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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묵상글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 동해 거진 성당에서 있었던 일. 등 )
*** 08:05. 상지종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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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23. 02:12
- 동해 거진 성당에서 있었던 일
동해 거진 성당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잠 때문일까 세 시간 자고 깼습니다.
일어나 복음을 읽고 묵상을 시작하는데
왕파리 한 마리가 제 방에 들어와 왱왱대며 방을 이리저리 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불을 켰기 때문에 들어 온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낯선 곳이었기 때문인지
왜 왕파리가 한밤중에 내 방에 들어왔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파리가 제 방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왕파리가 들어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 들어 온 것입니다.
이 왕파리는 그저 왕파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신 하느님의 사신일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행진 첫날부터 하느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신 것이라고.
왕파리가 들어왔네 하고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지나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저를 지나치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이 하느님께 머물지 않고 지나치는 것일 겁니다.
‘왕파리가 내 방에 들어왔네!’가 아니라
‘왕파리가 들어왔네!’ 그저 그 정도이면
생각이 왕파리에 머물지 않고 지나치듯
하느님께서 왕파리와 함께 제 방에 들어오시고 저를 찾아오셨어도
제 생각이 하느님께 머물지 않고 얼마든지 지나쳐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놓친 왕파리가 얼마나 많고,
그렇게 놓친 하느님이 얼마나 많을까?!
하느님 말씀도 그렇게 많이 내게 오셨어도 그렇게 많이 놓쳤을 것입니다.
왕파리가 아니라 풀벌레와 함께 오셨을 때도 있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들과 함께 오셨을 때도 있고,
구름과 비와 천둥 번개와 함께 오셨을 때도 있었을 텐데 놓쳤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신 말씀도 이렇게 이해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수없이 많이 만난 남자와 여자들이
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남자와 여자들이었거나 미친년 놈들이었지
내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고
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이 하느님께 미치지 못하고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말씀과 뜻도 지나쳤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누이들을 시켜서 말씀하셨는데도
웬 여자가 지껄인 말로 지나쳐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형제들을 시켜서 말씀하셨는데도
웬 놈이 씨부려댄 말로 지나쳐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았고,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한밤중 제 방에 들어와 이것을 깨닫게 해준 왕파리가 고맙고,
하느님께 감사 기도드리는 거진 성당의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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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공자의 논어 ‘위정’ 편에는 우리가 많이 쓰는 나이대별 한자가 나옵니다. 열다섯이 지학(학문에 뜻을 둠), 서른이 이립(뜻이 확고하게 섬), 마흔은 불혹(인생관이 확립되어 마음에 혼란이 없음), 쉰은 지천명(하늘의 뜻을 알게 됨), 예순은 이순(귀가 순하게 됨. 남의 말을 받아들임), 일흔은 종심소유불유구(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음)가 그것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 나이 때 그런 삶을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천명을 넘어 이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하늘의 뜻도 잘 모르는 것 같고 또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제 말만 하려는 꼰대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공자 시대보다 지금의 기대 수명이 훨씬 늘어났으니, 공자에 나오는 나이에 ‘20’씩은 더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위안입니다. 하지만 변화를 무서워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있다면 어른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아무런 노력 없이 나이만 늘어난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그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혈연, 지연, 학연 등을 내세워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편법을 사용해서 뇌물을 주고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주님께서 명확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정작 그 나라에 들어갈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막연한 희망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나이 들면 저절로 들어가는 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삶 안에서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혈연관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 하느님 나라에서의 가족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사랑 안에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변화하고 변화해서 주님의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가족으로 살고 있을까요? 입으로는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면서도, 사랑의 실천에는 무관심하다면 하느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쓸데없이 나이만 먹는 것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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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햇빛은 누구에게나 따뜻한 빛을 준다. 그리고 사람의 웃는 얼굴도 햇빛과 같이 친근감을 준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려면 찡그린 얼굴을 하지 말고 웃어야 한다(슈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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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
사실, “아버지의 뜻의 실행”에 대한 것은 “주님의 기도”의 셋째 청원의 내용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친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누가 이루는가? 그것은 당연히 하느님이 이루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때 사용되는 동사는 ‘신적수동태’라고 불리는 형태로, 뜻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그분의 뜻에 우리가 응답하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와 함께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를 당신 뜻을 이루시는데 협조자로 삼으십니다.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당신의 그 구원 사업에 참여시키십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요 공간인 셈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미처 헤아려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고 하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선하심’을 신뢰하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가족을 이루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우선,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곧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당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당신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으나,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당신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진정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이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말씀을 반향해줍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처럼, 무엇을 실행하는지가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 아버지의 자녀이고 아버지께 속해 있으며, 사탄의 뜻을 실행하면 사탄의 자녀이고 사탄에 속해 있으며, 자신의 뜻을 행하면 자신의 자녀이고 자신에 속해 있는 것이 됩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지금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지금 나는 누구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가? 나 자신의 뜻인가 하느님의 뜻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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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형제와 누이, 어머니를 얻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2024년 5,175만 명이랍니다. 그런데 2045년에 이르면 5천만 명 이하로 떨어진답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로 이제는 혈육으로서의 형제, 자매라는 관계도 형성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하셨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누이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시고 하늘나라의 가족관계를 새롭게 형성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8,14-15).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폐5,8).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에페5,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형제라 부르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하느님께서 나에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히브2,11-13).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사이에 형제애의 관계도 돈독히 해야 합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실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분은 생각을 바꿔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묵주반지를 끼고 신자임을 드러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생각 없이 지니고 다닌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깊은 관계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학연,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뜻을 사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자매의 관계를 확고히 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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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특별한 신호가 있습니다. 그 신호는 매일 바뀝니다. 군에서는 그것을 ‘암구호’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위병소를 지키는 군인이 상대방을 향해 ‘화랑’이라고 하면 위병소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그날의 구호를 말해야 합니다. 화랑이라는 암호에 대한 구호는 ‘담배’였다면, 담배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병소의 군인은 아군이라고 받아들이며 문을 열어줍니다. 그렇지 않고, ‘관창’이라고 말하거나,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하면 아무리 아군의 복장을 했어도 결코 위병소의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 온 사제가 댈러스 교구에서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목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받아야 합니다. 제가 속한 서울 대교구에서 저를 보증하는 서류를 보내면, 댈러스 교구에서는 서류를 받은 후에 제가 사목할 수 있다는 허가증을 줍니다. 그래야만 합법적으로 댈러스 교구에서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방법으로 ‘고고학과 고인류학’이 필요했습니다. 유골을 탐사해서 인류의 시작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고고학과 고인류학은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탐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지층이 흙에 묻히기도 하고, 지각이 융기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바다였던 곳이 육지가 되기도 하고, 땅이었던 곳이 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방법으로 ‘분자생물학’이 등장했습니다. 분자생물학은 인류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한 여인에게서 출발했음을 밝혀냈습니다. 현생 인류는 초원화 된 아프리카에서 적응하였습니다. 직립보행을 하였습니다. 털이 사라지고, 땀샘이 생겼습니다. 인류는 두 발로 걷게 되었고, 땀을 통해서 체온을 조절하였습니다. 지능이 발전하면서 의식이 생겼고, 언어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인류는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인류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종교의 기준이 있습니다. 창설자가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창설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이 창설자입니다.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창설자입니다. 유교는 공자가 창설자입니다. 경전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의 경전은 불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은 성경입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코란입니다. 유교의 경전은 ‘사서삼경’입니다. 사회성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는 사랑과 자비, 평화와 나눔을 통해서 공동선을 위해 연대합니다. 자신의 종교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이웃종교를 외면하거나 무시한다면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세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도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는 내세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은 없지만 조상에 대한 차례를 지내면서 죽은 조상과의 유대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질문에 답을 주고, 공동선을 위해 함께 연대하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암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밝히는 기준도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의 가르침과 조직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기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일까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종교가 다를지라도, 민족이 다를지라도, 언어가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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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저도, 여러분도 말이 앞서는 사람을 많이 봐 왔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을 잘합니다. 말로 하는 것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실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앞에서는 얼마나 더 말로만 기도할까요. 하느님의 기도에 대한 계약서를 쓰시는 것도 아니니 얼마나 그 기도를 파기하기 쉬울까요?
그러나 그들은 모릅니다.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공동체나 본당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가만히 보다 보면 말이 아닌 실행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그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휘와 재력과 학식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 자라에서 맡은 역할을 합니다.
주차 봉사 띠를 두르고 경광봉을 칼처럼 휘두르는 모습 안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본당 식구들이 식사하고 돌아간 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설거지 앞에서 설거지하는 뒷모습에서 발견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어머니와 형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형제와 자매’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 부릅니다. 이런 이름에 맞는 진짜 형제와 자매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자기에서 묵묵히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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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성경
한 번 더 보고 싶은 성경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성경입니다.
할머니가 보던 성경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두꺼운 표지
그 표지 위를 덮고 있는 청 테이프
빤딱빤딱한 종이 질
큰 글자와 그림만 글자 반
지금은 이런 성경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죽 표지에 얇은 종이.
멋스럽게 치장한 금장 테두리까지….
그런데 할머니가 보시던 성경이 보고 싶습니다.
그 시대 글을 몰라는 사람이 많아 그림 반 글자 반이었던 그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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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가족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주님, 저희에게 생명을 돌려 주시어,
당신 백성이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85,7)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예수님의 참가족’이었고, 이에 착안해 강론 제목은 ‘참가족,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복음의 장면과 흡사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분들의 공동체요, 우리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바로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교회 공동체입니다.
새삼 혈연血緣의 가족 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하고 주님 안에서 신연神緣의 참가족 공동체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사실 요즘 1인 가족의 증가와 더불어 혈연의 가족공동체도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형성되는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해지는 보편적 현실입니다.
지난 주일 참으로 오랜만에 20-30대 성당 청년부 13명의 피정지도를 하면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생생합니다. 인생을 일년사계로 요약하면 모두가 봄철에 해당되는 싱그러운 젊음으로 밝은 얼굴에 밝은 웃음소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젊음 자체가 축복’임을 드러내는 분위기였습니다. 대부분 가을철 인생들이 피정을 자주 오는데 이렇듯 봄철 인생을 맞이하기는 처음입니다. 청년들이 요청한 강의 주제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였고 저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공동체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공동체는 예수님 중심의 질서있는 공동체입니다. 중심과 질서가 중요합니다. 중심과 질서가 없으면 무너집니다. 그러니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어울린 공동체여야 합니다. 조화가 중요한 것이지요. 서로 맞추려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이신 예수님께 맞추세요. 그러면 저절로 다양성의 조화로운 일치가 이뤄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한계입니다. 한계를 넘지 마시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세요.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합니다. 서로간에는 거리를, 자기 분수의 한계를 알고 지키는 겸손과 예의가 필수입니다. 이래야 예수님 중심의 참 좋은 가족 공동체의 형성이자 실현입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잡힌 삶이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유독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의 삶입니다. 공동체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들이요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 가장 가까이 있는 내 공동체 삶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은 날로 커집니다. 공동체로부터 받는 상처보다는 입는 은혜가 백배는 클 것입니다. 어제 읽은 두 편의 시를 나눕니다. 벨라루스의 시인 막심 박다노비치(1891-1917)의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라는 시입니다. 공동체 삶에 지혜를 일깨워 주는 시입니다.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
다 무덤으로 향한다
뚜렷한 희망과 두려움 없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쓰고 나면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만나겠지
그리고 자신에게 묻겠지
하필이면 멀고 험한 길을 택해서
왜 모르는 곳을 향해 외롭게 걸었을까?
그리고 왜 온 힘을 들여
그렇게도 급하게 걸어 왔을까?
조용히 기어가는 지렁이도 무덤 바로 앞에서
우리를 따라 잡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
노년에 쓴 시가 아니라 25세 결핵으로 죽어가며 쓴 깨달음의 시입니다. 죽음 앞에 참으로 겸허하라는, 너무 유별나고 힘들게 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조용히 평범히 작게 살라는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시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중심의 삶의 중요성을 자각케 하는 글입니다.
어제 70년대를 풍미하면서 여전히 영원한 현역으로 활약해온 ‘아침이슬, 상록수의 음유시인 김민기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7월21일 지병인 위암으로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분의 ‘아침이슬’과 ‘늙은 군인의 노래’는 지금도 제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떨어지는 나뭇잎들처럼 세상을 떠나는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자각이 오늘 지금 여기서 현재 공동체 삶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또 하나 정현종 시인의 오래된, 그러나 유명한 단 두 줄의 ‘섬’이라는 시에서도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이 상징하는 바 누구나 염원하는 외딴곳의 쉼터이자 동시에 서로의 소통을 매개하는 모두의 중심인 구원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들 한 복판에 섬처럼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입니다. 혈연의 가족이 당신을 찾는다는 소식에 당신 주위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기준이 혈연의 피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렇다 하여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에 대한 폄훼로 오해해선 안됩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평생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데 전념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자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의 뜻 자체이신 예수님을 보고 배우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미카 예언서는 미카 예언자가 이집트에서 탈출의 구원업적을 이뤄주신 하느님을 회상하며 기도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예루살렘의 기도는, 미카의 예언은 마침내 새로운 파스카 예수님의 공동체를 통해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대변한 미카 예언자의 기도와 고백이 혼성된 간절한 청원입니다.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십시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미카 예언자의 놀라운 일들을 보여 달라는 간청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달라는 간청이 마침내 오늘 복음의 파스카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통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를 죄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공동체를 이뤄주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시편8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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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가족>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처음부터
가족은 아니었지만
당신을 따르니
가족이 되어가지요
가족이 되어가니
가족이랍니다
처음부터
가족은 아니었지만
당신을 품으니
가족이 되어가지요
가족이 되어가니
가족이이랍니다
처음부터
가족은 아니었지만
당신을 닮으니
가족이 되어가지요
가족이 되어가니
가족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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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믿음 안에서 내 어머니신 분
믿음에 둠으로써 주님의 형제가 될 수 있다면, 그분의 어머니는 어떻게 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제나 자매가 된 이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는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은 그분의 어머니가 됩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믿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가까이 왔다’(로마 13,1l)고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언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곁에 다가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설령 내가 왕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모른다면, 나는 왕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왕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모든 사람이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내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확신한다면, 나는 실제로 왕일 것입니다. 왕의 재화는 모두 나의 것이 될 것이고, 왕의 재화가 아닌 것은 나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왕일 수 있으려면, 이 세 가지 조건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세 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나는 임금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영성의 대가는 말합니다.
“행복은 우리가 깨닫고, 아는 것에 달려 있다고. 깨달음과 앓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나의 영혼 안에는 하느님을 통째로 느끼는 힘이 있습니다.”(208)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생명을 주신 당신께 감사드리며 당신 앞에 머물러 있는 이 순간 하느님 아버지의 창초적 사랑에 협력하신 저희 부모님의 사랑을 의식하며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오늘 그들의 사량을 보답해 주소서. 저희 부모님한테도 허물이 있음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을 정화하소서. 그들이 당신과 함께 일하면서 창조한 새 생명 안에서 기쁨을 얻게 하소서. 부모님에 대한 저의 사랑이 그들에게 기쁨과 평화의 샘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그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그로 인해 생긴 상처를 치유하소서. 제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 치유하소서. 부모님의 불완전함과 사랑의 부족으로 제 마음과 영혼에 깊이 새겨진 상처룹 치유해 주소서. 당신 사랑의 힘과 구원의 업적으로 제 마음에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흘러넘치고, 또 부모님의 마음안에는 저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흘러넘치게 하소서.
0 예수님, 당신이 저에게 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티 없으신 동정 마리이와 함께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결심한다. 부모 중 한 분 또는 모두 돌아가셨다면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기도한다.)(262)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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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12,48)
저는 누군가를 만날 때 책방에서 책을 읽으면서 사람을 기다립니다. 책방에서 우연히 잡은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에서, ‘틈 그리고 튼튼함’이란 부분에 보면, 『어느 스님이 ‘탑을 만들 때 묘한 틈을 줘야 해.’라면서 ‘탑이 너무 빡빡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아. 어디 탑만 그렇겠나. 뭐든 틈이 있어야 튼튼하고 오래가지!』 물건도, 사람과의 관계도 틈은 중요하며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오늘 복음의 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달리 안에 있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틈의 의미를 새로운 시선에서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단지 밖에 있는 가족들과 안에 있는 군중들에 대한 당신과의 관계의 친밀성이나 관계의 끈끈함을 비교 우위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 역시도 젊은 날 고향과 고향 근처 본당에서 피정 지도할 때 제 어머니도 자주 제가 피정 지도하고 있는 곳으로 오셨기에, 오늘 예수님을 찾아오신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12,47)라고 전합니다.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고 자신의 가르침을 살려고 노력하는 제자들을 보고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12,49.5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혈연의 가족 관계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한 이상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며 가족이라는 역설적인 강조입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당신의 가르침을 들었음에도 아직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하고 말씀하셨던 것도 이런 의도에서 발설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7,24) 라고 가르치셨지만,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어머니 마리아 보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살려고 했고 살았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보면. 혈연이든 지연이든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영적 가족 구성원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 여부에 따라 안과 밖이 구분 짓게 되는 것이며, 관계의 친밀도를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인입니다.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 여부가 하느님 가족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물론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어떤 이유나 의도에서 찾아왔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형제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더더욱 예외일 수 없으며 날마다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분과의 영적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틈을 갖는 것이며 그 틈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여백이며 여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심력 보다 사랑의 원심력을 더 강조하시고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주님, 저희를 형제요 자매라 인정해 주시고, 당신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아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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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 내 뜻 아닌 하느님 뜻으로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7-22 ㅣNo.174416
우리가 길거리에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묵주반지를 낀 교우를 보면 반가운 게, 어쩜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 실천 계명인 이웃 사랑의 뜻이 흐르기에 그럴게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신앙 공동체가 지금보다 더 가족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리하면 오로지 주님의 뜻을 함께 찾고, 그것을 함께 실천하는 것이리라. 그것만이 우리를 가족으로 묶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시는데, 성모님과 형제들이 오시어 밖에 서 계셨다. 그래서 어떤 이가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지금 만나려고 밖에 계십니다.” 라고 일렀다.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셨다. 그리고는 분명히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을 따르는 이가 형제, 누이요 내 어머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관계는 어머니와 그 자식 관계일 게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찾으신 어머니에게 참으로 냉정하게 대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사랑을 혈연에 한정시킬 때,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유다의 지도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사랑을 자기 가족과 친지, 이웃이나 자기 민족에게만 국한시켰다. 그렇게 혈육에 집착한 그들인지라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예수님도,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이웃도 보이지 않았을 게다.
많은 이가 예수님은 성모님을 배척하시는데 천주교 신자는 유독 성모님을 왜 그리 공경하느냐며 핀잔거리를 찾는다. 물론 예수님은 공생활을 하시면서 외형적으로는 혈연에 그리 얽매이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더 깊이 묵상하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순명한 이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라는 아주 강력한 뜻이 담겨 있다. 사실 성모님은 매번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다름이 없이 사셨다. 이보다 더 위대하신 어머니가 정녕 계셨을까?
그리하여 예수님은 혈연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가족 개념을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이웃을 어떻게 해 주었는지에 따라 예수님의 참 가족 여부가 달려 있단다. 그렇다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죄인들과 병자들, 굶주린 이들, 과부들, 힘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인 사랑을 실천하며 다가가면 그 상급으로 참 가족이 된다는 거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이 되려면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형제자매가 되어야만 할 게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형제, 자매, 부모’라는 말을 혈연이 아니라 신앙에 따라 사용하셨다. 곧 예수님께 가족이란 물리적인 핏줄이 아닌 영적인 핏줄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니까. 그러기에 사랑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그분의 뜻에 따라야 할 게다. 그 뜻을 벗어나면 맹목적인 사랑이 될 터이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라 부른다. 하느님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과도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었기에 서로 믿는 형제자매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따금 하느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제, 자매라는 이름만 별 의미 없이 사용하곤 한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사랑 실천하는 참 가족이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살아 있고, 그분이 주신 소명이 우리 삶을 이끈다.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를 열린 마음으로 산다. 내 방식이 아닌 하느님 방법으로 가족 사랑을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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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만이 혈연관계처럼 예수님과 아주 강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49,15)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를 모두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이 ‘말씀’ 안에 담겨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예수님께 “주님, 주님!”이라고 외치고만 있는 사람인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예수님의 어머니로 누구보다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 실천하신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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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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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실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의 질서를 뒤바꿀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0년 세월 동안 이스라엘의 변방 나자렛에서 조용히 사셨습니다.
인간에게 명령하셔야할 만왕의 왕이신 분이 인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며 서른해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기쁘게 도와드렸습니다.
때로 요셉의 부탁으로 열심히 대패질도 하셨고 못도 박으셨습니다.
가사 일로 늘 바빴던 마리아의 일손도 거들었습니다.
때로 마늘도 까고 양파도 까면서 매워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어떤 자식보다 효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꽤 의아하게 다가옵니다. 효자이셨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48-50)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마리아와 요셉, 사촌들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 말씀에 가장 충실하셨던 마리아를 향한 극찬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씹고 곱씹고, 새기고 되새기던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만 머물며, 가족 친지들과 알콩달콩 한평생을 사셔야 할 분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 더 넘어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할 분,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결코 혈육이나 지연, 학연에 연연하시면 안되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을 지나치게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물론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도 중요하지만,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와 본당이 다 내 공동체요 우리의 공동체, 주님의 공동체라는 연대와 공유 의식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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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고 반문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절)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되면 누구나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인간적인 혈연관계의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간의 정과 예의를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본분에 대한 완성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가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 즉 그리스도의 형제자매 모습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밝혀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고 성화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죄를 많이 짓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형제자매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시는 말씀이 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였기에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온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형제도 될 수 있고, 자매도 된다. 그 어머니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을 낳아줄 수 있을 때,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낳아줄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그 순간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 이제부터 나 자신의 삶이 마리아가 될 때, 작은 마리아로서 진정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작은 마리아의 삶을 통하여 참다운 신앙인으로 사는 삶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듯이, 왜 성모님께서 계실 수 있도록 하지 않으신 이유를 우리를 통하여 마리아를 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어떤 분은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전해줄 수 있음을 잘 알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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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뜻’이 결정하는 ‘집’
조선 말기 힘든 시절에 조선 땅에서 승승장구한 조선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완용입니다.
그는 항상 성공했고 자녀에게 성공하는 법도 알려주었습니다.
가장 강한 나라를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이 우리와 가까이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합니다.
그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 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습니다.
조선 땅에서 당시 가장 성공했던 이완용을 지금 누구도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선의 피가 흐르지만 그는 일본사람이고 러시아 사람이며, 미국 사람입니다.
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피 안에 흐르는 뜻이 더 중요합니다.
누구의 뜻을 따르느냐가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결정합니다.
가족임을 증명하는 것은 그 가족에 흐르는 피가 아니라 그 가족에 흐르는 뜻입니다.
‘뜻’은 ‘본성’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는 뜻에 갇혀 살아갑니다.
내가 육체의 뜻을 선택했다면 그 육체로부터 오는 ‘땅’에 갇혀 살아가고, 내가 하늘의 뜻을 택했다면 ‘하늘’에 살게 됩니다.
육체는 지옥의 본성이고 영은 하늘의 본성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살게 되느냐, 사탄의 본성 안에서 살게 되느냐는 내가 선택하는 뜻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이고, 육체의 욕망을 선택했다면 이미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육체의 욕망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런 사소한 죄들은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죄도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죄인 줄 알면서 그것을 선택한다면 그 순간은 지옥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따르는 뜻이 천국과 지옥,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뜻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자기 전에 다음 날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순서대로, 시간의 흐름대로 적되, 그 일들이 주님의 뜻이기를 기도하며 적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렇게 적힌 시간표대로 살았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네 살 된 아들과 맥도널드에 갔습니다.
아들은 버거, 콜라, 튀김 등 맥도날드 대표 음식을 시켰습니다.
아버지는 몸 생각을 해서 드레싱을 곁들인 따분한 샐러드를 시켰습니다.
아들이 먹는 것을 보고 입에 군침이 돌아 “아빠가 튀김 하나 먹어도 되지?”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네 살 된 아이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싫어요!”
아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나온 줄 모르는 것일까요?
이런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또 사주고 싶으실까요?
주님의 뜻대로 십일조도 내지 못하고 봉헌을 하더라도 아주 아까운 듯이 하면 하느님도 그런 섭섭한 마음이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 했던 것보다 더 바쳤습니다.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셨고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삼손의 뜻이 아니라 필리스티아인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몸은 삼손과 같이 있었지만 뜻은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결국 들릴라를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던 삼손은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리는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했습니다.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내 안에 머무시려 하시는 하느님의 눈을 뽑고 사탄의 소굴로 집어넣는 행위와 같습니다.
나는 두 뜻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고 하실 때, 성모님은 오히려 칭찬으로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도 당신만큼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뜻’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예수님께서 핏줄을 배신한다고 여겼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 “내 뜻만을 따른 이들만 내 나라에 들어와라!”라고 명하실 때, 주저함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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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도의 끝이 항상 결심이어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합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사실 참 부모님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피만을 물려받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뜻을 물려받아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희생 안에 그분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한석봉을 당대 가장 유명한 명필이 되게 한 것은 바로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그 희생 안에는 ‘뜻’이 존재합니다. 어머니의 희생은 당신의 뜻을 아들에게 강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의 사랑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형은 동생이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쾌락을 즐기는 데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 것은 형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라도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랐습니다.
조선 말기 힘든 시절에 조선 땅에서 승승장구한 조선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완용입니다. 그는 항상 성공했고 자녀에게 성공하는 법도 알려주었습니다. “가장 강한 나라를 섬기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이 우리와 가까이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 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합니다. 그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 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조선 땅에서 당시 가장 성공했던 이완용을 지금 누구도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선의 피가 흐르지만, 그는 일본사람이고 러시아 사람이며, 미국 사람입니다. 누구의 뜻을 따르느냐가 어느 민족에 속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저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제가 사제로서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칠 때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가장 예쁘게 보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기자가 오상의 비오 신부에게 악마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나 자신이 악마라고 말했습니다. 나 자신이란 나의 뜻입니다. 본래 나의 뜻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게 아닙니다. 나의 뜻을 하느님 뜻으로 바꿔나가야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눈이 먼 것이고 실제로 눈이 뽑혔습니다. 기도의 과정은 다시 하느님이 뜻으로 나를 봉헌하는 데 있습니다. 삼손은 하느님의 뜻을 잃은 것을 뉘우치고 결국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봉헌합니다. 그렇게 세상이 아닌 아버지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기도의 과정에서 우리 뜻을 당신 뜻으로 감싸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붙잡지 말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위해 그녀를 파견하십니다.
저도 성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 게 기도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분은 당신께 붙어있기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성체조배를 하게 되었고 그 뜻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하느님의 뜻으로 파견되지 않으면 내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고 내 뜻을 그분의 뜻으로 변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세례받으신 분들에게 100일 잔치해 드릴 때 처음엔 적지 않게 놀랍니다. 저는 세례받을 때 청하는 두 가지는 반드시 이루어주신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 소원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봅니다. 그러면 본당신부로서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신자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받기 이전에는 그런 문제들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었는데 지금은 잘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세례라는 은총이 이들을 하느님 뜻에 봉헌하게 한 것입니다.
이 일이 매 기도 때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그만큼 땅에서 벗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까워집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을 위해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의 해답까지 얻기 전에는 그 기도를 마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뜻을 찾기 위한 기도는 며칠,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으로 나의 구체적인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기도는 나에게 어떤 좋은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결국 하느님은 기도로 내가 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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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이들이 있는데, 즉 앵무새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 반복하는 이들이 있는데, 참 딱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7-40).”
마태오복음 18장에도 ‘아버지의 뜻’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해도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나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뜻의 실행’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2)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거나,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일 수도 있고, 진짜로 열심히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목표가 잘못되어 있다면, 또는 목적의식도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냥 취미생활입니다.
간절함이나 절실함도 없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나 성당에 가고, 바쁘면 안 가고... 겉으로 보기에는 착하고 성실한 신앙인으로 보이더라도 겉모습만 그런 것이고, 평소에는 주님을 찾지도 않다가 뭔가 아쉬운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기도하고... 그러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실망해서 기도를 중단하고...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그런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주님께서는 몹시 싫어하십니다(묵시 3,15-16).>
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나의 가족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4)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9-10.12).”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행동으로’(온 삶으로) 실천하는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중으로 죄를 짓는 일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죄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루카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은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믿는다고,
또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말은 잘하는데 실천은 안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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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2.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걸”이라는 글자로 말을 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 좀 줄이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걸”, “화내지 말고 한 번 더 참을걸”, “교통 신호를 잘 지킬걸”, “평소에 건강을 신경 쓰고 잘 챙길 걸”. 이처럼 “걸”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사람들은 늘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한 후회 속에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게 됩니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삶 속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텐데, 그러질 않으니 항상 남의 행복을 부러워하며 ‘뒷북’만 치게 되는 겁니다. 반면에 “~다”라는 글자로 말을 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덕분입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할 말, 해야 할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즉시 실행하는 이들입니다. 세상 일이라는 게,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게 늘 내 뜻과 기대대로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기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에는 최선을 다하기에 언제나 최선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지요. 그리스도 신앙인의 삶은 이래야 합니다. “걸”을 입에 달고 살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당당하게 “다”를 외치면서 그분 뜻을 따르면 하느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당신 나라에 받아 주실 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분과 이야기 하려고” “밖에” 서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분과 맺은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그 관계 “밖에” 뻘쭘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목적 또한 그분 곁에 있는 이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분과 함께 있는 반면,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분을 찾아온 것이지요. 마음이 그런 상황이니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과 혈연으로 맺어진 특별한 사이라고 해도 구원받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점을 안타깝게 여기신 예수님은 일차로는 당신 가족들에게,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그런 점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누가 당신의 ‘진짜 가족’인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당신과 뗄 수 없는 참된 유대를 맺어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그 핵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신앙의 유대, 구원의 유대를 맺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능력이 없어도, 특별한 자격이 없어도 마음 속에 굳은 믿음을 지니고 믿는 바를 실천에 옮기면 누구나 하느님께 사랑받는 그분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고 해서 그분 뜻을 우리가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이 이루십니다. 다만 우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당신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 도움을 받으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그저 수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의 도우심과 은총에 힘 입어 함께 구원이라는 드라마를 완성해가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시기에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겁니다. 그러니 말만 앞세우고 실천은 하지 않는 ‘무늬만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걸”하고 후회만 하지 말고 “~다”라며 당당하고 뿌듯하게 선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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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삶
<2024.7.23>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6:20~32절)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삶❞
❚ 사람의 기록은 왜곡되거나 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쓰신 말씀은 없어지거나 변할 수 없습니다.
✔ 말씀을 가진 자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 소망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20~26절).
바룩을 통해 두루마리 책의 내용을 직접 확인한 고관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여호야김에게 가서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구두로 전달합니다. 책에 대해 들은 여호야김은 직접 두루마리 책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후디를 보내 두루마리 책을 가져오도록 합니다. 여후디는 왕과 왕의 고관들 앞에서 두루마리 책을 낭독합니다(20~21절). 그때가 겨울이므로 여호야김은 예루살렘 궁궐 안에 있는 겨울 궁전에 머물고 있었고, 방 안에는 화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후디가 두루마리 책을 읽어 나가자 왕은 낭독한 부분들을 칼로 베어 화로 불어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워버렸습니다(22~23절). 왕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완악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두루마리를 불태워 없애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라단과 들라야, 그마랴가 왕께 호소하였으나 여호야김 왕은 그들의 말을 거부(25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바룩을 보호하심으로써 여호야김의 의도를 무산시키십니다(26절).
죄악은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켜 심령을 완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듣는 진실한 충고에 대해서도 귀를 막아 버리도록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자는 구원과 심판을 이루실 하나님의 음성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호야김 왕의 모습을 통해 주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돼지와 같은 모습으로 말씀을 대하고 있다면 회개의 눈물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낙심함이 없이 소망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27~28,32절).
바룩이 예레미야의 입에서 받아 기록한 두루마리 책이 여호야김에 의해서 불에 태워진 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모든 말을 다른 두루마리에 다시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27~28절). 비록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기록된 두루마리는 불태워 사라졌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통해 심판 예언을 다시 기록하심으로써 어떤 악한 자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바룩에게 주고 첫 번째 두루마리에 기록했던 모든 말을 그의 입에서 받아 다시 기록하게 합니다. 두 번째 두루마리에는 첫 번째 두루마리에 기록되지 않은 또 다른 예언들도 첨부되었습니다(32절).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은 문자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말씀을 통해 주시는 경고가 회개의 마지막 기회일 수 있음을 깨닫고, 죄에서 돌이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충성스럽고, 열정이 넘치는 사명자를 통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심령이 변화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들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방해하는 세력들로 인하여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가지고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믿음을 가지고 회개를 선포해야 합니다(29~31절).
두 번째 두루마리 책을 기록하라는 명령에 이어 여호야김에 대한 심판 예언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여호야김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이것 때문에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그 예언 기록한 두루마리를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29절).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이 심판 예언을 전하시면서 기대하셨던 것은 회개였습니다. 왕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심판에 대한 그분의 뜻을 돌이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회개로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의 후손 중에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을 것이며, 왕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즉 그의 시체는 매장되지 않고 낮의 열기와 밤의 서리에 던져진 채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30절). 그리고 일찍이 모든 재난을 내리리라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와 그의 자손과 신하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31절).
하나님께서는 유다 전체의 죄악을 지적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하였습니다. 오히려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듣고 분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무시한 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한번 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철회되지 않으며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묵상을 통해 증거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 17:11절)하는 신실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순종하며 사는 길만이 우리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임을 명심하고,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죄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인생들을 향한 회개를 선포하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구원과 심판을 이루실 하나님의 음성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서 회개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말씀을 신뢰하고 따름으로 충성스러운 사명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36:20~3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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