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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작품으로
에베소서 2:1-10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하는데요, 이 말이 그의(his) 라는 말과 이야기(story)라는 말의 합성어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여기에서 그(his)라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역사는 그의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라는 말인데요, 여러분들은 이것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를 크게 B.C와 A.D로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과 오신 후로 나누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가 확연하게 구별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고 차이가 생겼다고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 하나만 예를 들어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여자들과 아이들과 종들의 인격은 거의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여자들과 아이들과 종들의 인격이 존중받게 됩니다.
종들에게 자유가 선포되고 여자와 아이들의 인격이 존중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에 얼마나 큰 변화였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라고 하는 큰 흐름에서도 그렇지만 좁게 생각할 때
한 나라가 바뀌는데도 예수님의 복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결정적으로 바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온 이후가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역사, 우리 개인의 인생사가 가장 크게 바뀐 것이 언제입니까?
분명코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믿을 때 아니었습니까?
제가 중학교 다닐 때에 아버지는 고등학교는 공업계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대학은 보내줄 수 없으니 공고에 가서 빨리 취직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전봇대에 올라가서 일을 하는 것이 싫어서(공고를 졸업하면 다 전봇대에 올라가는 줄 생각했습니다.)
기왕 실업계에 갈 바에는 상업학교에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상고에 가서 공부할 때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만났습니다.
그 후로 저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아갔습니다.
그때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복음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만난 것이 제 인생에 엄청난 반전을 이루게 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역사와 국가의 역사와 가정의 역사, 개인의 역사를 바꾸어놓는 힘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히스토리 그의 이야기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만,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작품’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의 형편을 한 마디로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합니다.
3절 하 반절에 보면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녀라는 말은 누군가의 자녀요 아버지가 있다는 말인데요, 그렇다면 우리의 아버지는 누구였고 우리는 누구의 자녀였을까요?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는 안타깝게도 ‘진노의 자녀’ 즉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녀요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왜 마귀의 자녀였으며 그 자녀가 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을까요?
먼저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 ‘마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사탄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더러운 영, 악한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탄의 뜻을 따라 살았던 것이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마귀를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가리키며, '욕심'은 금지된 것에 대한 갈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쉽게 말씀드리면 죄악을 따라 살았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상태는 몸의 죄만을 가리키지 않고 전 인간이 짓는 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라는 말 다음에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말을 함으로써 죄는 단순히 몸의 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죄까지 포함시키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세상 풍조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세상은 절대 올바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기 이전에 우리의 모습은 세상의 풍조, 세상의 습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악한 모습으로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에 상반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는 한 마디로 죽음이었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살았던 이런 삶이 결국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의 삶을 가리키는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는 대가가 있다는 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죄와 허물로 살아가면 그 삶은 당연히 대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가가 죽음인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죽음입니다.
또한 육체의 삶을 마치는 것이 죽음이고 세 번째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또한 죽음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옥에 가는 죽음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 말씀을 보면,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지옥은 분명 마귀를 위하여 예비 된 곳이지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마귀를 따랐고 마귀의 뜻대로 살았던 사람은 마귀와 함께 그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이런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놓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를 믿기 전까지는 이런 이유로 인해서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필연적으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확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바뀌었고 우리의 인생이 바뀌었고 우리의 미래가 바뀌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이 구절을 새 번역 성경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우리가 진노의 자녀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진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마귀의 자녀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마귀를 따라 지옥에 갈 자였지만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갈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생이 이렇게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꼭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이신가를 꼭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예수님을 믿어도 그게 그것 같은 생활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하신 분인 줄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분을 통하여 180도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 믿음으로 받은 은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은 거의 비슷한 말인데요,
이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으로 받은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말이 행위에서 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구원받은 것이 나의 행위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또한 내가 올바른 행동을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은혜는 거저 주시는 선물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이겠습니까?
인간 편에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일을 주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인간이 받아야 할 죄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분도 예수님이셨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영리 같은 소책자를 갖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할 때 네가지 진리를 따라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따라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는 것은 결코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을 믿습니다.
두 번째는, 믿음으로 받은 구원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세상의 다른 종교는 구원을 받기 위해 자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회교의 예를 보면 그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메카를 향하여 절을 하고 율법들을 지켜야 합니다.
마지막 날 심판받을 때는 선행과 악행의 양을 저울에 달아서 선행의 일이 많아야 전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완전한 선행의 종교입니다.
힌두교나 불교는 고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선행이나 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런 종교와 달리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죽으신 지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진리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그 예수님의 복음이 나에게 전파되도록 하셨고 그 복음을 믿고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만드셔서 인간에게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방법을 다 만드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우리는 그냥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진리를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면 이것은 정말 돼지가 책망할 일입니다.
이런 은혜로 구원을 받고 새로운 작품이 된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자 답게 선한 일을 힘쓰며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인생은 b.c와 a.d로 나누어졌습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여러분의 남은 삶, a.d의 삶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2024. 0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