 소년은 묶여 있는 남자의 뒤에 서서 남자의
등에 살짝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소년은 자신이 본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내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고, 시체를 어디에 파묻었는지, 범행도구는 어디에 버렸는지 등등. 소년은
그렇게 스물 네 시간을 거의 다 두려움에 떨면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는 결국 탈출을
결심했다.
한밤 중, 자신의 방을 탈출해서 밖으로 나온 소년은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그리고는 그 높다란 담벼락에 침대 시트를 뜯어서 만든 로프를 던져서 걸었다. 소년이 거의 담을 다 넘어갈 무렵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관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서치라이트가 번쩍이며 온 담벼락을 훑었다.
소년은 담 위로 올라섰다. 담 위에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소년은 철조망을 피하기 위해 담 위에서 두 발을 듣고 수직으로 점프를 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담 아래로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년의 한쪽 팔이 철조망에 스치면서 팔목에 걸려있던 구슬로 된 팔찌의 실이 끊어졌다.
현주는 자신도 그런 처지가 될 것을 알아차렸다. 점점 기억을 읽는 횟수는 늘어났고,
악몽 같은 장면들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현주의 머릿속을 스쳐가기 시작했다. 현주는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점점 틀린 증언들을 내어놓았다. 읽은 기억의 내용을 일부러
틀리게 말을 함으로써 기관 사람들이 현주의 능력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현주가 사춘기가 되어 첫 생리가 끝나던 날, 현주는 마침내 자신이 완전히 능력을 잃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런 연극만으로 기관을 빠져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주는 더 큰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다.
현주는 기억을 더듬어 낼수록 더 큰 괴로움을 느꼈다. 제발, 그 일은 생각지 말자. 현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재호를 쳐다보았다. 그래 이제는 이 남자를 믿자. 이 남자는 나의 모든 불행을 한 번의 포옹으로 저 멀리로 보내버릴 수 있겠지. 이제는 이 남자와 행복하고 싶다.
첫댓글 현주는 재호를 다 믿는 건가요? 왠지 재호쪽에서 일이 터질듯 싶기도 한데.
불안감.. 절대 재호가 다이아몬드앞에서 변하는일이없길 ㅜ_ㅜ 현주 불쌍해요. 담편 기다리구이써엽~
재호네 부모님이 위험해지면 어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