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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갈석산의 위치 및 황하와 해안선의 시대별 변화 |
‘황하의 흐름 및 해안선 지도(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참조)’는 시대별 황하의 흐름과 해안선을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도이가 배를 타고 황하로 들어가던 4,000여 년 전의 상황을 현대 지도에 표시해 보았다(고대황하의 흐름은 ①번 B.C 602년 이전, 고대해안선은 진秦나라 시대 해안선을 표시). 발해만에서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에는 자그마한 야산들이 줄지어 선 가운데 해발1,105M의 낭아산(狼牙山, 지도에서 갈석으로 표기)이 홀로 우뚝 솟아 있음을 볼 수 있다. 험난한 항해의 이정표로 삼기에 넉넉한 규모이다. 이 갈석산(낭아산)의 주산이 왼쪽의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으로 지도에서 붉은 선 사각형의 정중앙 교차점에 위치한 산이다.
(2)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 등의 고지도로 보는 갈석산
* 모든 지도는 다음블로그/향고도/중국고지도(http://blog.daum.net/sabul358)를 참조하였다.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남송, 1209년 작) 및 우공구주산천지도(남송, 1185년 작)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로 손꼽히는 남송시대『우공구주산천지도』,『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 『기주협우갈석도』등에 갈석산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고대 중국인들이 생각한 갈석산은 구하(九河, 황하가 하류에서 아홉 갈래로 갈라지므로 구하라고 함)의 위쪽에 위치했다. 특히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는 항산恒山과 항수恒水와 위수衛水를 통하여 갈석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서경』 ‘우공84장’에 나오는 구절을 보자.
“견산을 인도하여 기산에 미치고 형산에 이르며, 황하를 넘어서 호구와 뇌수로부터 태악에 이르며, 저주와 석성으로부터 왕옥에 이르며, 태행산과 항산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導岍及岐至于荊山 逾于河 壺口雷首至于太岳 底柱析城至于王屋 太行恒山至于碣石 入于海)”
우임금이 황하를 다스리는 내용인데, 황하가 태행산과 항산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위 구절의 항산恒山에 관하여 『서경』의 편찬자인 채침은 해설하기를 ‘항산은 『지리지』에 상산군 상곡양현 서북쪽에 있다하니 지금의 정주 곡양이다.(恒山 地志 在常山郡上曲陽縣西北 今定州曲陽也)’고 하였다. 또 중국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등을 참조하면 항수恒水는 현재의 당하唐河이고, 위수衛水는 현재의 대사하大沙河의 지류이다. 그러므로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나타난 항산恒山은 지금 중국지도에 나타나는 태백산이다. 이 태백산은 예로부터 항산恒山, 상산常山, 기산箕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그렇다면 지도에서처럼 황하의 바로 위쪽이고, 항산(태백산) 오른쪽에 위치한 갈석산은 어떤 산인가? 오직 백석산白石山이 있을 뿐이다.
중국지도집(1975년 작) 및 기주협우갈석도(남송, 1177년 작)
또 다른 남송시대의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를 보자. 갈석산 주변의 위치를 자세하게 나타내고 있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옮겨놓은 것이 위의 지도이다.(노란색은 장성이며 빨강색 점선은 필자가 생각하는 연장성) 참고로 『기주협우갈석도』는 좌우가 남북으로 그려진 것이므로 왼쪽으로 90도 회전하여 보아야 필자가 현대지도에 옮긴 것과 같아진다. 우리가 상고사를 공부할 때 항상 어려움을 겪는 것이 연나라가 설치하였다는 연5군, 즉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위치문제이다. 『기주협우갈석도』는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당시만 하여도 요수遼水의 위치가 지금의 조백신하朝白新河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도의 발해 가운데 다음과 같이 갈석을 자세하게 설명한 글이 있다.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ㆍ역수ㆍ탁수ㆍ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 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마치 내가 배를 타고 항해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자세한 설명이다. 요수 등으로부터 발해로 들어와서 서쪽으로 해변을 따라 항해하면 저 멀리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황하 하구와 우뚝 솟은 갈석산이 정면에서 다가오고, 마침내 갈석산을 오른쪽에서 끼고 돌아 황하로 들어서는 모습이 눈에 보이듯이 너무나 선명하다. 『기주협우갈석도』의 그림이 참으로 절묘하다.
(3)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
지금까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공 갈석을 살펴보았고, 그 갈석산이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임을 살펴보았다. 이제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갈석산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사기』‘하본기夏本紀’에 나오는 구절이다.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鳥夷皮服 夾右碣石入于海)”
위에서 『서경』‘우공편禹貢篇’에서 살펴 본 구절과 같은 내용이다. 마지막 글자인 해海가 『서경』‘우공편禹貢篇’에서는 하河로 되어 있으나, 고대에는 황하 하류가 넓어서 바다와 구분이 되지 않아 황하를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으므로 같은 뜻이다. 우리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한 평범한 이 구절이 『사기색은』의 다음과 같은 해설로 우리 역사의 최대 이슈로 등장하게 된다.
“『지리지』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려성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인 듯하다.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 아니다.(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非北平之碣石)”
갈석산에 대하여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구절이다. 지금 여기서는 그 수많은 논란들을 잠시 접어두고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는 구절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진정한 갈석산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논란들이 아침 안개가 걷히듯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갈석산이 있다는 낙랑군 수성현은 어떤 곳인지 몇 가지 사료를 살펴보고 그 위치를 알아보자.
① 『사기색은史記索隱』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② 『진晉서지리지』 낙랑군조
“낙랑군은 한나라가 설치했다. 6개현을 다스리고 3,700호이다. 조선현(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루방현, 사망현(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朝鮮 : 周封箕子地。屯有。渾彌。遂城 : 秦築長城之所起。鏤方。駟望)”
③ 『무경총요武經總要』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④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 1년 이목장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나라 남쪽 탁군의 북쪽에 신성이 있다.’고 했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고 했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치소는 부산釜山촌이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25리에 있다.(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 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당토명승도회 및 아세아동부여지도 |
위에서 『태강지리지』와『진晉서지리지』는 모두 진晉나라 시절의 낙랑군을 말하고 있다. 낙랑군에 기자를 봉한 조선현이 있고, 만리장성이 일어난 수성현이 있다는 것이다. 『무경총요』는 북송 때 전쟁에 관한 사항을 기술한 책(1044년 작)이며, 『태평환우기』는 979년 송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편찬한 지리지이다.
『무경총요』와 『태평환우기』는 수성현의 내력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수성현이 전국시기 연나라 무수武遂현이며, 진秦나라의 장성이 일어난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성현의 동쪽에는 안숙安肅이 있고, 수성현 서쪽 20리에 장성이 있다고 하였다. 또 수성현에 부산釜山촌이 있으며, 현의 서쪽 25리에 수성산이 있는데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이라 했다.
연장성(?)지도 및 중국지도집 |
이제 지도들을 보자. 위의 지도들은 모두 자형관紫型關과 수성현(무수현 또는 부산)을 중심으로 표현하였으며, 파랑색 선은 진나라 장성이 축조될 당시의 해안선을 나타낸 것이며 노란색 선은 세 번째 지도의 장성을 각 지도에 표시하였다. 우선 청나라 때 당나라 시기 지명을 고증하여 작성한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를 보자. 부산촌(釜山村, 수성현의 치소) 동쪽에 안숙安肅이 있고, 그 서쪽에 용산(龍山, 수성산)이 있어서 『무경총요』와 『태평환우기』의 기술이 정확함을 알 수 있다. 또 위 4개의 지도를 통하여 수성현이 무수현이며 부산촌임을 알 수 있고, 갈석산이 낭아산狼牙山이며 수성산이며 용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차츰 알게 되겠지만 위의 지도에서 만성滿城으로 표시된 곳이 낙랑군 조선현으로 위만조선의 도읍지이며, 단군조선의 왕검성이 있던 곳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사항은 수성현이 왜 진秦나라 시기 장성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해안선의 변화에 그 답이 있다. 진秦나라 시기 해안선이 수성현까지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수성현의 지리적 중요성을 살펴보자.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은 험준한 태행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가로막아 교통을 차단하고 있다. 그리하여 산서성 북부에서 하북성 북부로 많은 군사를 움직일 만한 곳은 백석산(갈석산)에 위치한 자형관紫型關과 북경 서북쪽의 거용관居庸關 밖에 없다. 이 중 거용관은 너무 북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고대에는 위의 지도에서 표시한 백석산(갈석산)의 자형관紫型關이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 할 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하북성 중남부에서 하북성 북부로 통하는 길목에는 험준한 백석산(갈석산)과 발해만이 가로막아 호리병 입구처럼 좁다란 통로를 형성하고 있던 곳이 바로 수성현이다.(『아세아동부여지도』참조) 그러므로 백석산(갈석산)에 위치한 자형관紫型關과 수성현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산서성과 하북성 중ㆍ북부의 주인이 결정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갈석산은 중국의 아홉 황제가 올랐다고 하여 구등황제산九登皇帝山으로도 불린다. 갈석산에 오른다는 것은 곧 대륙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의 수많은 황제들이 오르기를 간절히 꿈꾸었던 유명한 산이었다.
위 지도에서 3번째 지도는 ‘연燕 소공召公의 장성’ 이라 소개된 장성이다. 저 장성이 연나라 장성인지 진나라 장성인지 또는 다른 나라 장성인지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출처: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no=13345)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진秦나라 또는 그 이전의 장성이라면 당시의 해안선이 수성(수무)현 근처까지 올라왔으므로 수성(수무)에서 왼쪽의 장성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 수성(수무)현에서 출발하여 왼쪽으로 백석산(갈석산)을 휘감고 자형관과 당하를 넘어 태백산을 지나고 안문과 황하를 넘고 섬서성을 지나 감숙성 임조臨洮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모든 사서들이 낙랑군 수성현에서 장성이 일어났다고 한 까닭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성(수무)현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장성은 진秦나라 이후의 장성이며, 해안선이 동쪽으로 점점 물러남에 따라 조금씩 연장되어서 지도와 같은 장성이 완성되기까지 수백 년의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하는 장성이다. 그러므로 저 장성은 어느 한 왕조의 장성이 될 수 없으며, 수많은 왕조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흥미진진한 장성이다. 해안선이 동쪽으로 물러남에 따라 각종 지명들도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4) 갈석산은 우리 상고사의 북극성과 같은 존재이다
지금까지 긴 글을 통하여 갈석산은 중국의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며, 좁은 의미로는 백석산 동쪽의 한 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임을 밝혔다. 이 백석산이 『서경』에 나오는 진정한 우공갈석이며, 이곳에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 있었으며, 장성이 시작된 곳이며, 한 때 중국과 고구려의 경계였다.
그러면 갈석산의 위치에 대하여 왜 그토록 수많은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황하의 흐름과 해안선이 시대에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은 장성이 시작되었고, 구등황제산九登皇帝山이라 부를 만큼 너무나도 유명한 산이라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별로 황하의 흐름이 바뀌자 사람들은 자기시대의 황하 하류 바닷가에서 새로운 우공갈석을 찾게 되었고, 갈석산이 두 개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역사서의 갈석산 기록들을 읽으면 모두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이며, 아주 유용한 정보가 가득함을 알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서의 두 구절을 살펴보자.
① 『사기색은史記索隱』
“『지리지』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려성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인 듯하다.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 아니다.(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非北平之碣石)”
『사기색은』의 저자 사마정은 8세기 초반의 당나라 시대 사람이다. 이때는 황하가 본래의 우공갈석인 백석산으로부터 수 백리 떨어진 곳으로 흘렀다. 사마정이 갈석산을 두 개로 인식하는 순간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는 우공갈석을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아닌 새로운 갈석산(사마정 당시 황하 하류에 존재)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 아니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비단 사마정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황하 흐름의 시대별 변화를 몰랐던 고대 사람들은 누구나 사마정과 똑같은 착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마정이 착각하여 쓴 내용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역사의 미아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북평군 려성현 서남쪽이며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이 본래 우공갈석이며,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 있는 갈석산은 『수경』의 저자와 사마정이 착각한 새로운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② 『통전通典』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에 있다. 지금 북평군 남쪽 이십 여리의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통전』의 저자인 두우(서기 735~812)도 당나라 시대의 사람이다. 두우도 사마정과 같은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우의 글을 읽어보면 두우가 왜 착각에 이르게 되는지 잘 알 수 있다. 『상서』에서 말하는 우공갈석은 황하 하류의 바다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은 이미 1,000여 년 전부터 황하가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좌갈석으로 생각하였다. 지형상 황하가 본래의 갈석산(백석산)보다 더 왼쪽으로 흐를 수는 없으므로 새로운 갈석산은 반드시 본래 갈석산 오른쪽에 생길 수밖에 없다.(중국측에서 바라본 방향) 그러므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은 마침내 좌갈석으로 자리잡고 새로운 갈석산은 우갈석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통전』의 위 기록은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갈석산에 대하여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위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두우는 직접 갈석산(백석산)을 방문하여 장성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지금 갈석산(백석산)에서 장성이 동쪽으로 강물을 끊는 곳은 복마관伏馬關과 자형관紫型關 부근 밖에 없다. 그러므로 두우 당시 복마관을 흐르는 당하唐河 또는 자형관을 흐르는 거마하拒馬河가 요수遼水였다. 당나라와 고구려가 갈석산(백석산)을 경계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조서에서 ‘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불경하여,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고 말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경』의 우공갈석은 오직 백석산 하나뿐이며, 나머지 황하 하류의 해변에 위치한 다른 갈석산들은 모두 착각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주 생뚱맞은 갈석산이 하나 있다. 지금 난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다른 갈석산들은 비록 『서경』에서 말하는 진짜 우공갈석은 아닐지라도 황하 하류의 흐름이 변한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착각이 빚어낸 것으로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그리고 나름 우리에게 아주 유용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황하의 흐름과는 전혀 무관한 현재 난하 부근의 갈석산은 생뚱맞다 못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어느 시기엔가 진짜 갈석산(백석산) 주변의 창려, 험독, 노룡, 당산, 북평, 낙랑, 평주 등의 지명들이 갈석산과 더불어 풀 세트로 현재의 난하 방면으로 옮겨졌다. 고대판 동북공정이 벌어진 현장이다. 이 가짜 갈석산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그 정체를 밝힌다.
① 『서경』의 우공갈석은 반드시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있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갈석산은 모두 불순한 의도를 가진 가짜 갈석산이다.
진짜 갈석산(백석산) : 하나라 우임금 당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었다.
가짜 갈석산(난하부근) : 황하의 흐름과 전혀 관련이 없다.
② 갈석산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진짜 갈석산(백석산) : 지금도 백석산에는 만리장성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다.
가짜 갈석산(난하부근) : 장성이 없다. 다만 100여리 북쪽으로 장성이 지나갈 뿐이다.
③ 갈석산은 중국과 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경계가 되는 산이었다.
진짜 갈석산(백석산) :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를 이루는 웅장한 산으로 나라 간의 경계가 되기에넉넉한 규모이다.
가짜 갈석산(난하부근) : 경계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이다. 더구나 서쪽에 난 하가 있어 나라 간의 경계가 되려면 난하가 되었을 것이다.
갈석산은 『서경』에서 기록된 것처럼 하나라 우임금 당시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하며, 『태강지리지』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들이 언급한 것처럼 장성이 시작된 곳이어야 하며, 중국과 고구려의 경계가 되었던 산이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을 모두 구비한 갈석산은 오직 중국의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 하나뿐이다. 나머지 각 시대별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은 착오에 의한 우갈석들이다. 그리고 황하의 흐름과 무관한 갈석산들은 역사왜곡을 위한 가짜 갈석산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갈석산(백석산)은 우리의 상고사를 공부하는데 너무나 중요하다. 다른 수많은 지명들이나 유물들은 인위적인 변경이 가능한 것으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 반면 갈석산은 유사 이래로 그 지명이 옮겨진 적이 없는 황하를 배경으로 하므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에 넉넉하다. 갈석산은 나침반도 없이 상고사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우리들에게 북극성과 같은 존재이다. 그 갈석산의 넉넉하고 아늑한 품속과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발해만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고조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