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다니엘 9,4ㄴ-10
루카 6,36-38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 말씀은 깊은 절망감과 우울감으로 가득한 요즘 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요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시면서, 어찌 이리 큰 참담함과 혹독함을 체험하게 하시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님이십니다.
그분 마음속을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다니엘 예언서 9장 8절)
지난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할 순간인 듯합니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더 유심히 내 발밑을 내려다봐야 할 때입니다.
더 부끄럽게 되지 않기 위해 더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부디 너무 우울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초기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같아서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로 극복이 가능합니다.
규칙적인 운동, 산책이나 등산, 마음 비우기 작업 등이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 극복하기 힘겨울 때는 의사나 전문가의 진단에 따른 처방과 치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의(名醫)이자 주치의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다가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 보니 실망이란 단어가 자리 잡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실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결국 실망을 불러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실망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망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지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망했을 때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우울증으로 진전되도록 방관하지 말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하느님 자비의 강물에 흘려 보내는 일이야말로 우울증 치료에 최선책임을 강조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한다.”
(이사야 43장 18~19절)
한편 다윗 임금은 자신에게 다가온 우울증이 하느님 은총과 자비 안에서 완치되었음을 크게 외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3장 5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조차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태도입니다.
암담하고 울적할수록 주님께 매달려봐야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향후 5년간을 대 피정 기간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뉴스도 끊기로 했습니다.
대신 더 깊이 복음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더 깊이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더 인간다운 세상, 더 의로운 세상, 더 복음적인 세상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연대할 바가 무엇인가,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완전한 용서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
복음: 루카 6,36-3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들어본, “뿌린 대로 거둔다.” 법칙입니다. ‘부메랑’ 법칙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법칙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앙으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불편한 상황을 잘 그려냈습니다. 회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남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심판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부터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려워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솔직함입니다. 타인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것을 쉽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이웃도 아니요 하느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할 때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심판하는 내 안의 심판자,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자아는 ‘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나를 심판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 나오는 아라곤은 왕국 곤도르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조상이었던 이실두르가 사우론에게서 ‘절대반지’를 빼앗고도 끝내 파괴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실두르의 그 선택은 훗날 사우론이 다시 힘을 키우는 빌미가 되었고, 후손인 아라곤은 “나도 언젠가 조상처럼 약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자격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스스로 “내가 왕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힘을 발휘하면, 혹시 조상 이실두르처럼 반지와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자기 정죄가 쌓여서, 아라곤은 왕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조차 뿌리 깊이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지 원정대에 함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두려움과 조상의 죄책감을 이겨 내기 시작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과 동행하는 동안, 아라곤은 단지 무력이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용기와 헌신으로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과는 달리 “절대 반지의 악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없애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동료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는 반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반지를 지닌 프로도와 그 곁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숱한 전투와 유혹 속에서도 ‘반지의 힘을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 냅니다.
결국 그는 “이실두르가 실패했던 과제를 후손인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인간과 엘프, 호빗과 드워프가 하나 되는 연대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사우론의 군대를 상대로 과감히 전쟁을 걸고, 자신의 힘을 다해 동료들을 지켜 내는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조상의 잘못된 길을 밟을까 두려워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반지가 결국 파괴되고 사우론의 권세가 무너져 내렸을 때, 아라곤은 마침내 스스로 “나는 조상과 다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완수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말로 아라곤은 ‘엘레사르’라는 이름을 받아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과거의 경험과 겸손을 잊지 않으면서 백성과 중간계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훌륭한 통치자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가리려는 노력을 멈췄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련하신 용서의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또 과거의 망상이 자기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매진했어야 합니다. 그 뜻에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던 것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자아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 다른 이들을 심판하게 만들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사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민족에게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는 가장 완전한 길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격이 없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타인을 판단하면서 합리화하려고만 합니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분명 사명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들여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나를 판단하던 자아는 죽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가장 완전한 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발밑에서 계속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뱀의 소리는 그저 쐐야 쐐야 하는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게 뱀이 무력하게 될 때 나는 의로움으로 타인을 심판할 존재가 아닌 용서할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완전한 용서의 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6,36-38: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된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마을에 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계속된 가뭄에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성당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성당 한가운데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너희의 기도가 닿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이가 제단에 초를 봉헌하면 곧바로 비를 내려주겠다.”
사람들은 서로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를 봉헌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부도 수녀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들도 차마 신부, 수녀에게 초를 켜라고 하기 힘들어서, 신자들의 대표이며 믿음이 크다고 알려진 사목회장님이 등 떠밀려서 제대 초를 켜서 봉헌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제대 초를 켜서 봉헌해야 하는지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밖에 없다는 의견이 모이고 있을 때, 성당 한가운데로 한 꼬마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를 켜서 제단에 봉헌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의 복장에서 참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가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또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비가 내리길 기도하면서도 비 올 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를 하느님께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시면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또 남을 단죄하지 말고, 무엇보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있으며, 용서를 가장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온전한 신뢰는 지키기 힘들어도 그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보이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만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박경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완전함의 기준이 다름 아닌
자비에 달려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형과 형식에 준하는
의식체계에 반대하셨으며
그보다는 자비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보셨습니다.
하느님을 훔숭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른
규정과 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올바른 하느님 훔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3.17.월."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우리는
매일매일
심판에
발목이 잡혀
우리 영혼을
잃어버립니다.
심판에 빠져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묻는
은총과 용서의
사순입니다.
용서는
빛 속을
걷게 하지만
심판은 사람을
끊임없이
어둠으로
중독시킵니다.
심판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심판의
돌을 던지면
그 심판의
돌은
또 다른
심판의
돌이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심판을
끊는 것이
복음입니다.
심판은
우리 모두를
가두지만
복음은
우리 모두를
자유로이
풀어줍니다.
복음을 벗어나는
심판을 멈추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용서로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심판에 빠져있는
우리를
건져올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누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자비이고
멈추어야 할 것은
심판입니다.
되받아야 할
자비의
기쁜 날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