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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春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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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丹寺 스크랩 좌탈입망
우주후 추천 0 조회 573 16.06.01 07: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좌탈입망’서 물구나무…파격적 임종선사들의 기이한 죽음


죽음 공포서 벗어난 초연함
중생제도 위한 또다른 자비
모습만 집착 부작용도 발생

 

 

▲1951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앉은 채 적멸에 든 한암 스님.

 



모든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는 선종. 이런 까닭에 옛 선사들은 파격적인 언어와 기행(奇行)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중생 제도를 위해서라면 계율을 넘어서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던 무애행을 보였다. 그렇다면 현생을 마감하는 선사들의 임종 순간은 어떨까.


‘전등록’, ‘임제록’ 등 선어록에 따르면 대다수의 선사들은 여느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누워서 입적했지만 몇몇 선사들의 경우 앉거나(坐脫) 꼿꼿이 서서(立亡) 임종하거나, 걷다가 죽음을 맞고, 심지어 물구나무를 서서 적멸에 드는 등 숱한 기이함을 보이기도 했다.


‘전등록’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 때 마조도일 선사 문하의 운봉 스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역대 큰 스님들의 열반상”에 대해 물었다. 이에 옆에 있던 제자들이 “아난존자는 허공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 스스로 다비를 했고, 어느 스님은 앉은 자세에서 좌탈했으며, 방 거사는 친구인 고을 태수의 무릎을 베고 열반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운봉 스님은 “나는 그 분들과 다르게 죽겠다”며 물구나무를 선 채로 그대로 입적했다.


또 당나라 때 곽산경통선사는 세상과의 인연이 다했음을 직감하자, 장작을 뜰에다 준비하고 여러 도반들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그리곤 손수 촛불을 들고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손에는 주장자를 들어 항마저(降魔杵)의 모습을 나타낸 채 불길 속에서 서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가하면 중국 조동종을 창종한 당나라 때 동산양개 스님은 어느 날 법상에 올라 “오늘 난 갈라네”라는 말을 남기고 법석에 내려와 자신의 방에서 앉은 채 적멸에 들었다. 이를 본 제자들과 신도들이 몇 시간이 지나도록 목 놓아 울었다. 그러자 네댓 시간 흐른 뒤 양개 스님이 다시 깨어나 대중들을 향해 “갈 때가 되어서 가는데 왜 그리 우느냐”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 이후 양개 스님은 7일간 대중들을 안심시키는 법문을 한 뒤, “자 이제는 내가 가도 되겠지?”라는 말을 남긴 채 그대로 입적했다.


‘임제록’에도 선사의 기이한 죽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임제 스님의 도반이었던 보화 스님은 스스로 장터로 관을 끌고 가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선어록에 따르면 선가의 제3조인 승찬 스님은 뜰 앞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입적했고, 당나라 때 단하천연 스님과 관계지한 스님은 걸으면서 입적했다. 또 오조 홍인 스님을 비롯해 육조 혜능, 마조도일, 임제의현, 영명연수 스님 등 수많은 선사들이 앉아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 선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죽음을 독특하게 맞이한 선사들의 일화도 적지 않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 스님도 법상에 올라 대중설법을 마친 직후 그 자리에서 좌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광사지’에 의하면 1210년 2월 지눌 스님은 모친을 천도하기 위해 법회를 열어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설법하는 것도 오래지 않을 것이니, 부디 각자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곤 한달 뒤 스님은 다시 법석에 올라 마지막 법문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했다. 또 근대에 이르러서도 경허 스님의 상좌인 수월 스님과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던 한암 스님도 좌탈했으며, 이후 서옹·양익 스님 등도 앉은 채 삶을 마무리 했다.


그렇다면 많은 선사들은 왜 평범한 임종 방법을 버리고 기이한 죽음을 선택했던 걸까.


이와 관련 옛 선사들의 열반 모습을 조사해 온 광전 스님(조계종 사서국장)은 “이는 신통을 보임으로써 중생들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불법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자비로운 배려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윤창화 민족사 대표도 “수행자로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죽음까지도 초연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선사들의 기인한 죽음이 수행자로서 수행 경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왜곡되거나 지나치게 이상화 되면서 부작용도 적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스님의 수행력을 부각하기 위해 입적 이후 좌탈을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좌탈에 대한 고집은 오히려 순수한 선사들의 입적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벽암록’ 등 선어록을 번역해 오고 있는 지현 스님은 “선사들의 기이한 죽음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집착을 만들 뿐 아니라 선의 근본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라며 “부처님을 비롯해 옛 선사들의 대다수가 누워서 적멸에 들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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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록>으로 본 ‘좌탈입망(坐脫立亡)’ 일화들


 

 
중국 선종의 역사서인 <전등록>에 보면 좌탈입망(坐脫立亡)한 예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한 다음 선택한 시간에 열반을 맞이한 선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신의 제사를 먼저 치르게 한 화산덕보 선사

먼저 임제종 황룡파의 화산덕보(禾山德普, 1025-1091)선사는 입적하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자신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스승이 보는 앞에서 미리 스승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니 제수(祭需, 제사음식)가 진수성찬이었음은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한 시간 이상 제자들이 올리는 음식과 절을 모두 받고 나서 “내일 맑은 하늘에 눈이 내리면 가겠다”고 하고는 정말 다음 날 눈이 내리자 향을 사르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했다고 한다.


#제발로 관에 들어가 입적 맞은 보화선사

임제의현(臨濟義顯, ?-- 866)의 도반인 보화(普化) 선사는 입적에 이르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관 속에 들어가 열반을 맞이했다. 이 장면이 <전등록>은 물론 <임제록> 37단에도 나온다.
이 선어록에 따르면, 보화 스님이 하루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승복을 구걸했다. 사람들이 모두 승복을 갖다 주었지만, 보화 스님은 웬 일인지 “모두 필요 없다”하고 받지 않았다. 임제선사는 원주를 시켜 관(棺)을 하나 사 오게 했다. 그러고는 보화 스님에게 “내가 그대를 위하여 승복을 한 벌 만들어 놓았소.” 그러자 보화스님은 기분 좋게 곧바로 관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가 “내일 내가 동문(東門) 밖에서 세상을 하직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동문으로 구름처럼 몰려 가보니 폭삭 속은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엔 또 남문 밖에서 세상을 하직할 것이라고 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보니 역시 또 부도수표를 발행한 것이었다. 이러기를 3일, 4일 째 되는 날엔 그 누구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보화 스님은 혼자 관 속으로 들어가 길 가는 사람에게 뚜껑에 못질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소식이 즉시 시내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다투어 가서 관 뚜껑을 열어보았다. 관을 열어보니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몸 전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다만 공중에서 요령소리만 달랑달랑 울릴 뿐이었다.


#물구나무 서서 입적한 등은봉 선사

등은봉(鄧隱峰) 선사의 일화도 있다. 등은봉 선사는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제자다. 등은봉 선사는 평소에도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고래(古來)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는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자 등은봉 선사는 갑자기 물구나무서기를 하더니 그대로 입적해 버렸다. 여러 사람들이 달겨 들어 넘어뜨리고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다비(화장)를 하긴 해야 하는데 다비를 할 수가 없었다. 이 기괴한 소식은 삽시간에 고을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마침 비구니스님으로 있던 속가 누이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 왔다. 누이동생은 “오라버니는 살아 생전에도 괴팍한 행동만 일삼더니 죽어서도 계속 골탕을 먹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짓이냐?”고 하면서 꼼짝 않고 서 있는 오빠의 시체를 ‘탁’ 치니 그대로 넘어갔다고 한다.
 

 

좌탈한 명허 스님, 12년간 토굴서 장좌불와

 

삶과 죽음이 둘 아니며, 생사가 곧 열반이다

 

미혹되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달으면 윤회가 사라진다.

감산 대사의 <몽유집(夢遊集)>
 


몇 년 전 시작된 웰빙(well-being) 붐이 최근에는 잘 죽어야 한다는 의미의 웰다잉(well-dying)이란 신조어를 낳고 있다. 이러한 웰다잉의 원조가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고, 이를 초월해 생사를 자유자재로 누리는 선()에 있다고 하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생사와 열반의 대립을 초월한 선사들의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란 깨달음의 삶과 극적인 임종이야말로 수행자들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던져주는 말없는 가르침에 틀림없다.

지난 1 26오후 1 30, 앉은 채로 입적[坐脫]한 용담당(龍潭堂) 명허(明虛) 스님은 생사가 본래 없는본무생사(本無生死)’의 도리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2003년 입적한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 스님에 이어 청원 탄공선원의 탄공 스님, 고창 선운사의 기산 스님, 범어사 청련암의 양익 스님에 이은 또 한번의 좌탈 열반상인 것이다.

 

 

 


세수 63, 법랍 38세로 입적한 명허 스님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막동리 해발 1000여미터 고지에 2칸으로 토굴을 지어 12년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오랜 기간 눕지 않고 하는 참선)와 일종식(一種食: 하루 한 끼만 먹고 오후엔 일체의 곡기를 끊는 수행)으로 용맹정진해 온 숨은 도인으로 알려졌다. 열반하는 날 미리 입적을 감지하고 토굴 500여 미터 아래에 거주하는 홍금선(45) 신도의 부축을 받은 후 앉은 채로 좌탈한 것이다. 홍씨는스님께서 1주일전부터 몸져 누우셔서 시봉을 해드렸는데, 입적 당일 일으켜 달라 하셔서 몸을 앉히자마자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육신을 소멸해 없어질 껍데기와 같은 존재라 하여 일명똥자루라 부르며 몸을 벗는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탈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기뻐한다. 특히 선사들은 임종에 이르러 생사로부터 자유로운 경지를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다)이라는 극적인 모습을 통해 생생한 묵언의 가르침을 보여준 사례가 적지 않다. 삼조승찬 스님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보화 선사는 요령 소리만 남긴 채 허공으로 사라졌으며, 등은봉 선사는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관계 선사는 몸을 태울 화장나무를 미리 준비해 그 위에 서서 열반했고, 보조 국사는 제자들과의 백문백답을 마친 다음 법상에서 내려와 마루에 앉아 그대로 입적하기도 했다
.

고승들의 이러한 좌탈입망은 선()의 궁극적 목적이 생사로부터의 해탈에 있음을 일깨우는 마지막 법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생사의 근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무상(無常), (), 무아(無我)의 삼법인을 철저히 요달해야 한다. 모든 존재에 실체성이 없다는 무아와 연기법(緣起法)의 관점에서 보면 생(), ()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꿈과 환상같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과 사가 모두토끼 뿔’, ‘거북 털과 같이 이름으로만 존재하기에 생과 사가 다를 바가 없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인 것이다
.

따라서 선가에서는 생과 사, 생사와 열반에 대해 분별하는 것을 망념으로 본다.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생사는 싫어하면서 열반은 얻어야 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결코 생사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반의 참뜻은지금 여기에서 생사로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라는 가르침이다. 결국 피안(彼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차안(此岸)이 곧 피안이고, 세간이 바로 출세간이며, 생사가 바로 열반이고, 범부가 곧 성인이라는둘 아닌[不二]’ 이치를 깨달을 때 삶의 현장 속에서 생사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좌탈입망이 그대로 완전한 깨달음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생사에 자재한 그러한 모습만으로도 후학들에게 환희심을 주고 발심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 좌탈한 명허 스님 역시 남이 알아주건 말건 평생을 치열하게 용맹정진한 수좌(首座)로서 소리 소문없이 많은 스님과 신도들의 존경을 받은 스승이었다.

1944년 8월 17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전통 유학자이자 한의사인 주천(李柱泉) 거사의 4남으로 태어난 명허 스님은 20세에 43경 등 한학을 통달했다. 5년간 막동리에서 서당훈장으로 43경을 가르치다가 문자와 세속 삶의 무상함을 느껴 지리산 화엄사로 출가해 69년 도광 스님을 계사로, 도천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화엄사 승가대학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오대산 북대와 상주 선역사 등 제방선원에서 운수안거의 세월을 보냈다. 이후 고향인 막동리에 산중토굴을 지어 장좌불와 수행에 들어갔다
.

스님은 토굴수행을 하면서도 찾아오는 스님들의 수행을 지도하는 한편 불치병에 걸린 많은 신도들의 병을 낫게 하는 등 남모르게 보살행을 실천해 왔다. 12년전 상주 선역사 일대의 토지 1만여평을 연꽃마을에 기증하는 등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특히 중국 소림사에서도 수련자가 드문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을 수련, 본격적인 참선에 앞선 몸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스님은 <달마역근경>을 번역한 <역근세수(易筋洗髓)의 비결>이란 책을 무료로 보급하기도 했다
.

한편 명허 스님의 다비식을 봉행한 화엄사 문도스님들은 스님의 사리를 화엄사와 상주 선역사의 부도에 봉안키로 했다. 또 스님의 유품인 사고전서, 대장경, 역경집성, 정통도장 등 3천 여권의 유, , , 한학관련 희귀도서는 유언에 따라 화엄사 도서관에 기증했다. 화엄문도회는 2 1일 거행한 여수 흥국사 초재를 시작으로 구례 천은사, 금산 태고사, 고양 선재정사, 고양 상운사, 예천 법흥사, 구례 화엄사 등에서 2재부터 7재를 봉행할 예정이다.

 

여수 흥국사=김성우 객원기자  2007-03-07 붓다뉴스

 

▼ 아래 내용출처 : http://blog.naver.com/gksdka1876?Redirect=Log&logNo=120030048980

 

좌탈입망 [坐脫立亡]

 

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을 일컫는 불교용어.

 

불교에서는 죽음을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본다. 곧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적멸(寂滅)의 순간인 동시에 법신(法身:영원한 몸)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예부터 선사나 고승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맞아들일 때도 일반인들처럼 누워 죽는 경우,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하거나, 앉거나 선 채로 죽는 경우 등 죽음의 형식도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범어사 청련암 양익선사의 좌탈입망 모습>
 
*양익스님(1934~2006)은 우리나라 현대 불교무술의 창시자이며, 특히 선무도 불무도 등
불교무술 발전과 전수에 힘쓰다 열반하신 큰스님이다.
젊어서는 범어사 일주문도 경공술로 넘었다 하며, 또한 검도의 고수와
대결에 검도고수는 목검으로 양익스님은 썩은 나무 가지로 대결하였는데,
서로 무기가 마주치자 검도고수의 목검이 부러졌다 한다.
현재 골굴암 주지이며, 선무도를 가르치는 적운스님도 양익스님의 제자라 한다.
또한 스님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으며, 1차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하러 범어사에 왔다가 범어사 조실 동산 큰스님을 만나
출가 하였다.
 


보통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죽을 때 택하는 방법으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제3조 승찬(僧璨)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당(唐)의 등은봉(鄧隱峰)은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다비할 땔감을 준비한 후 그 위에서 열반한 관계 선사, 제자들에게 “내 죽으면 시신을 숲 속에 놓고 들불에 타도록 하라”고 유언한 혜안국사, “시신을 벌레에게 주고, 탑이나 부도를 만들지 말라”고 했던 청활스님, 제자들과 백문백답을 마친 후 법상에서 내려와 입적한 보조국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 대종사의 열반 모습>
 
*서옹스님(1912~1996)은 1912년 10월 10일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連山面)에서 태어나 1932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인생문제와 우주진리에 관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불교서적을 읽다가 깨친 바 있어,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白羊寺)로 출가해 송만암(宋曼庵) 대종사를 은사로 득도 수계하였다.
 
1962년 동국대학교 선학원 원장을 지내고, 1965년부터 1974년까지 도봉산 무문관(無門關), 대구 동화사(桐華寺), 백양사, 문경 봉암사(鳳岩寺)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에 추대되었고, 같은 해 스리랑카 국립프리베다대학교에서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대한불교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고, 1978년 종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백양사 조실(1981), 수국사(守國寺) 백운암 조실(1984),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1990),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1996) 등으로 주석하면서 한국불교 발전에 힘썼다.
 
성철(性澈)·서암(西庵) 등과 함께 한국 현대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꼽히며, 수행방법 가운데서도 참선을 으뜸으로 삼아 항상 '본래 자비심이 있는 참 모습을 깨닫기 위해 수행할 것'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근현대 고승들 가운데서도 밧줄을 붙잡고 화두를 외며 죽음을 맞은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曉峰) 외에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寒巖), 백양사의 만암(曼庵), 순천 송광사의 초대 방장 구산(九山),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백양사의 서옹(西翁) 등이 모두 좌탈입망하였다.

 


선가(禪家)에서 좌탈을 중시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 상태가 다음 환생(還生)과 관련된다고 보는 사생관(死生觀) 때문이다. 좌탈을 했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도 각성(覺醒)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상태가 다음에 태어날 때의 의식수준이나 육체적 조건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공포와 혼돈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상태가 이월되어서 환생할 때에도 비각성(非覺醒) 상태로 태어나지만, 죽음을 바라보면서 죽는 죽음은 다시 환생할 때 각성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탈입망은 요즘 이야기 되는 ‘웰 엔딩(Well Ending)’의 최고 수준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선사의 열반 모습>
 
*한암선사(1876~1951)는 1951년 2월 오대산 상원사 법당에서 사시불공을 드린 후,
평상시 좌선하는 상태로 열반(76세) 하였다.
그의 제자 탄허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가고
나이 어린 시자 한명이 모시고 있었다. 제자들이 같이 모시고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스님은 한사코 오대산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다.
한암스님 회하에 참선을 지도 받으며 거쳐간 스님들은,
효봉, 동산, 운봉, 동산, 전강, 서옹 등..우리나라의 기라성 같은 최고의 선사들이 거쳐갔다.
한암은 선방의 조실로서 수좌들에게 경을 가르치며, 선을 지도하며,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었다 한다.
가르치는 일 외에는 늘- 말없없이 좌선삼매에 있었다 한다.
언제나 그렇게 좌선삼매에 있었으니, 죽음도 평소 일상 그 모습 그대로
열반에 들었지 않나 싶다.
모시던 시자도 한암스님의 열반하신 것을 몰랐다 한다.
위 사진은 평소 존경하던 6.23 종군기자가 한암스님을 뵈러 상원사에 들렀다가
스님의 열반을 모습을 보고 시자에게 알리고 사진으로 담았다 한다.
열반한지 처음 몇시간은 참선하는 상태로 있었다 한다.
그후 시간이 지나자 고개가 위로 저절로 넘어 갔다 한다.
열반 사진의 뒷 배경은 법당이라서 시자가 천으로 가린 모습이라 한다.
어디 벽에 기댄 모습도 아니고, 일반 선사들처럼 고개를 떨군 모습도 아니다.
스님은 경허선사에게 깨침을 인가 받고,
평생을 그렇게 참선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다 평소의 모습대로 가사와 장삼입고,
부처님 앞에서 제자 답게 꼿꼿이 좌선삼매 상태로 홀로 그렇게 갔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마음달-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DBL9&articleno=7004550&categoryId=594360®dt=20101026061834





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떠나고 남기고] 성철스님 이후 최고 禪師 백양사 방장 서옹스님 "이제 가야겠다" 하시더니 앉은채 열반 간디자서전 읽고 불교접해 고교졸업때 출가

2003년 12월
13일(토요일) 입적한 백양사 방장 서옹(西翁) 스님은 성철(性徹) 스님 이후 최고의 선사(禪師)였다.

스님은 이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백양사 설선당(說禪堂)에서 아침 죽 공양을 하고 오후에 상좌 스님들과 법담을 나누며 후학들의 정진을 격려했다. 스님은 저녁에 주지 두백 스님 등에게 “이제 가야겠다”고 말한 뒤 앉은 자세로 좌탈입망(坐脫立亡)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님은 임종 직전까지도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온 시자 호산 스님과 선문답을 주고 받는 선장(禪匠)의 면모를 보였다. 백양사측이 전한 그 모습은 이랬다. 서옹 스님이 일렀다.“호산. 호산. 동서남북에서 눈 밝은 사자새끼가 나온다. 동서남북에서 용맹스런 사자새끼가 나온다. 호산!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라.”호산 스님이 벽력같이 할(喝)을 했다. 서옹 스님이 말했다.“발 밑을 보아라.”두 사람은 마주앉아 빙그레 웃었다.

191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양정고보에 다니던 열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한 해에 돌아 가신 데 절망하다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무교회주의자였던 김교신 선생의 영향으로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을 읽으며 불교와 접하게 됐다. 주변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에 갈 것을 권했으나 “인생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1932년 양정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서옹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 문하에서 탄허, 고암, 월하 스님과 함께 본격적 참선 수행을 시작했으며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에서 2년,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에서 운영하는 교토 임제대학에서 2년 동안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 백양사 해인사 동화사 파계사 봉암사 등을 돌며 공부와 수행을 계속했으며 62년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지냈고 천축사 무문관, 동화사, 봉암사 등의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했다. 스님은 늘 수좌들에게 “순수하면서도 용맹스럽게 하라”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바치는 듯한 자세로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게 가장 간단하고 병폐도 없다”며 참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님은 1967년 어느 날 백양사 쌍계루 아래 돌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살을 보고 문득 대오하여 전에 없던 초탈의 경지를 맛보았다고 한다.

스님은 74~78년 조계종 5대 종정 재임 때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이후 줄곧 백양사에 주석했으며 96년부터는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으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스님은 특히 말년에 “종교적 생명력이란 허무한 인간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자기 밑바닥에 있는 참다운 인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며 백양사에 참사람 수련원을 개설하는 등 ‘참사람 운동’을 펼쳤다. 4월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찾아왔을 때도 임제 스님의 참사람(眞人) 정신을 강조했다.

스님은 ‘임제록 연의 ’‘선과 현대문명’‘참사람결사문’, 법어집으로는 ‘절대현재의 참사람’‘사람’등의 저서를 남겼다.


임종게

“임제의 한 할은 정안을 잃어버리고/ 덕산의 한 방은 별전지가 끊어지도다.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가니/ 백학의 높은 봉에 달바퀴가 가득하도다.”

(臨濟一喝失正眼 / 德山一棒別傳斷 / 恁?來恁?去 / 白鶴高峯月輪滿)

 

서옹스님 '坐脫立亡' 장면공개

전남 장성 백양사 방장 서옹(西翁) 스님이 13일 밤 좌선하는 자세로 입적(좌탈입망ㆍ坐脫立亡)한 장면이 15일 공개됐다. 밝은 황토색 바지와 적삼을 입은 스님은 왼 발을 오른 발 위에 올리고 오른 손을 왼 손 위에 올리고 있다. 장의위원회는 앉은 모습 그대로 입관해 19일 백양사에서 다비식을 치를 예정이다.

‘좌탈입망’은 참선 수행을 오래 한 선승 가운데서도 드물게 보는 일로 높은 법력(法力)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까운 예로는 지난달 22일 세수 90세로 입적한 태고종 전 종정 덕암(德菴) 스님이 있었다.

덕암 스님은 수행의 경지가 높아 태고종 내에서는 조계종 전 종정 성철(性徹) 스님과 비견되기도 했다. 근세 고승 가운데 오대산 상원사 방한암(方漢巖) 스님의 좌탈입망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서옹 스님의 은사였던 송만암(宋曼庵) 스님도 좌탈입망했다.

 

 

 

 

 

 

 

 

 

 

 

 

 

 

 

 

 

자료출처: 한국일보

 

 

 

“큰 스님 불 들어 갑니다. 빨리 나오세요.”

13일 밤 참선하던 모습 그대로 입적한 조계종 전 종정 서옹 스님의 다비식이 19일 오후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거행됐다. 눈발 사이로 피어 오른 흰 연기를 타고 스님은 이승을 떠나 열반에 들었다.

조계종 법전(法傳) 종정과 법장(法長) 총무원장 등 스님 2,500여 명과 각계 인사, 신도 등 3만여 명이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법전 스님은 영결 법어를 통해 “노승의 진면목은 아득하고 심오하다”고 추모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조윤제 경제보좌관이 대독한 조사에서 “대종사께서 남기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가르침을 소중한 좌표로 삼겠다”고 애도했다.

다비식은 낮 12시50분부터 거행됐으며 20일 오후 습골 등의 절차를 거쳐 마무리된다.

사진출처: 국회사진기자단

[중앙일보 기사] 지난 13일 92세를 일기로 앉아서 입적했던 서옹 스님이 19일 평소 자신이 설법하던 우주의 영원한 품에 안겼다.

이날 전남 장성군 백양사에서 3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된 다비식에서 스님은 처음 그를 만들었던 한줌의 흙으로 되돌아갔다.

조계종 최고의 선승으로 꼽혔던 스님은 생전에 '인생은 등불'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잠시 밝았다가 꺼져버리는 등불에 비유한 것이다.

스님의 엄격한 수행 정신은 유명하다.

화장실에서도 휴지 세칸을 절단해 꼬깃꼬깃 접어 사용할 정도로 근검 절약 정신이 몸에 밴 것은 물론 일제시대 단절된 위기에 놓였던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 진작하고, 선문(禪門)의 기강을 세우는데 진력했다.

특히 올해는 고인이 생전에 교류했던 성철 스님이 입적한지 10주년 되는 해였다.

서옹 스님은 평소 성철 스님의 사진을 곁에 두고 "저 분이 나보다 몸이 좋았는데 일찍 가셨어"라며 아쉬워했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사리

 

 

지난 19일 다비식을 치른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당(西翁堂) 상순(尙純) 대종사의 법체에서 나온 사리. 4과(顆) 모두 백옥빛을 하고 있으며 2과는 쌀알보다 약간 크고 나머지는 작다.

 

 

완전밀봉 항아리서 사리 나왔다…서옹스님 다비후 4과 나와

 

최근 큰스님들이 잇따라 입적하면서 사리를 남겼다. 사리는 수행력과 무관하다는 것이 불교계의 정설이지만 일반인의 사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13일 입적한 서옹 스님은 다비 결과 4과(顆)의 사리가 나왔다. 4과는 일견 적은 듯 보이지만 서옹 스님이 주석하던 전남 장성 백양사의 독특한 사리 수습방법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보통 사리는 다비 후 뼈를 모아 곱게 빻을 때 수습하지만 백양사는 별도의 방식을 쓴다.
우선 연화대(蓮花臺) 밑을 1m 깊이로 판 뒤 물을 3분의 2가량 담은 항아리를 넣는다. 항아리 입구를 한지로 막고 다시 뚜껑을 덮는다. 이어 뚜껑 위에 기와 2장을 놓고 다시 3cm 두께로 황토를 덮는다. 황토 위에 10cm 두께의 큰 돌을 올려놓고 다시 20cm 두께로 황토를 깐다. 이 위에 가로 세로 방향으로 기와를 서로 겹쳐 놓는다.
결국 항아리는 한지, 뚜껑, 기와, 황토, 돌로 완전 밀봉되는 셈. 이렇게 다비를 한 뒤 항아리를 개봉하면 그 속에 사리가 들어있다는 것.
백양사 총무국장 진우 스님은 “서옹 스님의 스승인 만암 스님이 1957년 입적했을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8과의 사리를 얻었다”며 “과학적 근거는 모르겠지만 사리가 물을 찾아간다고 추측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전남 곡성 성륜사 청화 스님은 1000여과가 넘는 사리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월하 스님이 주석했던 경남 양산 통도사의 경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어서 사리를 수습만 하고 공개는 하지 않을 예정. 한 관계자는 “월하 스님은 100과 정도의 사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은 200여과의 사리가 나왔으며, 태고종 종정을 지낸 덕암 스님도 200과 이상 수습됐다. 3월에 입적한 서암 스님은 따로 사리 수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경허 스님과 같은 고승도 사리가 나오지 않았다며 사리를 신격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http://www.sarimuseum.com/bonze_sari_news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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