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 권기옥
일제 식민지시대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주독립의 비원을 안고 비행사가 되기 위해 중국대륙으로 갔다.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 “전쟁의 승패는 하늘을 제패하는 자에게 있다.” 나라를 잃은 그들에게 비행기는 낭만적인 꿈이기에 앞서 독립투쟁의 무기로 다가왔다.
◆ 1922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향주 홍도 여학교에 다니던 권기옥(오른쪽)
◆ 1924년 7월5일 권기옥이 윈난항공학교에서 첫 단독비행에 성공한 직후 찍은 기념사진
◆ 1926.4.20 동로군 부비행원의 임명장
중국의 항공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운 젊은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중국군에 들어가서 일본과 싸운다. 대륙의 하늘을 새벽별처럼 수놓고 이역만리에서 유성처럼 스러져간 젊은 비행용사들 중일전쟁의 막바지, 살아남은 비행사들은 조국진공작전을 세운다.
일명 ‘광복군의 비행대 편성과 조국진공작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는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계획'에 덧붙여 ‘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그 운용 방안’을 입안했던 것이다.
◆ 낡은 사진으로 남은 권기옥의 군복 차림
이 작전은 미 공군으로부터 비행기를 차용하고 중국 공군에 복무중인 한인 장교(조종사 및 정비사)를 광복군으로 전환시켜 비행대를 편성함으로써 광복군 총사령부와 국내 지하군과의 연락 임무 및 진공작전을 담당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참여한 한인 비행사들은 중국 공군 대령 출신으로 당시 광복군 총사령부의 참모처장이었던 최용덕, 운남항공학교 출신인 권기옥과 이영무, 모스크바항공학교 출신인 김진일과 장성철, 독립운동가 손두환의 아들로 장세스의 전용비행기 부기장을 지낸 손기종 등이었다. 이 명단에서 이채로운 것은 권기옥이라는 여성비행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 1928년 손정방 공군 비행기를 접수하러 갈 때 중절모를 쓴 남장의 권기옥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은 1917년 5월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날개의 꿈을 키운다.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시절 3.1운동 참여와 비밀활동으로 멸치배를 타고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두 군데 항공학교에서 여자라고 입학을 거절당하자, 그녀는 임시정부의 추천서를 품고 직접 멀고먼 운남으로 향한다.
1923년 12월 하순 운남에 도착한 권기옥은 성장인 당계요를 찾아가서 직접 담판을 지어서 입학을 허가받는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군벌인 당계요 성장은 비행사가 되겠다고 이국만리를 찾아온 조선 소녀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해준 것이다. 마침내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여 자랑스러운 윙 배지를 달게 된다.
◆ 운남항공학교의 모습과 유시천 교장
1925년 5월 다시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임정의 어른들을 찾아가서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겠으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임정에는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1926년 봄 권기옥은 선배 독립운동가의 소개로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의 항공대에 들어가기 위해 북경으로 간다. 당시 풍옥상의 항공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서왈보가 남원항공학교 교장 겸 동로군 항공대 대장으로 있었다. 1926년 4월 기옥은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행원으로 임명된다.
◆ 권기옥 선생의 비행학교 필업증서(왼쪽)와 항공처 부비행사 임명장.
◆ 권기옥 선생의 동로항공 사령부 비행사 위임장(왼쪽)과 표창장.
◆ 권기옥 선생의 국민정부군 항공 제1대 상위 관찰사 위임장(왼쪽 위)과 편역원 위촉 공군상위 임명장(왼쪽 아래). 오른쪽은 권 선생의 국군수첩
◆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왼쪽에서 두번째), 이탈리아인 교관(가운데),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이월화(오른쪽 세번째)
1928년 북벌전쟁에서 승리한 국민혁명군이 손정방 군벌의 항공기를 접수하여 공군 창설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기옥은 상해로 가서 중국 공군 비항원으로 임명받는다. 여기서 권기옥은 당시 손전방 공군의 비행사로 있다가 국민혁명군에 합류한 최용덕 비행사를 만난다.
1931년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은 1932년 상해를 공격한다. 상해전쟁이 터지자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나가서 일본군에 기총소사를 퍼붓는다. 기옥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어 전면전이 되고 중국이 승리하면 조선도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나약한 장개석 중국 정부가 만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정전협정을 맺자 권기옥은 통탄한다.
◆ 1935년 중국을 돌며 선전비행을 하던 당시 조종복을 입은 권기옥.
1935년은 비행사로서 권기옥이 꿈에 한껏 부풀던 해였다.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 부인이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 청년들이 비행기가 무서워서 공군에 자원하지 않자 고심 끝에 여류비행사의 선전비행을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전비행은 상해에서 북경까지 날아가는 화북선, 화남선,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일본까지 날아가는 남양선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오른쪽), 이탈리아인 교관(가운데), 재미 중국인 여자 비행사 이월화(왼쪽)
상해에서 선전비행의 연습과 실무가 착착 진행되었다. 기옥은 남양선 비행의 마지막 순간을 일본 폭격으로 장식하겠는 뜻을 세우고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에서 대학생 시위가 확산되면서 정국이 불안해지자 선전비행이 무산되고 말았다.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권기옥은 육군참모학교의 교수직을 맡고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 등을 강의한다.
1939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와서 정착하자 권기옥은 임정인사들과 빈번하게 교류한다
◆ 중경에서 재건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오른쪽에서 두번째)
1943년 2월 23일에는 좌우로 분열되어 있던 부인들을 설득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선전부장을 맡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했고 결국 평남도청 폭파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다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을 한다.
이후 이승만, 안창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서 1923년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남서부 윈난 육군항공학교에 입학을 권유받게 됩니다.
이때 그녀는 조선총독부를 공중에서 폭파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입학을 하게 된다.
1943년 여름부터 권기옥은 중국군에서 비행사로 활동하던 동지들과 함께 한국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한다.
이 계획은 2년 후인 1945년 3월 임정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중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으로 결실을 맺었다.
1945년 봄 권기옥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이제야말로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를 폭격하리라던 19살 이후 20년간 품어온 꿈이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조국 진공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눈앞에 두고 권기옥은 힘차게 날개짓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권기옥은 조국으로 돌아와 최용덕, 이영무 등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가 된다. 최용덕 장군이 공군창설의 아버지라면,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으로서 공군창설을 도왔던 권기옥은 ‘공군의 어머니’로 불렸다.
◆ 2년 동안 여성 비행사가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동안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영사관은 권기옥 암살 시도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고 권기옥은 고비를 넘기며 무사히 졸업했다.
◆ 의열단 아나키스트
잠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조국의 독립을 잊지 않고 의열단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항일운동의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 1937년 3월 난징을 방문한 시동생 이상화 시인(왼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과 남편 이상정(오른쪽)의 어깨에 팔을 걸친 권기옥.
1988년 타계하며 현충원에 안장된 그녀는 국가보훈처에서 2003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은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한국의 여성이기도 합니다.
◆ 한국전쟁 당시 전방을 시찰하는 권기옥과 지청천 장군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권기옥은 국방위 전문위원으로서 최전방 격전지를 돌아다니며 국방위원의 임무를 수행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조사하고,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의 격전지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도 갔다. 금화지역 전방에서 급식 조사를 하던 중에 폭설이 내려 일주일을 갇힌 일도 있었다.
◆ 한국전쟁중 미공군 헤스 중령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