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 하나에 100만 원’… 판치는 브로커, 눈감은 檢警
6·1지방선거에서 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A 씨는 선거운동 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거에 도움을 주겠다”고 해서 만난 그 인사는 놀라운 말을 꺼냈다.
“이 지역은 경선 통과가 곧 당선이다. 경선 여론조사만 이기면 되는 건데, 휴대전화 300개만 동원하면 무난하게 이길 수 있다. 다만 돈이 좀 든다. 휴대전화번호 1개에 100만 원이다.”
휴대전화를 무더기로 동원해 여론조사를 조작하는 수법으로 경선 1등을 만들어 주겠다는 선거브로커의 제안. A 씨가 “불법인 데다, 3억 원인데 그런 돈도 나는 없다”고 하자 브로커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누가 현찰을 받나. 시장 된 뒤 내 몫만 약속해주면 내가 알아서 회수하겠다.”
추후 시청 인사와 각종 인허가 과정에 개입해 돈을 챙길 테니 약속을 해달라는 요구다. 결국 A 씨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경선에서 탈락했고, 해당 시(市)의 시장은 지역 정가에서 무명이던 인사가 당선됐다. A 씨는 “당선자에게도 저 브로커가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선거 끝나고 다른 지역에서 출마했던 후보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다들 브로커로부터 제안을 받았더라”라고 했다.
실제로 전주지법은 지난달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선거브로커 2명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처벌 받은 선거브로커는 이중선 전주시장 예비후보에게 접근해 “내가 기업에서 돈을 받아 당신 선거운동에 쓸 테니, 시장에 당선되면 전주시에서 진행하는 건설공사 사업권을 그 기업에 보장해줘라”고 요구했다. 제안을 받은 이 예비후보는 “선거브로커의 부당한 요구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제안 사실을 폭로하고 예비후보직에서 사퇴했다.
이처럼 여야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최근 지방선거에서는 불법의 양상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국회의원 등 유력 정치인에게 뒷돈을 주고 공천을 받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선거브로커들이 개입해 당선과 이권을 맞바꾸는 일이 만연하다는 것. 정치권 인사들은 “특히 여야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이 선거브로커들의 주 무대”라고 입을 모았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가 왜곡되는 건 큰 문제다. 게다가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을 낳는다. 영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 여권 인사는 “지역 군청, 시청에서는 ‘3서2사’라는 말이 유행한 지 오래”라고 했다. 서기관 승진에 3000만 원, 사무관 승진에 2000만 원의 뒷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지방의원들의 재량사업비는 건설사 리베이트의 근원으로 꼽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달한 건 정치권의 책임도 있지만 경찰과 검찰의 무능력도 한몫했다. 한 야권 인사는 “전주의 경우 이 예비후보가 공개 폭로를 했으니 마지못해 경찰의 수사가 이뤄진 것”이라며 “전국적으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데 수사 당국이 모르는 건지 모른 체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6·1지방선거의 공직선거법 위반 공소시효는 12월 1일까지. 이번에도 검경이 눈감는다면 선거브로커는 4년 뒤에 더 판치게 될 것이다.
한상준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