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起(苦集)에 대해서 內外로 수관한다.
dukkhasamudaye ajjhatta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대념처경 법수관] 慾欲(5蓋)에 대한 법수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내로(혹은 안에) 慾欲이 있으면, <*동사의 역할: santaṃ>
'나의 내로(안에) 慾欲이 있다.'라고 般若한다." <*동사: atthi>
☜ 내 안에 감각적 慾망(의 대상)에 대한 欲구가 있다.
kathañca pana, bhikkhave, bhikkhu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pañcasu nīvaraṇesu?
idha, bhikkhave, bhikkhu
santaṃ vā ajjhattaṃ kāmacchandaṃ
‘atthi me ajjhattaṃ kāmacchando’ti pajānāti,
Herein, O bhikkhus, a brother,
when within him is sensuous desire,
is aware of it,
reflecting: 'I have within me sensuous desire.'
.........
So does he, as to ideas, continue to consider them,
both internally or externally, or internally and externally together. [PTS]
There is the case where, there being sensual desire present within,
a monk discerns that 'There is sensual desire present within me.'
.......
In this way he remains focused
internally on mental qualities in and of themselves,
or externally on mental qualities in and of themselves,
or both internally and externally on mental qualities in and of themselves. [Thanissaro Bhikkhu]
iti
ajjhattaṃ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이와 같이 혹은
[慾欲(5蓋)]라는 法들에 대해서 法을 內로 수관하면서 머문다. 혹은
[慾欲(5蓋)]라는 法들에 대해서 法을 外로 수관하면서 머문다. 혹은
[慾欲(5蓋)]라는 法들에 대해서 法을 內外로 수관하면서 머문다.
yaṃ kho, bhikkhave, dukkhe ñāṇaṃ,
dukkhasamudaye ñāṇaṃ,
dukkhanirodhe 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ñāṇ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苦에 대한 知, 苦集에 대한 知, 苦滅에 대한 知, 苦滅道에 대한 知>가 正見.
<苦集에 대한 知(ñāṇa)>도 正見.
<苦集에 대한 知(ñāṇa)>란
正定(sammāsamādhi)에 의해서 생겨나는 正知(sammāñāṇa =正見sammādiṭṭhi)
sammāsamādhissa sammāñāṇaṃ pahoti
[(無明 혹은 愛支)緣起>에 대한 知.
즉 [無明을 연하여 ~ 名色을 연하여~
혹은 66(욕계 愛支) 緣起(본 대념처경)]
iti
ajjhattaṃ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이와 같이 혹은
[緣起(苦集)]라는 法들에 대해서 法을 內로 수관하면서 머문다. 혹은
[緣起(苦集)]라는 法들에 대해서 法을 外로 수관하면서 머문다. 혹은
[緣起(苦集)]라는 法들에 대해서 法을 內外로 수관하면서 머문다.
(身도 受들도) 心도 法들도 모두 內外로 수관하면서 머문다.
緣起(苦集)法도 또한 內外로 수관하여야 할 수행 주제인 法.
緣起(苦集)을 內外로 수관한다.
‘atthi dhammā’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緣起(苦集)]라는 法들이 있다.'라는 待機된(paccupaṭṭhitā) 기억(sati)이 있다.
知(ñāṇa)하는 만큼 記憶나는(paṭissati)만큼 까지만 ☜ 이것이 아빈냐(자내증)
의지하고 않고 살며 또한 세상에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
*atthi dhammā
atthi : 3인칭 단수(cf. 복수 santi) dhammā : 복수.
☜ 복수형이 나타나지 않고 단수형이 나타나는 것은
동사의 불변사 용례 ?
같은 형태의 동사적 불변사?
atthi, bhikkhave, mano, atthi dhammā, atthi avijjādhātu.
atthi mano, atthi dhammā, atthi manoviññāṇaṃ,
atthi mano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atthi tattha māro vā mārapaññatti vā.
natthi mano, natthi dhammā, natthi manoviññāṇaṃ,
natthi mano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natthi tattha māro vā mārapaññatti vā”ti.
첫댓글 불변사란 동사를 수식하는
(혹은 장소 등을 나타내는) 부사라는 좁은 의미보다
<性, 數, 格, 時>와 상관 없이
'모양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로 쓴 글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제가 보건데는 내와 외의 구분은 나를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봅니다. 내안의 일은 내 내 밖의 일은 외.
그러나 결국 내외라 하더라도 "무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둘둘 말아서 버려야 할 법에 불과하지요.
봄봄님도 새해에 더욱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봄봄'님.
'빠알리'는 <목갈라나 문법>과 <갓짜야나 문법>이라는 '두 문법'을 기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
그런데.......... 이 지구상에........ 그 두 문법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 거의 사라지고 있다고 ...... 제가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목갈라나 문법>의 경우에는........ 전공학자 분이 ........ 현존 9분 정도 살아 계시는데 ...... 그 분들 중 8분은 이미 ..... 너무 뇌쇄하셔서...... 힘들고요...........
오직......... 나머지 '한 분'께서 ......... 지금 ......... 한국인 4분 정도에게 ..... 강의하시고 계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아위자 말하자면.........국내는 물론이고.......... 이 지구상에서 ......... 오직 '한 분' 정도만........ <빠알리 니까야>를 '문법적으로' 이해하시는것이 가능한 ..........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 <현실> 마져도 ....... 얼마 남지 않은 '현실'인 것이......... '남은 그 한 분'의 .......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자 분이 '없다.'는 점.
@아위자 아무도 관심가지고 있지 않고 .......... 기존의 학자들은........ 엉터리 주장만 늘어 놓고 있고........ <돈과 명예>만 쫒고 있다는 점.
@아위자 <목갈라나 문법>의 중요성을 .......... 아무리 ....... '아위자'가 강조해 보아도 소용없는 일인 것이....... 그 중요성 자체를 인식할 사람이 .........없는 <현실>!
@아위자 지구상에 <오직 '한 분'>만 남아서 ......... 뭘? 하겠다는 것임? .........
목숨을 걸고서 라도 ......... 배우고자 하시는 분도 없는데................ 이미 끝난 이야기라는 점.
@아위자 우리나라에도 <산스크리트>는 '전공자'가 있습니다. 인도에도 ...... 세계적으로도 .......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는 '전공자'가 없습니다. 없다니까요. 오직 한 분 ...... 남아 있는 분이 ....... 있을 뿐이라니까요. 지구상에.
@아위자 부처님의 원음은 '빠알리'입니다. 그 '빠알리'를 <산스크리트> 전공자 분들이 '번역'하시고 계신 것이 <현실>입니다. ...............
@아위자 '아위자'가 .......... 같은 니까야를 놓고서 ........ <빠알리 '전공'>분에게 '번역'하여 들으니.......... 듣고서 ........ 본 카페에서 ........ 소개해 보니......... 통하지도 않고요. ........ 무엇 보다도 '기존 번역'과 충돌할 때......... '봄봄'님 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들과 마찰이 너무 심하더라구요. 그래서 아예. ........... 입을 다물고 있는 것임.
우리가 알고 있는 <문법서>는 .......... 특히 빠알리 문법서는 .......... 모두 엉터리.
분명합니다. 분명해요.
부처님께서....... <아자띠까[=형용사] 지수회풍>이나 <바히라[=형용사] 지수화풍>이나 모두 <아자땅[=부사]>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에서 <아자땅>이 무슨 말씀인가요? ...........를 <이해 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
'번역' 자체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만...... 대부분 그렇게 '번역' 조차도 하지 않습니다만.......
<엉터리 '번역'들을 무시하고>서 ...... 생각해 보아도........ '아자땅'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해 오지 않는 '표현'>입니다.
<이론적>으로 ....... '단수형, 같은 것'이라는 의미다.........라고 끼워 맞추어 보기는 하는데요........ 무리.
@아위자 ‘불이’가 되기 위해선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를 무엇이라 이름하든 어떻게 체득하든 간에 먼저 확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불이’가 의미가 있는 거라고 봅니다. ‘안(형용사)’ / ‘밖(형용사)’ 를 당연히 ‘안으로(부사)’로 볼 수 있어야 한는 것인데..... 별로 안 이상한데.... 그렇네요....
@새벽 요즘 ‘아스트랄’이니 ‘유체이탈’이니 뭐 말이 많은데.... ‘유체?’ 있냐 없냐 하면 ‘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체로 이탈 한다? 이 부분은 좀 오해한 겁니다. 유체가 육신 밖으로 나간다 라는 표현 보다는 ‘선택’한다 가 더 맞아 보입니다. 그래서 ‘투사’라는 표현도 쓰겠지요. 근데 이 상황(유체이탈 혹른 선택 혹은 투사)을 안으로(부사) 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유체이탈 경험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새벽 육신보다 미세한 체로 갈아탔지만 여전히 ‘바깥’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견 드려 봅니다. 결국 ‘행’을 지속하고 있는 것!
@새벽 나를 찾고 있는 것, 그래서 쓰잘데없이 싸돌아 댕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체라는 경험을 그 따구로 써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매우 유리한 고지에서 왠 딴 짓들을......
@새벽 사실 유체 라는 경험은 불교의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이해를 넓힐 수는 있다지만 그것이 여전히 ‘밖’인 한에는 육신이나 유체나 일보도 가까이 가지 못함이라고 봅니다.
@새벽 ‘안으로’는 거친 신이든 의성신이든 상성신이든 어떠한 상태에서도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태에서든 ‘단수’라 부르든 ‘법’이라 부르든 ‘궁극’이라 부르든 그 어떤 것으로의 귀로와 관계가 확실시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과정들을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라고 생각합니다.
@새벽 예를 들어, ‘유체’를 ‘안으로’ 본다는 의미는 유체로서 원하는 모든 곳에 모든 것을 가서 본다는 말이 아니고, 유체 그 자체의 생멸을 본다는 의미라고 여깁니다. 즉 유체라는 ‘나’가 있고 이 내가 세상을 돌아다니고 학습하고 느끼고 성장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체 자체의 생멸, 그리고 이 생멸에 따른 유체가 활동하는 시공간 자체의 생멸을 본다는 것이 ‘안으로’ 라고 하는 것의 의미 아닌가 제안해 봅니다. 거친 신이근 상성신이든 마찬가지로 적용해 볼 수 있겠지요.
아자땅을 부사(동사를 수식)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경문에서 그러한 점을 확인했습니다. 반대하지 않습니다. 동의 합니다.
그렇게 동의하고 찬성해서 그렇게 번역된 내용에서 ...
예를 들어
//모두 <아자땅>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에서 <아자땅>이 무슨 말씀인가요? //
<아자땅[=부사]>은 '본다'를 수식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동사를 수식하는 것이고 의견을 드렸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으시고, 계속 '본다'를 수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사를 수식하는 것에는 [아위자님]이나 봄봄이나 모두 동의하는 지점이지 않습니까?
@봄봄 동의하는 것은 이미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의견이 갈리는 어떤 동사를 수식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봄봄의 의견을 말씀드리면 그 '본다'가 아닌 다른 동사를 수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경문에서 아자땅이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라는 점은 동의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므로 다른 분들에게는 몰라도 봄봄에게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급하실려면 어떤 동사를 수식하는 지에 대해서만 논점을 줄이면 되지 싶습니다.
봄봄의 의견은 이미 올렸고 봄봄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면 그 지점을 지적하시면 되지 싶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것을 <엉뚱한 지점>을 가르키시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