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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과 나의 인연 이야기
글 월탑 박경훈(月塔 朴敬勛)
8. 10년 행자(行者)
스님의 범어사 생활은 선방에서 시작되었다. 선방생활과 참선을 경험한 적이 없는 스님이 선방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된 것은 범어사 스님들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불광법회에서 한 이 말로써 행자가 되는 것이나 선방생활과 참선, 이 모두가 전혀 계획에 없던 일임을 알 수 있다.
범어사 대중은 선방의 행자인 스님을 고처사라고 불렀다. 나이가 많은 탓이었다. 나이가 많은 것은 행동에 제약을 가져오는 요인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선방의 행자 노릇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다.
운력을 할 때는 남보다 앞장을 서야 하고 좌선을 할 때는 육체적 고통과 산란해지는 마음과 싸워야 했다. 뒷날, 스님이 두 번의 큰 수술을 받고 투병을 할 때, 괴롭지 않은가 물으면,
“육체의 고통을 느낄 때, 아직 살아 있는 것을 실감한다.” 고 말하는 스님은 이때의 선방생활이 병고보다 훨씬 더 힘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 고된 3개월간의 동안거가 끝났을 때, 스님은 박종홍 교수가 권한 선의 실수(實修)를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마음을 내었다. 참선을 해서 그 결과가 어떠하든 일단 선과 맞붙어서 한판 씨름을 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뜻을 동산스님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동산 스님은 의외로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자 오기가 치솟았다. 어묵동정(語黙動靜)이 다 선이라는데 특별히 허락을 받고 말고 할 것이 없지 않은가 하였다.
안거가 끝난 선방은 한산했다. 참선하던 스님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고 상주하는 스님 서너 사람과 간혹 찾아오는 객승이 있을 뿐이었다. 자연히 행자가 하는 일도 줄었다. 시간이 넘쳐났다. 정해진 일과 외에는 좌선과 간경에 몰두하였다.
『화엄경』에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란 말이 있다.
“처음 발심했을 때, 곧바로 정각을 성취한다.” 고 한 이 말이 그때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비록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화엄경』의 이 말은 참선이든 간경이든 열심히 하면 거기에 인생의 ‘끝’이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님은 인생의 궁극을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스님의 저서 가운데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라고 하는 책이 있다. 스님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인간을 편력자라고 하였다. 마음이 평화와 안정과 행복을 찾아서 끝없는 길을 가는 길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방황은 언제 끝나며 “필경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묻고 있다. 또한 “…… 하고 많은 의문이 우리 가슴에서 솟아오르는데 그 의문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생의 뿌리에서 끓어오르는 근원적인 질문”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그동안에 썼던 글을 모아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라고 하는 책의 제목을 정하고 나서, “나는 소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생에 대한 의문을 놓지 못하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이 책의 독자 중에 생에 대한 의문을 가진 이가 있다면 용기를 내어 회피하지 말고 그 의문을 끝까지 추구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렇게 남들에게 권하는 ‘생의 끝’에 대한 추구였으니 본인 스스로는 어떠했을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치열한 좌선과 밤을 지새운 간경은 끝내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동산노스님은 건강이 악화된 스님의 요양을 위해서 기장의 포교당으로 보냈다.
머리를 깎고 염의(染衣)를 입었으나 행자인 스님은 포교당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했다. 예불을 하고 불공을 올리는 의식을 집전했다. 그러나 축원과 법문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구족계를 받은 스님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서 스님의 비구관(比丘觀)의 일단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서천스님의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金剛經讀誦救國願力隊)에 참여해서 국민계몽운동을 펼 때도 소천스님이 대중강연을 권하였으나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으면 “불법은 물론, 나를 내가 모르는데 대중을 향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KBS TV 대담에서 스님은 “‘안다’는 것은 관념적인 지적 해답이 아니라 직하(直下)에 주체적으로 자기를 파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기를 파악하는 것, 그것은 스스로를 아는 것이다. ‘나’를 모르고서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안다고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행자시절로부터 40년이 지난 뒤에 한 말이지만, 그때도 그러한 생각에는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대중을 향해서 강연과 법문을 하지는 않았으나 청장년의 재가불자들이 모여서 불교를 공부하고 진리를 탐구하면서 토론하는 모임에는 열성을 쏟았다. 스님의 주도로 부산에서는 동래의 금정사에서, 서울에서는 대각사를 중심으로 토론회가 활발하게 열렸다. 토론회가 빈번하게 열리면서 모임은 자연히 회를 결성하게 되고 매주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신행단체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부산에서 발족한 법등가족법회이다. 스님이 주관하는 이 법회의 특징은 사찰에서보다도 재가불자의 가정을 순회하면서 열리는 점이었다. 때때로 출가한 스님이 초청되어 법문을 하고 그 날의 법회를 이끄는 경우가 있었으나 일반 서민의 가정에서 재가 불자에 의해서 정기적으로 법회가 열리는 예는 없었다. 스님의 법등가족법회가 최초였다.
또 하나는 서울 대각사에서 1956년에 결성한 대각회이다. 스님이 초대회장을 맡은 이 회는 황산덕, 이종익, 김경만 등 지성인들이 대거 참여한 점이 특색이었다. 대각회가 출범한 1956년의 불교계는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정화분규로 인하여 두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였다. 정화불사를 적극 지지하고 동참한 대각회 멤버들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진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종익 교수의 보조(普照)를 종조(宗祖)로 하는 조계종의 종조론은 비구 측이 주장하는 한국불교의 정통성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황산덕 교수의 중론을 바탕으로 한 법철학의 이론은 불교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스님이 주도한 법등가족법회에서 주목할 것은 가정의 불교화, 가족 전체의 불자화를 지향한 점이다. 스님은 개인이 불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속한 가정이 불교화되고 가족 전체가 불자화 됨으로서 가정의 구성원이 화목하며 가족이 행복하고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이지만, 그것이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사회라는 점을 중요시 하였다.
인간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이 불교화하면 그것들이 모여서 인간사회를 불교화하고 나아가서 인류 전체를 불자화하는 길이 트인다고 본 것이다. 또한 그러한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자 개개인이 깨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대각회가 지향하는 불자 개인의 깨달음과 실천은 그러한 점에서 법등가족법회와 서로 보완적인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님이 불광회를 창립하고 그 산하에 월간 『불광』을 비롯해서 불광법회, 불광출판부, 불광유치원, 불광포교원, 불광교육원 등을 둔 것은 그 근저에 그러한 이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불광법회가 지역 단위의 조직을 갖고 가정을 중심으로 법회를 운영하는 것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님이 생애를 통해서 마하반야바라밀운동을 펴 깨달음의 보편화를 추진하고 보현행원 사상을 고취하여 불교의 실천을 강조한 것 등은 모두가 그러한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산노스님은 법등가족법회와 대각회, 그리고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 일로 분주한 스님에게 늘 말하기를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날 중(僧)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때나 요즈음이나 출가를 위해 절에 살면서 십 년 동안이나 행자생활을 한 예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마 스님의 십 년 행자생활은 거의 전무후무한 일이고 특별한 일일 것이다. 남들은 하루라도 빨리 계를 받고 행자생활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오직 스님만이 스스로 원하여 십년 고행을 감수하여 철저하게 구도의 길을 걸었으니, 어찌 후세의 귀감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출가문의 서열은 계 받는 순서에 의해 모든 것을 정하므로 절에서 십 년을 생활해도 계 받지 않으면 역시 가장 끄트머리가 된다. 그로 인해 겪게 되는 불편과 부당함이 많았을 텐데 오히려 그런 어려운 과정을 수행의 계기로 삼은 스님었으니 말이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3 구국구세의 횃불 |
첫댓글 가정의 불법화에 관한 스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스님이 주도한 법등가족법회에서 주목할 것은 가정의 불교화, 가족 전체의 불자화를 지향한 점이다. 스님은 개인이 불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속한 가정이 불교화되고 가족 전체가 불자화 됨으로서 가정의 구성원이 화목하며 가족이 행복하고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이지만, 그것이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사회라는 점을 중요시 하였다."
가족이 함께 법회에 참여하며 함께 부처님 말씀을 나누는 가정을 생각하면 좋습니다. 아직 그러지를 못하는 나의 가정을 돌아보며 인연지어 가야겠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공양 고맙습니다. 새삼 큰스님의 생애가 크게 다가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