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둔황이 그립고 밤에는 둔황을 꿈꾼다.樊锦诗:白天想敦煌 晚上梦敦煌
출처: "돈황연구원" 작성자: 张玉洁 중국 고고학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80세 이후 번금시 樊锦诗 둔황연구원 명예원장에게 절정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2018년에는 '개혁의 선구자 칭호'를, 2019년에는 '국가 명예 칭호'를 수여받아 공화국 역사상 빛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일을 택해 평생을 살겠습니다.
"2019년 8월 19일, 시진핑 총서기는 둔황연구원에서 좌담하면서 둔황 문화 연구자들을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이 말은 번금시가 둔황과 평생 맺어온 깊은 인연의 한 단면입니다.
▲ 이것은 '문화재 보호에 탁월한 공헌자'와 '국가 명예 칭호 수상자 번금시'의 고통으로 인해 노신사들이 고통을 겪었고 표창은 모두 번금시에게 주어졌습니다.
저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선배의 기초 위에서 성장했을 뿐입니다.
"영예를 안으면 늘 선배와 동료들을 떠올립니다. 인터뷰 전, 그녀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종이에 썼습니다: 상서홍, 허스저, 손기원, 단문걸... …
번금시: 저는 1963년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둔황 막고굴에 와서 일했습니다. 지금은 80세가 넘었습니다. 둔황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후회도 없습니다. 저는 먼저 이전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막고굴(중국 고고학도) 막고굴은 고대 실크로드에서 탄생한 값진 보물이며, 서기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고대인들이 지혜로 창조한 문화예술의 보고로 중국과 서양 문화의 교류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1944년 '국립둔황예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막고굴 자명대 400여 년간 아무도 관리하지 않던 운명을 접었습니다. 신중국 건국 후 둔황문물연구소로 개편되었습니다.
1984년, 둔황연구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연구원이 출발점이 높아 창수훙(常書鸿), 돤원제(段文杰) 같은 전문가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도시의 삶을 버리고 고비사막으로 자원해 왔으며, 한 번 지내면 평생입니다.
그때 막고굴은 거의 폐허였고, 동굴 안에는 모래가 가득 쌓여 있었고, 어떤 것들은 아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전기, 수돗물, 흙집, 온돌방, 교통수단, 정보 등이 없습니다.
그들은 유사를 다스리고, 모사를 하고, 연구를 하며, 연구원의 견고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번금시는 둔황에 온 후 막고굴 남구의 굴 앞 유적지, 둔황 칠리진한묘 등의 발굴 및 정리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1977년, 그녀는 둔황(敦煌) 문화재 연구소 부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 판진시는 막고굴(고고 중국 지도) 판진시에서 1985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문물국은 둔황 막고굴을 포함한 5개의 국가 중점 문화재 보호 부서에 세계유산 등재를 요청했습니다.
저는 막고굴(莫高窟) 등재 담당자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왜 등재해야 하는지 모르고 막고굴의 지리적 위치, 역사 문헌, 유물 가치, 연구 성과 등 많은 자료를 직접 작성했습니다.
등재과정은 저에게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세계유산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국제적으로 문화유산에 관한 협약, 헌장, 문화유산의 완전성, 진정성 등의 이념, 문화유산의 보호와 관광개방의 관계, 문화유산의 보호와 법률 등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더 이상 고고학의 작은 세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로 법률과 경영학을 공부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연구원의 발전에 촉진 작용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막고굴은 6가지 기준을 충족하면 됩니다.
막고굴의 보존과 관리가 진정으로 국제적 기준과 이념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천년의 막고굴을 디지털 방식으로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것'은 판진시가 추진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설계부터 실제 하이파이 둔황석굴의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데까지 꼬박 20년이 걸렸습니다.
▲ 막고굴 내경(중국 고고학도) 번금시: 1908년 외국인이 찍은 막고굴 사진 속의 내용을 1978년 찍었을 때 없어진 것도 있고 흐릿한 것도 있었습니다.
계속 발전해 나가다가 서서히 전부 없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사진이 노랗게 변하고, 필름이 변질되고, 비디오가 자성을 없앨 수 있습니다. 벽화를 보존하고 영원히 꽃피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저는 과학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 쓸 생각 없냐고 물어보시는데. 이미지를 디지털화하면 영구적으로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나는 귀엽게 들었습니다, 세상에 또 이런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는 즉시 간쑤성 과학기술청에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간쑤(甘甘肃)성 과학기술부는 30만 위안을 주며 지원했습니다. 저희가 해봤는데 안되네요.
▲ 막고굴 내경(중국 고고학도) 1990년대, 외국 전문가와 연결. 그들은 마치 영화를 찍듯이 레일을 만들어 카메라가 투영되고 움직이도록 한 다음 사진을 이어 붙이도록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코닥 필름으로 찍고, 미국으로 가져가서 사진을 현상하다가 하이파이 디카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육중한 궤도를 더 가볍고 좁게 변경하고 자동 사진과 수동 사진을 결합하여 진정한 하이파이 디지털 파일을 만드는 데 20년이 걸렸습니다.
예를 들면 막고굴 61굴의 오대산도는 길이 13m 남짓, 높이 3m 남짓입니다. 우리는 6000장이 넘는 사진을 찍은 후 그것들을 모아서 수정했습니다. 동굴에서 사다리를 올라가야 잘 보이는 화면을 디지털 벽화로 만들어 세계 각지로 전시할 수 있습니다.
판진시는 막고굴에서 막고굴로 15km 떨어진 곳에 모래가 흐르는 듯 물이 흐르는 듯한 황토색 유선형 건물인 막고굴 디지털 전시센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막고굴의 전생과 현생에 대해 디지털 영화를 감상하고, 동굴로 가서 역사의 자태를 감상합니다.
판진시: 막고굴이 1979년 개방됐을 때 한 해 관광객은 2만 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관광객이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늘어나는 데 15년이 걸렸습니다. 20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늘어나는 데 3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2001년 막고굴의 관광객은 31만 명. 서부 대개발, 관광 대발전으로 관광객이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어떡하죠?
막고굴은 동굴이 크지도 않고 십여 평방미터 정도의 동굴이면 중간 정도의 동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수천만명이 들어오는데 그게 무슨 컨셉인가요? 동굴을 망가뜨리면 절대 안 됩니다, 관광객을 못 보게 해도 안 됩니다.
저는 이 일을 생각하는 데 2년이 걸렸습니다, 걱정돼 죽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관광객 수용량, 즉 동굴의 온도, 상대습도, 방문객 수, 동굴병해 등을 모두 조사하여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굴에 들어간 후 방문객의 온도 및 습도 변화와 질병 간의 상관 관계와 같은 시뮬레이션 실험도 수행되어야 합니다. 인원수는 반드시 조절해야 합니다.
무제한 출입은 문화재가 훼손될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잘 보지 못합니다. 황금연휴가 되면 200명이 넘는 큰 동굴로 비집고 들어가니 남자 동지의 등과 뒤통수만 보이고 굴 꼭대기만 올려다보았습니다. 적재량 연구 외에도 온라인 예약 및 온라인 결제도 추가했습니다.
막고굴 디지털 전시센터에서 영화를 보고 버스를 타고 동굴을 관람하는 것. 비상 계획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이것을 보지 않고 저것을 볼 수 있지만 둔황에 가는 사람들의 첫 번째 목표는 막고굴입니다.
여름·연휴 때 최대 1만2000명의 응급관람을 개방하고, 관람객은 영화 대신 4개 동(정상관람은 8개), 미술관·진열관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관광객은 더 이상 추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티켓과 지폐에 집착하지 않고 문화유산에 대한 책임과 관광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책임 있는 여행을 권장합니다. 보호, 연구 및 홍보는 지난 세기 중반부터 둔황 연구소에서 결정한 세 가지 주요 생명입니다. 번금시도 일관되게 그것을 발전시켰습니다.
판진시: 우리는 구조 보호 시스템과 예방 보호 시스템을 구축하고 문화재 분야의 유일한 국가 공학 기술 연구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한편으로 벽화 재료부터 시작하여 그 구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왜 병이 났는지, 어떤 재료로 수리하는 것이 더 좋은지 연구합니다.
문화재 보호는 최소 개입과 상태 변경 불가 원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머리로 고칠 수는 없지만 가치와 현재 상태를 평가하고 다양한 재료, 다양한 질병 및 다양한 공정에 맞게 복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리스크 관리의 개념을 도입합니다. 문화재는 사람과 같으니 건강하려면 예방해야 합니다. 동굴의 미세 환경, 질병, 홍수, 모래, 산림 식생 등을 모니터링해야 합니다. 모니터링 자료를 보면 동굴이 안정적인지 불안정한지에 관심을 갖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 막고굴 내경(중국고고배도) 막고굴은 예술, 역사 등 수많은 인문학 과목을 다루는 전문성이 뛰어납니다.
역사, 문학, 고고학, 종교, 민속 등의 분야의 인문학자들이 벽화, 문헌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막고굴의 의미와 가치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둔황 연구소는 4,500편의 전문 저서를 출판하고 3,000개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 세계 최대의 둔황 연구 기관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문화 진흥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설자를 잘 양성해야 합니다. 2015년, 판진시는 둔황 연구원의 원장직을 사임했습니다. "바통을 한 번 이어받아 과정을 거쳤다"며 유산 보호는 여전히 대대로 추진돼야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번금시:저는 낮에는 둔황을, 밤에는 둔황을 꿈꿉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둔황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일은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대막을 지키고, 봉사를 기꺼이 하고, 용감하게 책임지고, 개척하고, 진취적인' 기성세대의 '모고의 정신'을 이어받기를 바랍니다.
막고굴이 존재하는 한 둔황연구원은 이를 함께하며 끊임없이 탐구해 나가야 합니다. 바통은 대대로 이어져야 하니 젊은이들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분류:고고학 연구
본문 라벨: 돈황 막고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