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5
3월13일[사순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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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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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iFLvt98t_E
[서울대교구 유재현 다니엘(송천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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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은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상으로 베푸신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믿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바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놀랍게도 그 선물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공평한 선물입니다. 마치 눈이 그 어디든 골고루 내리듯, 아침 서광이 세상 방방곡곡을 고루 비추듯,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고자 하는 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거부하고 도망가는 사람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밝은 태양 빛이 비칠 때, 온몸으로 만끽하지 않고,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막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유다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고위층 인사들, 나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 율법의 대가들로 자칭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범법자로 몰고 갔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죄, 신성 모독죄를 들이대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너무도 쉽게 선물을 받아안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던 백성이었습니다. 천대받고 무시당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단순하고 소박했던 그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앞에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꺼이 수용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살아생전 하느님을 뵙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이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는데, 우리 스스로 눈을 막고 돌아서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수시로 주님 축복이 우리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을 피하려고 어둡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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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AnBGRp31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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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목회에게 『하.사.시.』를 읽히는 이유>
2005년 영화 <아일랜드>는 두 명의 주인공인 링컨 식스 에코(Lincoln Six Echo)를 중심으로 줄거리가 전개됩니다. 링컨은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고도로 통제된 시설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구 오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믿습니다. 외부 세계로ㅁ 유일한 탈출구는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오염되지 않은 곳으로 추정되는 ‘섬’으로 가는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링컨은 시설의 주민들이 실제로 세계의 부유한 기증자에게 장기 이식 및 기타 생물학적 요구 사항을 제공할 목적으로 자란 복제품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섬은 조작된 개념입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실제로 장기 적출이나 대리모 역할을 위해 파견되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링컨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조던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조던은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조던이 섬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링컨의 끊임없는 설득과 여러 정황을 통해 조던도 조금씩 링컨을 믿어갑니다. 그래서 아일랜드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본래 세상은 오염되지 않았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전자를 준 이들에게 장기를 주기 위해 키워지는 클론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조던이 링컨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둘은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으면 둘의 사랑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사탄이 좋다고 하고 누구는 하느님이 좋다고 한다면 둘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라고 하십니다. 심판의 권한을 넘긴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당신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심판할 것이면 아버지가 심판하면 되지 왜 아드님께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을까요? 아드님의 심판이 당신의 심판과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당신과 대등하게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저도 조원동성당에 왔을 때 주교님께서 “전 신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고 하셨습니다. 주교좌 성당의 주인은 주교님입니다. 주교님께서 저에게 전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제가 판단하는 것을 주교님께서 인정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교님께서 저를 대등한 위치로 올려주시는 방법이셨습니다.
아기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으로 집어 먹으며 자신과 주위를 더럽힙니다. 이는 부모가 보기에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모릅니다. 그러면 아기와 부모는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기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치할 때 그들은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 수준으로 우리가 올라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저는 사목회 위원들에게 ‘하.사.시.’를 읽힙니다. 저의 삶의 옳고 그름은 이 책을 기준으로 합니다. 만약 이분들이 매일 이 책을 읽고 자신들의 삶을 이 책의 모범과 일치시킨다면 저는 이분들에게 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맡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저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심판하시는 대로 심판하실 분이기에 아버지의 모든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처럼, 신자들은 사제의 옳고 그름에 일치해야 하고, 사제는 주교의 옳고 그름이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대등해지기 위해 우리의 모든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일치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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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7년 겨울입니다. 저는 제대를 5달 앞둔 병장이었습니다. 일석점호를 앞둔 시간 내무반이 조금 소란스러웠습니다. 일직사관이 조용히 점호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낮에 일직사관과 장기를 두기도 했고, 평소에 친하게 지냈기에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일직사관도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우연히 손을 휘둘렀는데 그만 저의 뺨에 맞았고, 그때 저는 이가 깨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도된 바도 아니고, 저도 조용히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리고 깨진 이에 크라운을 씌었습니다. 어느덧 37년이 지난 먼 옛날의 기억입니다. 댈러스에 오기 전부터 이에 불편이 있었는데 별 일 아닌 줄 알고 스케일링만 받고 댈러스로 왔습니다. 진통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불편해서 치과엘 갔습니다. 검사결과 크라운을 씌운 이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합니다. 신경치료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니 발치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맨 안쪽에 있는 어금니이기에 굳이 임플란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의하였고, 20분 정도 걸려서 발치를 끝냈습니다. ‘앓던 이 빠지는 기분’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발치하고 나니 통증도 없었습니다.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은 제게 발치 후에 지켜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거즈를 발치된 부분을 넣어주고 이를 꼭 닫아 압력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압력이 있으면 쉽게 지혈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자연 치유력이 있어서 곧 새살이 돋고, 아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탄산음료를 마시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탄산가스가 발치 부분과 만나면 아무는데 지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발치 후에는 빨대를 사용하지 말고, 침도 자주 뱉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식도 죽이나 부드러운 것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죽을 먹었습니다. 음주와 흡연을 일주일 정도 금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지킬 수 있었는데 음주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댈러스에 부임해서 1주일도 안 되었기에 단체들과의 첫 인사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가볍게 한두 잔 마시면서 첫 인사의 자리도 마칠 수 있었고, 댈러스에서의 발치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모두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心身不二’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이 없는 몸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그릇된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몸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모두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몸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몸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은 어쩌면 인류라는 같은 영혼의 아픔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바람이십니다. 막힌 것은 뚫어 주시고, 얼어붙은 것은 녹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온 몸을 바쳐서 우리들 구원을 위한 ‘숨구멍’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얼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질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공동체에 사랑과 기쁨을 주는 ‘숨구멍’과 같은 존재인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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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17-30: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이나 고생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17절) 하시면서 당신의 행위는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써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고 분노한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여태라는 말은 아들이 말씀으로서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창조하신다면,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당신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같으시다. 안식일의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쾌해했다. 그런데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시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9절)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21절)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역사하시지 않고,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 또한 하느님의 본성상 그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신다.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6절)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과 업적은 당신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드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과 업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30절) 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분이심을 알고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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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어머니와 자녀는 같은 살과 피를 나눈 관계이므로 결코 서로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보다 더 강한 유대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임을 선언합니다. 특별히 복음에서는 이러한 유대가 아버지와 아들의 ‘동질성’으로 드러납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이고, 따라서 아들의 일은 곧 아버지의 일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오늘 본문 내용 바로 전에 벳자타 못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으로 유다인들이 분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그렇게 친밀한 사이로 규정한 적이 없는데 감히 하느님과 자신을 ‘부자’ 사이로 이야기하고 심지어 ‘동질성’까지 선언하니 불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오늘 독서에는 ‘어미와 젖먹이’의 관계보다 더 긴밀한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맺는 관계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도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요구되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 관계입니다. 최고의 사랑과 희생,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지고 계시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무엇보다도 큰 사랑이기에 가장 큰 고통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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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요한 5,17-18ㄱ)
예수님께서 ‘안식일’인데도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쳐 주시자(요한 5,9),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생각해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요한 5,16)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 쉬지 않고 병자를 고쳐 주는 일을 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는, 하느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쉬시지 않고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시던 일’은 천지창조 작업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일’은 인간들을 보살피시고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창세기의 ‘쉬셨다.’라는 말은, 천지창조 작업을 마무리하셨다는 뜻일 뿐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작업 후에도 쉬시지 않고 인간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시고 보호하시는 일은 계속 하고 계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시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에 당신도 요일과 상관없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만일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중단하신다면, 그 순간 우주 전체가 얼어붙을 것입니다. (생명력을 잃어서 모든 것이 소멸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날마다 숨을 쉬는 일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끊임없이 숨을 쉬고 있습니다. 만일에 숨 쉬는 것을 멈춘다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그 ‘숨’과 같은 것, 또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또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력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생명력이 끊어지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뛰고 있는 ‘심장’으로, 또는 온 몸 속을 흐르는 ‘혈액’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만일에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추고 혈액이 흐르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잊어버리고 있어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고, 우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더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모든 말씀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방법은, 복잡하고 어렵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ㅣ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방법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당장 서둘러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지금’이 곧 ‘영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어라. 내 말을 믿고 내 뒤를 따라라.”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쓰고 관심 갖고 걱정하다가 정말로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거나 버려도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것 하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이고, 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또는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아무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들, 우리가 능동적으로 버려야 할 쓰레기들입니다.(필리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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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는 너를 잊지 않고"(이사 49,15ㄷ), "다시 살리리라"(요한 5,21)
오늘은 부활 신앙의 사목적 국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38년 동안이나 중풍을 앓는 바람에 앉은뱅이로 살아가야 했던 병자를 벳자타 연못에서 만나신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셨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또 치유된 그 병자가 자신이 깔고 앉아 있던 들것을 들고 걸어감으로써 그 어떠한 행위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은 갑자가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시작된 이 비난은 급기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신앙까지 트집을 잡음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참에 본격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서 가르쳐주시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모르던 하느님의 모습들에 대해서 이렇게 일러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서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신관 교육내용의 초점은 부활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데, 그 죽은 이들을 일으켜서 다시 살리시는 부활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이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순종하여 선을 행함으로써 부활한 이들은 생명을 얻어 그야말로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지만, 이러한 일에 거부하여 악을 저지른 자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죽음을 살게 되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느님께서나 예수님께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듯이, 인간을 지어내신 창조주이시기에 가엾이 여겨서 하시는 일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도 하느님을 닮도록 지음받은 사람이 하느님을 닮기는커녕 죄악에 빠져 살아가는, 그런 죽은 모습을 모른 척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오시는 것이고, 그런 하느님의 일을 보고 예수님께서도 따라 하시는 것이며, 그런 예수님을 따라서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시는 가장 주요한 일은 사람들을 인간답게 부활시키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가도록 일으켜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일이 예수님을 추종하는 교회의 일이기도 합니다.
38년이면 거의 반평생인데, 벳자타 연못의 그 중풍병자는 반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가야 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에게는 그를 축하해 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심하게 오그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가 들것을 들고 걸어가자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어서 안식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를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서는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게서는 안식일에도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시고 당신은 아버지를 따라 할 따름이라고 대답하시니까, 어찌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냐며 또 따졌습니다.
이런 언동을 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은 살아 있어도 죽어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도무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없고 다른 이들의 기쁨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즉 괴물 같은 좀비였습니다. 반평생을 불구로 살아온 이를 연민으로 대하지 못하고, 안식일에 안식일다운 선행을 하시는 예수님을 거룩하게 보지 못하는 눈먼 장님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신들이 정해 놓은 율법 속의 신이라는 글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미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살아서 죽음을 살고 믿어도 지옥을 사는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사람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부활시키는 일에 동참할 당신 협조자들에게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이런 예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잘못된 교리 교육을 받아서, 부활과 부활 신앙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본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서처럼, 부활은 지금 일어나야 하는 현재의 일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입니다.
부활은 말 그대로 거듭 나는 삶이며, 사람이 본래 창조된 대로 하느님을 닮기 위하여 살아가는 진정한 삶입니다. 사순시기는 부활대축일로 시작되는 부활시기를 위해 준비하는 때이듯이, 주님 수난의 사십일 동안 우리는 부활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활은 죽은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며 실제 부활하는지 하지 않는지 검증할 방법도 없는 막연한 일로 치부하고 있고, 더욱이 죽었던 육신이 다시 숨을 쉬며 살아나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활은 상상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간직했던 부활관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말씀대로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닮고자 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우리의 부활은 그제야 시작될 것입니다. 남은 사순시기에도 이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부활을 살기 위한 묵상과 기도가 여러분의 고신 극기와 절제 인내의 지향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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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어제 복음(요한 5,1-16 참조)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반감을 품고 그분의 치유 행위를 비난하는 유다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하셨고,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하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고발하였습니다.(5,17-18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깨닫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상대로 스스로 변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이루는 일치를 강조하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 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시며, 오직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하시어 행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5,19-20.30 참조)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 곧 하느님과 맺는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강조하시고자 ‘아들’이라는 개념을 여러 차례 사용하셨습니다.(5,20.22.23.25.26.27 참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세상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파견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여 생명을 주는 일(5,21 참조)과 심판하는 일(5,22 참조)을 수행하십니다.
아버지에게 유보된 일이 이제는 아들에게 주어진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부여받은 권한으로 믿는 이에게 생명을 주시고(5,24-26 참조),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5,27-30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따른 ‘아들’이셨습니다.(5,30 참조)
그분의 온 생애가 요한 복음서의 증언을 뒷받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와 맺으신 관계로 초대하시면서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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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폭설 속 父情, 체온으로 딸 살리고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몰아친 폭설 속에 아홉 살 딸과 함께 고립된 50대 아버지 오카다 미키오(岡田幹男•53•어업)가 자신의 체온으로 추위를 막아 딸 나쓰네(夏音•9•초등 3년)를 품에 안아 구하고 자신은 숨졌다고 마이니치(每日) 신문 등 일본 언론이 3월 4일 보도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의 사랑만큼 숭고하고 희생적인 것이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보다 더 크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셔서 가나안의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셨지만 끝내 그들은 하느님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제멋대로 하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그들은 머나 먼 이국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내 사랑으로 감싸시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마치 동사(凍死)의 위기에 처한 불쌍한 딸을 감싸 안고 보호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하느님께서는 유배에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시려 손을 내미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유대인들에게 소개하지만 그들은 하느님 모독으로 예수님을 몰아세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아예 귀를 막고 주님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 18)
요한 복음사가는 초대교회의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직접 체험하신 분입니다. 사도들이 많은 박해와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처럼 예수님과 자신들과의 일치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유대인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친근하고 사랑으로 체험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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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5,17.30)
저는 2008년 심장 절개 수술open heart surgery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외부 기계의 도움을 받은 채 심장에 얽힌 바늘들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요. 도대체 몇 시간 동안 수술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고, 아주 긴 시간의 수술이 끝난 다음 회복실로 옮겨지고 그곳에서도 몇 시간 동안 의식이 깨어날 때까지 홀로 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마취 상태였기에 아무것도 느끼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음을 저는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땐 이미 제 어머니는 돌아가셨기에 그런 상태에 있는 저와 함께하지는 못하셨겠지요. 하지만 이사야 말처럼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49,15)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셨다고 믿으며, 사실 의지적으로 어떤 기도도 할 수 없었지만, 저는 무의식적 상태에서 제 존재 자체로 기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저를 “위로하시고, 가련한 저를 가엾이 여기셨다.”(이49,14)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때 중환자 가족 대기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홀로 내 여동생 안나가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어난 후에 알았습니다. 사랑은 이렇듯 자신을 필요한 어떤 누군가와 함께 있음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신”(5,30)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살리시는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자 안식일에 벳자타의 환자를 치유한 까닭에 본의 아니게 유대인들한테서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이며 거울입니다. 주님은 그러기에 언제나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아들도 일하며”(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자신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5,19)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빠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 곧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 보다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겠지만”(5,24) 당신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당신의 심판은 올바르다.”(5,30)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생명 운동을 지향하고 생명을 죽이는 죽음 문화를 배척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에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5,17)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선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벳자타 못가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던 병자를 치유하여 들것을 걷어들고 걸어가게 하심으로써 안식일 금지규정을 어기신 것에 대한 예수님의 해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삶은 동시대의 사람들은 물론 저희와도 분명히 다른 길을 걸으셨고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자신보다는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이 자기 삶의 시작이며 마침이었기에 그토록 매 순간, 매일 얘를 쓰면 사셨던 것입니다. 어느 노래 가사의 ‘전쟁과 같은 사랑’이란 말마디처럼 예수님은 전쟁하듯이 매일 매 순간을 처절하고 진지하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왜 그렇게 사셔야 하는지 도무지 알 재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사신 까닭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이 본디 자신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겠지만, 혹 떼러 갔다 혹 붙여 온다는 말처럼 이 말씀을 빌미로 사람들의 화를 더욱 북돋우어 이젠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에다 하느님 아들이라고 신을 모독하는 죄’까지 덤터기를 쓰게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처절하게 사셔야만 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분의 의향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시선이나 관심은 아빠 하느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실까요? 오늘 복음에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10번 사용하였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7번 사용하였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유독 요한복음에서는 아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관한 주제는 예수님 메시지의 중심이자 요한복음의 핵심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드러난 하느님이신 아버지는 한 마디로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다음 복음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3,16) 그러기에 세상에 파견되신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 구원 곧 사람을 살리는 일은 다 아버지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었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인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님은 당신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그대로 하신 것이고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까닭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3,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오늘 복음은 구체적으로 당신의 파견 목적을 드러내 밝히십니다. 결국 아들이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즉 아버지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고,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고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아들이신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시는 아빠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의 비밀이며 신비입니다.(5,19~21)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신 당신의 사명과 맡기신 일이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의 하나 됨인 구원임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까.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5,24)
“주님, 당신처럼 우리의 삶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살리는 삶이 되게 하여주시고, 저희의 관심이 언제나 저희의 뜻이 아니라 저희를 사랑으로 구원하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완수하는 데 힘쓰게 하여주시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는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늘 저희와 함께 하여주시고 저희 또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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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늦은 밤에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이제 곧 자살할 것이라면서 자기의 지금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새벽까지 이 여성과 대화를 나눴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제시했습니다. 긴 설득 끝에 이 여성은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이 여인을 만난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에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것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힘을 내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프랭클 박사의 자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세가 마음을 바꾸게 했고 자기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자세에서 힘을 얻게 되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나의 말도 귀 기울여 주는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음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하는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을 들어주시고, 당신의 따뜻함 품으로 안아 주십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셨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죽이려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사랑임에도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자체를, 즉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삶 안에서 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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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그렇게>
요한 5,17-30 (아드님의 권한)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늘 그렇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지치고 힘들어서
멈춰선 자리에서
여태껏 쉬지 않고
앞서가고 계시는
나의 님 발자국 따라
또 한걸음 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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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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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 새 - 시인과 촌장- 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매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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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 146,1-2)
하루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고 귀한 선물입니다. 3월은 성 요셉 성월이자 은총과 회개의 사순시기입니다. 3월31일 부활 대축일까지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참 좋은 시간입니다. 문득 어제 어느 노정치가에게 방송 시 언뜻 들은 삼실(三實)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실(眞實), 절실(切實), 성실(誠實)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세 말마디는 그분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려는 사람이라면 삼실의 삶에 이어 삼감(三感)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 삼망(三望)의 사람이 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감사(感謝), 감동(감동), 감탄(感歎)의 삼감(三感)이라면, 절망(絶望), 원망(怨望), 실망(失望)이 삼망(三望)입니다. 참 감사하고 신기한 것은 제가 여기 요셉 수도원에 만36년 동안 정주하면서 막막하고 답답했을 때는 있었어도 결코 삼망(三望)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 믿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다면 삼망(三望)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막막하고 답답할 때 참 많이 바라봤던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이었습니다. 자주 되뇌었던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말마디였고, 이어 참 많이도 인용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제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무려 27년전 시이지만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늘이 평생 도반인 하느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저를 상징합니다. 하늘과 산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과연 날로 신뢰와 사랑 깊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 여기가 천국입니다.”
아름다운 수도원 경관에 부러워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불편하고 힘든 남남만도 못한 관계라면 거기가 연옥이요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공동체내에서 관계의 훈련,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에 공동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란 물음만 있고 하느님이란 답이 없으면 평생 헤매게 됩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과의 관계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이사야 예언자이고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하느님은 아버지로 더 구체성을 띄게 됩니다. 3월 사순시기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해야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참된 영성의 표지가 겸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은 얼마나 좋은신 분인지요! 은총의 사순시기에 참 적절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의 참 아름다운 고백시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니 인공지능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영적 진보라기 보다는 인간 공동체 정신의 퇴행, 영성의 쇠퇴를 보여줍니다. <녹색평론 185호 2024년 봄호>의 특집은 “인류는 인공지능 시대를 건너갈 수 있을까”였습니다. 인공지능이 추세라 하지만 저에게는 “판도라의 열린 상자”처럼 웬지 인류의 미래가 불길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시를 쓰려면 하느님의 예언자이자 시인인 이사야처럼 이런 희망과 생명, 빛이 넘치는 구원의 시를 써야 할 것입니다. 평생 도반이자 평생 착한목자이신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있는 참사람의 원형 이사야 예언자요, 예언자의 다음 하느님 사랑의 고백은 절정(絶頂)이자 절창(絶唱)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못 박듯 한 하느님의 고백은 얼마나 절절한지요! 바로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도록 깊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지칭하는데 어머니를 능가하는 “사랑의 어머니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로 비견되는 하느님에 이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주저함없이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깊이할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원대한 평생 목표가 하나 있다면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하느님을 날로 닮아감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백을 과감히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이 바로 그때, 구원의 때입니다. 모든 말씀에 앞서 반드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마디가 강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의 깊이를 지닌 아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가까워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3월 성 요셉 성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양부로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父性)과 하느님 어머니의 모성(母性)을, 양성(兩性)을 겸비한 참으로 온전한 요셉 성인처럼 생각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기르시는 아버지시오,
정결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께 간절히 청하오니,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 주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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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태 사랑>
오늘 이사야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시온에게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대답하고,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다시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엇박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은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하느님은 은혜의 때에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의 날에 도와주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은혜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온만 이런 것이 아니고 사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은 이렇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고, 고통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그때는 느끼지 못하여 버림받았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은혜로 느끼곤 합니다. 사랑과 고통의 불일치요 때의 불일치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우리 인간의 불일치와 달리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 사이의 일치를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 친히 이렇게 정답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관상적 믿음이고, 믿음의 관상 때문입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런 믿음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관상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사랑이라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그것이 바로 은총임을 봅니다.
그리고 벌어진 일들과 그 일을 벌인 인간들을 볼 때 그것들에 의해 현혹되지 않는 하느님 관상을 하기에 그것들로 인해 실망이나 절망이나 포기를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 생명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여태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여태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중단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좌절감이나 절망감 때문에 중단치 않는 사랑입니다. 내 사랑을 배신하는 그 인간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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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
<예수님처럼!>
오늘 복음(요한5,17-30)은 '하느님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관계', '대등한 관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한 5,30)
오늘 복음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관계가 이러한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들려왔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열심히 너를 위한 일, 너를 살리는 일을 하는 것'... 예수님처럼 '나의 마음이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을 향해 있는 것'…… 예수님처럼 '너를 사랑하고, 너를 용서하는 것'.…… 예수님처럼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고, 기도하고, 성경을 가까이합니다.
서로가 예수님처럼 되려고 애쓰는 바로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천국)'입니다.
구체적인 나의 삶의 자리가, 나의 가정과 일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예수님이 되려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애써 봅시다!
그 '애씀의 보상'이 바로 '기쁨과 행복의 모습인 파스카(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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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FMDjY3i7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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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 25)
곳곳마다
생명의 꽃들이
하나둘씩
피어납니다.
바로 지금이지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라는
소중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살리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걸어가야 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그 무엇을
우리가 더 바라고
더 구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혼동하고 있듯이
주님과
주님 아닌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주님 앞에
우리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주님의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어둠을 걷고
밝음을
드러내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생명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지금 이순간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가리칩니다.
생명 아닌 것이
없습니다.
꽃을 다시
피우시듯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복음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바로 지금이
눈부신
생명을 만나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생명 안에
살고있는
우리들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충분합니다.
생명의
목소리를
듣는
가장 좋은
생명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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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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