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16: 1-5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인생들의 실수 중에 가장 중하고 큰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뜻 그대로 두지 않고 자신들의 뜻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그 분 하나님의 의지대로 되어야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 의지를 앞세워 나아감으로 스스로 혼돈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비교적 계시를 1차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이나 나중에 교훈적으로 받은 사람이 모두 일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혼돈과 무질서를 하나님께서만이 치료하시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1. 본문 1절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입니다.
1) 1절 초두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해 줍니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지연되어 온 조급함으로 인하여 사래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이한 방법으로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자식을 얻으려고 했던 사실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불임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임신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난 지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약속된 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치료 대책이 필요하였습니다. 모세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사실은 둘째 아내에게 결혼시키는 계획이 아브람 자신에게서 고안된 것이 아니고 사라에게서 생각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교훈이 있습니다.
그 거룩한 사람은 이런 결혼에 대한 정욕으로 이끌리지 않았으며 그 일에 대하여 전혀 꿈도 꾸지 않고 있는데 자기아내의 권면으로 그런 일에 몰두하게 꾀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사래가 단지 자손을 보고 싶은 간절함 때문에 그렇게 여종에게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였겠는가 라는 점입니다. 그 사실이 어떤 자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자기 남편에게 그렇게 자주 반복된 이 약속들에 대하여 그녀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의 어머니가 그의 남편과 함께 똑같은 은혜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래는 단순히 자연적인 충동으로 그렇게 자식을 갖기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그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 그 복을 얻으려는 일념으로 자신의 부부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남편과 이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녀를 보게 하려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허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보기 원했다면 자기의 남편에게 둘째 아내까지 주면서 하지 않고 단지 양자를 얻어서 자손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여자들은 질투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 약속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망각하고 전혀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아브람에게 자식을 보게 하는 것만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적잖은 유익을 가져다주는 귀한 본보기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의도하고 있는 소원의 목적이나 범위가 제 아무리 거창하고 그럴듯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면에서 그녀는 적잖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결과를 향유하려는 목적에 사로잡혀서 그것만 집착하다가 그만 그분의 말씀을 조급하게 떠나버리므로 그런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한편 그녀가 자신의 불임성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아브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자녀를 보지 않으면 자기로서는 도저히 자녀를 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하여 절망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잘못이 이미 제기되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사태가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자연의 합법적인 질서를 떠나서 절대로 다른 어떤 방법을 시도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 그녀의 위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신성한 결혼으로 번성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래는 오직 두 사람에게 약정된 부부의 침상을 더럽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법칙을 전복시키고 만 것입니다. 사래가 그 여자를 정식 아브람의 아내가 아니고 소실로 주었다는 것이 자기 잘못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결합하게 되면 ‘그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리니’라는 말씀이 완전히 고정된 원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다처제가 성행하고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서로 결합되게 하신 하나님의 법칙을 폐기시키는 것이 사람의 뜻에 맡겨진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 아내의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제안을 따르고 있는 아브람에게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래의 우왕좌왕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과 같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자기 아내의 소원을 따르게 했던 그 능란한 솜씨가 마땅히 질책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 두 사람의 믿음은 결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수행했던 방법에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기대해야 될 자녀를 더구나 성급하게 얻기를 바라다가 그만 하나님의 정당한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자기들 방법대로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에서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헛되게 그분의 백성들에게 조용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기다리라고 괜히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소원을 당장 들어주시지 않고 연기하며 보류하실 때마다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가 되기 전에 미리 날뛰는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앞질러 처리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한계를 벗어나서 자신들을 허둥대게 만드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래가 그보다 더 진일보된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 듯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아브람이 단지 아버지가 되는 것을 원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도 어머니의 권리와 영예를 얻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모든 열방들이 아브람의 자식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남편의 영예에 자기 자신도 함께 참여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그 복을 받은 몸에서 하나의 불구로 잘림을 당하지 않고 또한 그 약속된 구원에서 떨어진 외국인이 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성급하게 서둘러서 일을 벌였던 것입니다.
2) 1절의 나머지 부분에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의 핑계로 첨가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모세는 일단 필요성이 그녀를 사로잡아 이렇게 하도록 강요하기 전에는 자기 여종의 태(胎)로부터 도움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한 말에서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녀가 자기는 이제 여호와께로부터 자녀를 낳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고 말할 때(2절) 자기야말로 마지막 희망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녀를 낳게 해 주실 것을 끈기 있게 그리고 겸허하게 기다렸다고 하는 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기다린 그녀에게서 무슨 잘못이 있단 말입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녀는 당연히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겨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능력을 자연 질서에 결속시키지 않은 점입니다. 또한 그분의 능력을 자신의 감성에 적응시키지 않으면서 이 모든 걱정을 하나님의 품에 맡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장차 되어질 일을 약속하신 것을 차근 차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전능하신 분으로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즉, 그녀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 직접 닫으신 태(胎)의 문을 다시 열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입니다.
1) 2절 상반에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한 어머니가 되는 것을 의미해 주는 히브리어식 표현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그 말을 단지 ‘아들을 가지다’ 라는 의미로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벤)이라는 말은 히브리인들 가운데서 아들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와 일치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은유적으로 그렇게 불려져서 그 종족을 유지시켜 주는 자로 여겼습니다. 또 그렇게 아들들을 그 가문을 이룩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의 주요한 의미는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래는 하갈이 낳을 그 아이를 그 하녀에 대한 통치권으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평생 종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는 자녀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 몸을 마음대로 통제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남편에게 처음 그 일을 언급하면서 사래는 하갈에 대하여 창녀와 같게 될 소실을 간신히 허락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극 소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눈이 원래 본분을 떠나서 더 지혜롭게 될 때 자칫 잘못하면 불법적인 수단을 시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사래의 욕망은 신앙의 열심에서 기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만큼 그것이 하나님에게 복종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즉시로 일부다처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합법적인 결혼이 부패한 것 외에 전혀 다른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거룩한 사래가 아직도 자기 자신이 불타있는 그런 조급함을 자기 남편 속에서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곧 사단의 어떤 은밀한 속임수에도 기습당하지 않고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되는가하는 점입니다. 사단은 악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을 공공연하게 사주(使嗾)시켜 우리 신앙을 반대하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선한 매개체와 단순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공격하여 경계하고 있지 않은 우리를 엄습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이 사단의 간교한 행위들에 대하여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사단이 우리를 잠식(蠶食)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2) 2절 끝에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로 아브람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갈 때에 동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아내의 설득에 넘어가 결국 하나님이 금지하고 계신 대책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믿음의 근본은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실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결국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본보기로 만약 어느 때라도 사단이 우리 신앙을 흔든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면 전혀 낙담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한편 우리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난공불락의 전투병과 같이 용감하게 투쟁했고 그토록 많은 장애들을 이겨낸 아브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시험에 넘어가고 있는 사실을 볼 때 누가 과연 그런 동일한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고 장담하며 냉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굳건하고 오랜생활로 신앙에서 단련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그런 시험에 빠지지 않게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3. 본문 3절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년 후이었더라” 입니다.
모세는 사래의 계획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래가 자기의 집을 매음소굴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기의 하녀의 정조를 배신하는 자가 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에게 뚜장이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갈은 아직까지는 온당치 않는 아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른 사람의 침상에 인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가 너무도 불법적이어서 간음과 결혼 사이에 개제 된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똑같은 일이 하나님 말씀에 부착되어 있는 모든 허구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일어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그럴 듯한 구실로 잘 덮여 씌어진다고 할지라도 타고난 부패성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성에서 타락되는 그것이 결국은 전체를 부패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4. 본문 4절은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지나치게 성급한 일에 형벌이 신속하게 뒤따랐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정말로 중요한 잘못의 소재는 바로 사래에게 걸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너무나도 다른 사람의 말에 귀가 얇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두 사람이 당연히 받아야 할 징계를 하십니다. 사래는 자기 몸종의 교만스런 멸시로 서글프게 그리고 비통하게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온당치 못한 불평소리로 괴롬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우리는 그들의 경솔에 대한 형벌을 그 두 사람이 지불하고 있는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래가 고안한 계략과 아브람이 그토록 열심히 받아들인 그 계략이 실패하고 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한편 하갈의 마음속에서는 주인에 대한 배은망덕의 좋은 예가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특이한 은총과 명예로 대우를 받았던 그녀가 자기 주인을 멸시하며 깔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너무나도 현저하게 공통화되고 있는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성도들은 그것을 견디어 내는 생활에 자신들을 단련시켜야 될 것입니다.
만약 어느 때라도 성도들이 베풀어 준 친절에 대하여 부당한 보답이 돌아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견디어 내는 생활에 익숙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사래의 나약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일을 이겨내는 자세를 갖도록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은 사래가 자기 종의 멸시를 도저히 감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5. 본문 5절은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입니다.
1) 5절 앞부분은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입니다.
이것은 그녀에 대한 형벌의 일부였습니다. 그 형벌로서 사래는 너무나 비천하게 되어 자신의 신분마저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약점으로 그녀 자신이 너무나도 흥분되어 처신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사래는 자기의 모든 여력을 다하여 남편 아브람을 그토록 성급하게 행하도록 강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무죄한 그의 남편 아브람을 너무 경솔하게 모욕하고 있습니다. 사래는 여기서 아브람이 책망받아야 될 이유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그의 품에다 그 하녀를 주었다는 사실로 그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먼저 아브람이 그 나쁜 원인을 지지함으로 의도적으로 도왔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분별하지도 않고 자신만 하녀로 인하여 멸시를 받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분에 가득찬 공격은 그렇게 맹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공격은 여기저기 맹렬하게 날뛰며 다닙니다. 물어보거나 원인규명도 하지 않고 전혀 책임추궁을 받지 않을 사람을 무작정 정죄하며 덮어 씌웁니다.
지금까지 과연 누가 양순하고 겸손한 정신을 지니고 있는 여자였는가 라고 한다면 사래가 바로 그런 덕성을 지니고 있는 여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괄목할 만한 그녀의 인내심이 한가지 공격으로 인하여 그토록 극심하게 동요되었다는 것을 볼 때에 우리도 더욱 더 굳게 각자의 격정을 다스려야 된다는 사실을 다짐합시다.
2) 5절 끝부분에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래는 여기서 하나님의 성호를 부적당하게 이용합니다. 경건한 자들에게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되어 있는 경외심을 거의 망각하고 있는 언동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판단을 호소합니다. 이런 행위는 그녀 자신의 머리 위에 멸망을 자초하여 떨어지게 하는 것 외에 또 무슨 결과가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심판자로서 그 일에 개재하셨다면 필연적으로 그 두 사람 중 어느 하나에게 형벌을 내리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브람은 그다지 해로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그녀 자신이 하나님의 보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하나님에게 호소한 결과는 마침내 그녀 자신이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에게 그분의 진노를 그토록 급하게 내리도록 비는 결과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이방 여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 대하여 이런 행위를 말했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일로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와께서 신실한 성도들의 어머니 인격에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계신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분노의 불꽃이 얼마나 맹렬하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둘째로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계속 사람들을 성급하게 몰아가는가 입니다. 셋째로 자기 자신들의 일에 너무나 탐닉되어 자신을 망각하게 되는 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소경들인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이 무엇에 집착될 때마다 다시 한번 우리 자신들을 의심하며 조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다른 한가지가 있습니다. 곧 가장 잘 질서가 잡힌 가족들도 때로는 말다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죄악은 하나님의 교회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분쟁들로 방해받는 아브람 가정은 교회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기 때문입니다.
가정 싸움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인간들 가운데 신성하게 하신 사회 생활의 대부분이 결혼생활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불편한 것들이 그곳에 개재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좋은 상태를 마치 점막이 처럼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되는 상황들을 스스로 잘라 버리는 데에 자신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3)이 목적을 위하여 그 죄악의 기원을 상기해 보는 것이 지대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당면하게 되는 모든 문제들은 모두 죄에다 전가시켜야 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가정, 곧 그 사회에서 출발된 죄악의 첫 번째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자신을 끌어올려서 우상화하는 원초적인 죄악입니다. 또 에덴에서 출발되어진 원 죄악의 두 번째는 탐심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을 끌어올려서 우상화하는 원초적인 죄악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분별하면서 이런 죄악을 거절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정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