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웃시야의 이마에 문둥병이 생겼는가
역대하 26: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찬송가 292장(주 없이 살 수 없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유다 왕 웃시야가 성전의 제사장만이 들어가서 행할 수 있는 분향단의 향을 피우는 일을 직접한다고 나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래 웃시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조언을 받아서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인하여 형통하였습니다. 하지만 스가랴가 세상을 떠났는지 스가랴가 곁에 없어지자 자기 때문에 나라가 강성해지고 형통해진 줄로 착각하고 교만해져서 모세의 율례를 따라 오직 레위인들 중에서 오직 아론의 자손만이 맡아 행하도록 정해진 성소의 분향을 자기가 직접하겠다고 나섰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즉시로 문둥병에 걸려서 성전에서 쫓겨나가서 별궁에 유폐되어 죽는 날까지 나오지 못하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깊게 살펴볼 대목은 하나님께서 문둥병으로 웃시야 왕을 칠 때에 그 병이 웃시야 왕의 이마에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문둥병으로 치실 때에 왜 하필 그의 이마에서부터 문둥병이 시작하게 하셨을까요? 이마는 성경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상징적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대제사장은 그가 착용하는 의복의 내용 중에 그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이 써진 패를 그 이마에 착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8:38 말씀에 보면
“이 패를 아론의 이마에 두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과 관련된 죄책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고 하였습니다. 아론과 그 후손들 중의 대제사장들은 늘 그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쓴 패를 달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드리는 모든 제사들이 대제사장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이마에 하나님의 말씀을 착용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6:4 이하에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명기 6:4~9)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미간은 곧 이마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가장 중요한 계명인 이 말씀을 담은 말씀 상자, 말씀 주머니인 ‘메주자’를 이마에 차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을 보면 사람의 이마는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과 마음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웃시야 왕에게 진노하여 하늘의 형벌인 문둥병을 내리실 때에 그의 신체의 다른 부위에 내릴 수도 있었겠지만 웃시야의 정신과 마음을 대변하는 그의 이마 위에 문둥병이 발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웃시야의 정신이 교만하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정신이 썩은 것과 같아서 문둥병으로 치신 것을 명백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에 보면 그들의 정신을 이마와 관련되어 지적하시곤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 3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마가 굳은 것은 마음이 굳은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자 하는 패역하고 완고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인정하시는 표도 다른 데 두지 않고 그 이마에 표를 하라고 명하십니다. 에스겔서 9장에 보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이 죄를 범하며 특별히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 역시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읍을 향하여 분노를 쏟는 내용이 에스겔 선지자의 묵시 중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때 다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예외적으로 표를 주어 천사의 칼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9:4 말씀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서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에스겔 9:4~6)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이웃들의 불경건함으로 인하여 슬퍼하며 탄식하는 경건한 자들에게 한 천사가 이마에 표를 그림으로써 칼을 찬 심판의 천사들이 칼로 칠 때에 이마에 표 있는 자는 피하고 표 없는 자는 아낌없이 쳐서 죽이라고 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마는 곧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상징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면 마지막 때에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짐승의 표 666을 받는 사람의 몸의 자리도 이마나 오른손입니다(요한계시록 13:16). 또한 어린 양 우리 구주 예수님께 속한 자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십사만 사천인도 그 이마에 어린 양 우리 구주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써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3절 이하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거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이렇듯 이마는 상징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표현하는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마에는 지금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웃시야처럼 교만한 마음이 가득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아로 꽁꽁 굳어 있고 뻣뻣함이 가득찹니까?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더러운 거짓 교리들을 추구하는 마음이 가득차 있습니까? 신명기 6:4.5 말씀처럼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한 사랑이 충만합니까? 세상의 불법과 악을 인하여 슬픔과 애통함이 충만합니까? 옛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신앙의 절개와 각오가 충만합니까? 어떤 고난과 시험이 닥쳐도 흔들림없이 오직 어린양 한분에게만 마음을 드리는 절개 있는 어린양의 이름만이 뚜렷이 새겨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천사들은 우리 이마만 보면 하나님 백성 된 표가 있는지, 아니면 짐승의 표가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 표는 외적인 표시라기보다는 마음입니다. 정신입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태도로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마는 구원받은 어린양 예수님의 이름 표가 딱 붙어 있어서 늘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마귀와 졸개들이 일체 손 못 대고 어떤 재난 중에도 보호를 받으며 저 천국에 가서 주님의 존귀한 이름을 더욱 드높이는 복된 성도된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