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근시에 거구인 자동차 정비공 아벨 티포주는 어느 날 범죄 혐의를 받고 경찰에 기소되었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면소 판결을 받는다. 군에 징집된 티포주는 비둘기 사육병이 되었다가 독일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어 동프로이센의 자연 보호 구역으로 보내진다. 티포주는 그곳에서 사슴을 사냥해 그 생고기를 자신이 기르는 사자와 나누어 먹고 동물의 배설물 연구에 심취한 괴링의 모습을 통해 식인귀의 원초적 광경을 목격한다. 전쟁이 깊어질수록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인종 실험은 가혹해지고, 어린 소년들이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히틀러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어린아이의 순진함과 생명력을 사랑하는 동시에 갈망하는 티포주는 나치의 소년병 징집 임무를 맡게 되고, 자신의 모순적인 운명을 예감하며 ‘불길한 기록’을 쓰기 시작한다.
“칼텐보른의 식인귀를 조심하십시오.”
원초적 물신 숭배에 빠진 식인귀에게 희생된 아이들
『마왕』의 첫 장면은 주인공 아벨 티포주의 부인인 라셸이 느닷없이 “당신은 식인귀야!”라고 외치는 장면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티포주는 사실 어린아이의 순수성과 육체를 지나치게 갈망하는 퇴행의 징후를 보이며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되면서 다양한 양상의 식인귀들을 만나게 되고, 그 자신 또한 잔인한 식인귀와 전이되는 문제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원초적 식인귀는 인간의 본능을 조절하지 못하는 원초적 물신 숭배에 빠진 존재로서, 소설에서 언급되는 원초적 식인귀는 사슴 사냥을 즐기고 그 생고기를 자신의 분신과 같은 사자와 나누어 먹고 동물의 배설물 연구에 심취한 나치의 이인자 괴링의 모습에 가깝다. 티포주 역시 아이의 순진함과 생명력,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것을 넘어 만지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식인귀적 기질을 드러낸다.
투르니에가 식인귀 신화를 통해 고발하려는 주제는 상상적인 식인 풍습의 은유, 즉 전쟁과 나치즘, 정치적 목적으로 나치가 자행한 의학 생체 실험 등이다. 마왕이 달콤한 말로 소년을 유혹하고 결국에는 죽음에 몰아넣듯, 나치즘은 유전적으로 뛰어나다고 판단된 젊은이들을 조국애와 명예심이라는 이름으로 유혹하고 전쟁의 제물로 동원했다. 매년 4월 19일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열 살짜리 소년과 소녀 들을 50만 명씩 제물로 바치게 하고, 혈통이나 조상, 피와 죽은 자와 대지를 예찬하는 히틀러야말로 병적 허기증에 걸린 탐욕스러운 현대판 식인귀라 할 수 있다. 또한 독일의 우수한 소년들을 유혹하여 어린 생도들의 ‘살로 만든 대포’ 진지를 구축한 나치 사령관 라우파이젠, 인간을 실험실의 동물처럼 이용하여 의학 실험에 동원한 의사 블레트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4월 19일입니까?”
직원은 불신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4월 20일이 우리 총통의 탄신일이라는 걸 모르시오? 독일 국민은 해마다 총통 각하께 열 살이 된 모든 아이들을 선물로 바칩니다!” 흥분한 직원은 그의 머리 위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의 대형 컬러 초상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339쪽)
황금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자, 누구인가
식인귀 신화에서 구원에 이르는 기나긴 생명 부활의 여정
칼텐보른의 성에서 일하게 된 이후 티포주는 괴테의 마왕처럼 바르브블뢰라는 말을 타고 동프로이센의 들판과 마을을 누비며 아이들을 사냥하고 데려와 나폴라에 가둔다. 독일의 소년들을 유혹해 전쟁에 동원하는 소년병으로 양성하는 특수학교인 나폴리에서 아이들은 인간성이 말살된 채 전쟁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나치의 인종 유전학 연구의 대상이 된다. 나치의 만행에 일조하며 티포주는 점점 더 왜곡된 어둠의 거인이 되어 가지만, 역사상 가장 끔찍한 유대인 박해의 장소인 아우슈비츠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유태인 소년 에프라임을 만나면서 변하게 된다. 홀로코스트 독가스 살해 현장과 대형 화장터에 무더기로 쌓인 시체에 대한 에프라임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자신이 나방과 같이 나치즘의 불꽃에 현혹되었음을, 심장과 영혼으로 맺어진 형제 아벨의 학살에 조력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점점 회개하고 개종하는 ‘짊어지는 자’, 즉 소년 예수를 어깨에 태우고 고통의 길을 걸어가는 성 크리스토프의 희생적 행위를 닮아 가게 된다. 에프라임은 전쟁과 나치즘에 의해 왜곡된 어둠의 거인 티포주를 깨우치고 여섯 가지가 달린 황금 별이 빛나는 밤하늘의 영상 위로 사라지게 한다.
“꼬마야, 내 어깨에 올라타서 너의 『하가다』를 마저 외우렴. 자, 이스라엘 말에 올라타거라!” 티포주는 아이 곁에 무릎을 꿇으며 명령했다.
티포주가 에프라임을 어깨에 태우고 몸을 낮춰 문을 나서는 순간 콩 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본문 552쪽)
식인귀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 이미지로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착한 일을 하면 긍정적 이미지로 변형될 수 있다. 처음에 티포주는 죽음 속으로 아이를 유혹하고 강탈하는 독일식 식인귀 마왕과 동일시되고, 그다음에는 아이를 짊어지고 찬양하고 구제하는 성 크리스토프와 동일시된다. 처음에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허기증을 가진 거인이었으며 가장 힘센 자를 주인으로 모시기 바라는 물신 숭배에 빠졌던 성 크리스토프 역시 일단 그리스도로 개종한 뒤로 죽음에 대항하는 수호성인이 된다.(「작품 해설」 중에서)
사실과 신화 교차시킨 소설 기법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경고하다
독일계 유태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내용을 보며, 유능하고 뛰어난 이들이 어떻게 해서 악에 동조하게 되는지를 ‘악의 평범성’으로 정의했다. 괴물이나 악마를 연상시키는 악은 실체가 없으며 악의 평범성의 근원은 생각하지 않는 것, 즉 무사유(無思惟)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마왕』을 통해 전 세계가 나치에게 어떻게 세뇌당하였는지, 광적인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어떠한 심리적 기제로 작동하여 대중을 타락시키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를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재현한다. 소설에서는 2차 세계 대전 전반을 다루며 나치의 폭력성을 묘사하지만 사실주의적 기법에 마왕과 식인귀 신화를 중첩시켜 보다 근원적인 악의 잔혹함을 드러낸다.
소설 속 라우파이젠의 설명에서도 언급되듯, 당시 독일 국민은 1차 세계 대전의 패전 이후 부채와 빈곤 경제적 위기, 화폐 가치의 하락, 극심한 실업에 시달려 자괴감을 겪었고 이러한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정치 지도자로 히틀러의 나치당을 선택했다. 나치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처럼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과 군가, 깃발과 같은 상징적 의식을 통해 교란시키며 최면에 빠뜨렸고, 2차 세계 대전의 격변 속에서 파시즘은 괴링의 야만성을 닮아 가는 티포주처럼 평범한 이들을 악의 조력자로 변모시켰다.
미셸 투르니에는 『마왕』을 통해 평범한 이들도 마왕의 유혹에 빠지듯 파시즘에 현혹되어 잔혹한 식인귀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특히 순수한 혈통을 지닌 소년병을 전쟁의 희생 제물로 동원하여 자신들의 가학성을 정당화하려 했던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나치의 인종주의적 민족주의 세계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엇보다 투르니에는 티포주를 일깨워 황금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에프라임을 통해, 전쟁의 광기로 인해 폐허가 된 대지일지라도 부활은 지속되며, 인간의 존엄은 존중되어야 하고 생명 회복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들려준다.
예쁘장한 연푸른색 기모노를 입은 괴링은 식탁에 앉아 앞에 놓인 멧돼지 반쪽에서 한쪽 넓적다리를 잘라 내더니 헤라클레스의 곤봉처럼 휘둘렀다. 그의 곁에 앉은 사자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사냥감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면서 고깃덩어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으르렁거렸다. 마침내 수렵장은 고깃덩어리를 게걸스럽게 물었다. 잠시 동안 그의 얼굴은 엄청난 넓적다리 고기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 pp.296-297
칼텐보른의 식인귀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여러분의 아이들을 탐내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고장을 배회하며 아이들을 훔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아이가 있다면 항상 그 식인귀를 염두에 두십시오. 그는 항상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p.421
괴테의 발라드에서 어느 아버지가 망토 속에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리는데 마왕이 아이를 유혹하려고 온갖 수작을 부린다. 결국 마왕은 강제로 아이를 납치한다. 이 발라드는 제3의 힘까지 고양시키는 짊어지는 행위의 헌장 그 자체다. 그것은 크리스토프와 알부케르크라는 라틴 신화가 북방 낙토의 마법에 의해 열광이 절정에 이르게 된 또 하나의 신화다.
--- p.429
“자네는 성 요한의 『묵시록』을 읽었는가? 거기에서는 하늘, 환상적인 동물들, 별들, 검들, 왕관들, 성좌, 엄청난 혼란에 빠진 대천사들, 왕홀들, 왕좌들, 태양들을 불태우는 무시무시한 장관이 펼쳐지지. 말할 나위 없이 모든 것이 상징이고 암호이지. 하지만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게. 각 기호가 반영하는 사물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야. 그 상징들은 악마적인 것들이니까. 말하자면 그 상징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지. 바로 그런 상징들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이지.”
--- pp.433-434
아이들의 귓속에서 분비되는 벌꿀처럼 황금빛이 도는 꿀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누구나 혐오감을 느낄 만큼 매우 기묘한 쓴맛이 난다.
--- p.477
내가 칼텐보른의 밀폐된 어항 속에 가두어 놓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까? 이제 나는 폭군의 절대 권력이 언제나 그를 미치게 만드는 까닭을 알겠다. 폭군은 절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p.493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진흙이 다리를 따라 계속 올라왔고 그를 짓누르는 무게는 걸음을 뗄 때마다 한층 가중되었다. 이제는 배와 가슴을 으깨는 끈끈한 저항력을 이겨 내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졌음을 알기에 끈질기게 전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에프라임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여섯 개의 가지가 달린 황금 별 하나가 검은 하늘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모습만 보였다.
--- p.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