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탈입망’서 물구나무…파격적 임종선사들의 기이한 죽음 죽음 공포서 벗어난 초연함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 <전등록>으로 본 ‘좌탈입망(坐脫立亡)’ 일화들
중국 선종의 역사서인 <전등록>에 보면 좌탈입망(坐脫立亡)한 예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한 다음 선택한 시간에 열반을 맞이한 선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신의 제사를 먼저 치르게 한 화산덕보 선사 먼저 임제종 황룡파의 화산덕보(禾山德普, 1025-1091)선사는 입적하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자신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스승이 보는 앞에서 미리 스승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니 제수(祭需, 제사음식)가 진수성찬이었음은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한 시간 이상 제자들이 올리는 음식과 절을 모두 받고 나서 “내일 맑은 하늘에 눈이 내리면 가겠다”고 하고는 정말 다음 날 눈이 내리자 향을 사르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했다고 한다. #제발로 관에 들어가 입적 맞은 보화선사 임제의현(臨濟義顯, ?-- 866)의 도반인 보화(普化) 선사는 입적에 이르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관 속에 들어가 열반을 맞이했다. 이 장면이 <전등록>은 물론 <임제록> 37단에도 나온다. 이 선어록에 따르면, 보화 스님이 하루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승복을 구걸했다. 사람들이 모두 승복을 갖다 주었지만, 보화 스님은 웬 일인지 “모두 필요 없다”하고 받지 않았다. 임제선사는 원주를 시켜 관(棺)을 하나 사 오게 했다. 그러고는 보화 스님에게 “내가 그대를 위하여 승복을 한 벌 만들어 놓았소.” 그러자 보화스님은 기분 좋게 곧바로 관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가 “내일 내가 동문(東門) 밖에서 세상을 하직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동문으로 구름처럼 몰려 가보니 폭삭 속은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엔 또 남문 밖에서 세상을 하직할 것이라고 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보니 역시 또 부도수표를 발행한 것이었다. 이러기를 3일, 4일 째 되는 날엔 그 누구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보화 스님은 혼자 관 속으로 들어가 길 가는 사람에게 뚜껑에 못질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소식이 즉시 시내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다투어 가서 관 뚜껑을 열어보았다. 관을 열어보니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몸 전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다만 공중에서 요령소리만 달랑달랑 울릴 뿐이었다. #물구나무 서서 입적한 등은봉 선사 등은봉(鄧隱峰) 선사의 일화도 있다. 등은봉 선사는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제자다. 등은봉 선사는 평소에도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고래(古來)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는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자 등은봉 선사는 갑자기 물구나무서기를 하더니 그대로 입적해 버렸다. 여러 사람들이 달겨 들어 넘어뜨리고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다비(화장)를 하긴 해야 하는데 다비를 할 수가 없었다. 이 기괴한 소식은 삽시간에 고을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마침 비구니스님으로 있던 속가 누이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 왔다. 누이동생은 “오라버니는 살아 생전에도 괴팍한 행동만 일삼더니 죽어서도 계속 골탕을 먹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짓이냐?”고 하면서 꼼짝 않고 서 있는 오빠의 시체를 ‘탁’ 치니 그대로 넘어갔다고 한다.
좌탈한 명허 스님, 12년간 토굴서 장좌불와
“삶과 죽음이 둘 아니며, 생사가 곧 열반이다”
미혹되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달으면 윤회가 사라진다. 감산 대사의 <몽유집(夢遊集)>
세수 63, 법랍 38세로 입적한 명허 스님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막동리 해발 1000여미터 고지에 2칸으로 토굴을 지어 12년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오랜 기간 눕지 않고 하는 참선)와 일종식(一種食: 하루 한 끼만 먹고 오후엔 일체의 곡기를 끊는 수행)으로 용맹정진해 온 숨은 도인으로 알려졌다. 열반하는 날 미리 입적을 감지하고 토굴 500여 미터 아래에 거주하는
여수 흥국사=
▼ 아래 내용출처 : http://blog.naver.com/gksdka1876?Redirect=Log&logNo=120030048980
좌탈입망 [坐脫立亡]
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을 일컫는 불교용어.
불교에서는 죽음을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본다. 곧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적멸(寂滅)의 순간인 동시에 법신(法身:영원한 몸)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예부터 선사나 고승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맞아들일 때도 일반인들처럼 누워 죽는 경우,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하거나, 앉거나 선 채로 죽는 경우 등 죽음의 형식도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범어사 청련암 양익선사의 좌탈입망 모습> *양익스님(1934~2006)은 우리나라 현대 불교무술의 창시자이며, 특히 선무도 불무도 등 불교무술 발전과 전수에 힘쓰다 열반하신 큰스님이다. 젊어서는 범어사 일주문도 경공술로 넘었다 하며, 또한 검도의 고수와 대결에 검도고수는 목검으로 양익스님은 썩은 나무 가지로 대결하였는데, 서로 무기가 마주치자 검도고수의 목검이 부러졌다 한다. 현재 골굴암 주지이며, 선무도를 가르치는 적운스님도 양익스님의 제자라 한다. 또한 스님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으며, 1차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하러 범어사에 왔다가 범어사 조실 동산 큰스님을 만나 출가 하였다. 보통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죽을 때 택하는 방법으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제3조 승찬(僧璨)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당(唐)의 등은봉(鄧隱峰)은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다비할 땔감을 준비한 후 그 위에서 열반한 관계 선사, 제자들에게 “내 죽으면 시신을 숲 속에 놓고 들불에 타도록 하라”고 유언한 혜안국사, “시신을 벌레에게 주고, 탑이나 부도를 만들지 말라”고 했던 청활스님, 제자들과 백문백답을 마친 후 법상에서 내려와 입적한 보조국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 대종사의 열반 모습> *서옹스님(1912~1996)은 1912년 10월 10일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連山面)에서 태어나 1932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인생문제와 우주진리에 관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불교서적을 읽다가 깨친 바 있어,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白羊寺)로 출가해 송만암(宋曼庵) 대종사를 은사로 득도 수계하였다. 1962년 동국대학교 선학원 원장을 지내고, 1965년부터 1974년까지 도봉산 무문관(無門關), 대구 동화사(桐華寺), 백양사, 문경 봉암사(鳳岩寺)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에 추대되었고, 같은 해 스리랑카 국립프리베다대학교에서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대한불교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고, 1978년 종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백양사 조실(1981), 수국사(守國寺) 백운암 조실(1984),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1990),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1996) 등으로 주석하면서 한국불교 발전에 힘썼다. 성철(性澈)·서암(西庵) 등과 함께 한국 현대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꼽히며, 수행방법 가운데서도 참선을 으뜸으로 삼아 항상 '본래 자비심이 있는 참 모습을 깨닫기 위해 수행할 것'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근현대 고승들 가운데서도 밧줄을 붙잡고 화두를 외며 죽음을 맞은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曉峰) 외에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寒巖), 백양사의 만암(曼庵), 순천 송광사의 초대 방장 구산(九山),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백양사의 서옹(西翁) 등이 모두 좌탈입망하였다.
선가(禪家)에서 좌탈을 중시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 상태가 다음 환생(還生)과 관련된다고 보는 사생관(死生觀) 때문이다. 좌탈을 했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도 각성(覺醒)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상태가 다음에 태어날 때의 의식수준이나 육체적 조건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공포와 혼돈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상태가 이월되어서 환생할 때에도 비각성(非覺醒) 상태로 태어나지만, 죽음을 바라보면서 죽는 죽음은 다시 환생할 때 각성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탈입망은 요즘 이야기 되는 ‘웰 엔딩(Well Ending)’의 최고 수준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선사의 열반 모습> *한암선사(1876~1951)는 1951년 2월 오대산 상원사 법당에서 사시불공을 드린 후, 평상시 좌선하는 상태로 열반(76세) 하였다. 그의 제자 탄허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가고 나이 어린 시자 한명이 모시고 있었다. 제자들이 같이 모시고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스님은 한사코 오대산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다. 한암스님 회하에 참선을 지도 받으며 거쳐간 스님들은, 효봉, 동산, 운봉, 동산, 전강, 서옹 등..우리나라의 기라성 같은 최고의 선사들이 거쳐갔다. 한암은 선방의 조실로서 수좌들에게 경을 가르치며, 선을 지도하며,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었다 한다. 가르치는 일 외에는 늘- 말없없이 좌선삼매에 있었다 한다. 언제나 그렇게 좌선삼매에 있었으니, 죽음도 평소 일상 그 모습 그대로 열반에 들었지 않나 싶다. 모시던 시자도 한암스님의 열반하신 것을 몰랐다 한다. 위 사진은 평소 존경하던 6.23 종군기자가 한암스님을 뵈러 상원사에 들렀다가 스님의 열반을 모습을 보고 시자에게 알리고 사진으로 담았다 한다. 열반한지 처음 몇시간은 참선하는 상태로 있었다 한다. 그후 시간이 지나자 고개가 위로 저절로 넘어 갔다 한다. 열반 사진의 뒷 배경은 법당이라서 시자가 천으로 가린 모습이라 한다. 어디 벽에 기댄 모습도 아니고, 일반 선사들처럼 고개를 떨군 모습도 아니다. 스님은 경허선사에게 깨침을 인가 받고, 평생을 그렇게 참선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다 평소의 모습대로 가사와 장삼입고, 부처님 앞에서 제자 답게 꼿꼿이 좌선삼매 상태로 홀로 그렇게 갔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마음달-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떠나고 남기고] 성철스님 이후 최고 禪師 백양사 방장 서옹스님 "이제 가야겠다" 하시더니 앉은채 열반 간디자서전 읽고 불교접해 고교졸업때 출가 스님은 이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백양사 설선당(說禪堂)에서 아침 죽 공양을 하고 오후에 상좌 스님들과 법담을 나누며 후학들의 정진을 격려했다. 스님은 저녁에 주지 두백 스님 등에게 “이제 가야겠다”고 말한 뒤 앉은 자세로 좌탈입망(坐脫立亡)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님은 임종 직전까지도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온 시자 호산 스님과 선문답을 주고 받는 선장(禪匠)의 면모를 보였다. 백양사측이 전한 그 모습은 이랬다. 서옹 스님이 일렀다.“호산. 호산. 동서남북에서 눈 밝은 사자새끼가 나온다. 동서남북에서 용맹스런 사자새끼가 나온다. 호산!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라.”호산 스님이 벽력같이 할(喝)을 했다. 서옹 스님이 말했다.“발 밑을 보아라.”두 사람은 마주앉아 빙그레 웃었다. 191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양정고보에 다니던 열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한 해에 돌아 가신 데 절망하다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무교회주의자였던 김교신 선생의 영향으로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을 읽으며 불교와 접하게 됐다. 주변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에 갈 것을 권했으나 “인생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1932년 양정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서옹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 문하에서 탄허, 고암, 월하 스님과 함께 본격적 참선 수행을 시작했으며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에서 2년,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에서 운영하는 교토 임제대학에서 2년 동안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 백양사 해인사 동화사 파계사 봉암사 등을 돌며 공부와 수행을 계속했으며 62년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지냈고 천축사 무문관, 동화사, 봉암사 등의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했다. 스님은 늘 수좌들에게 “순수하면서도 용맹스럽게 하라”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바치는 듯한 자세로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게 가장 간단하고 병폐도 없다”며 참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님은 1967년 어느 날 백양사 쌍계루 아래 돌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살을 보고 문득 대오하여 전에 없던 초탈의 경지를 맛보았다고 한다. 스님은 74~78년 조계종 5대 종정 재임 때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이후 줄곧 백양사에 주석했으며 96년부터는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으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스님은 특히 말년에 “종교적 생명력이란 허무한 인간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자기 밑바닥에 있는 참다운 인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며 백양사에 참사람 수련원을 개설하는 등 ‘참사람 운동’을 펼쳤다. 4월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찾아왔을 때도 임제 스님의 참사람(眞人) 정신을 강조했다. 스님은 ‘임제록 연의 ’‘선과 현대문명’‘참사람결사문’, 법어집으로는 ‘절대현재의 참사람’‘사람’등의 저서를 남겼다.
“임제의 한 할은 정안을 잃어버리고/ 덕산의 한 방은 별전지가 끊어지도다.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가니/ 백학의 높은 봉에 달바퀴가 가득하도다.” (臨濟一喝失正眼 / 德山一棒別傳斷 / 恁?來恁?去 / 白鶴高峯月輪滿)
서옹스님 '坐脫立亡' 장면공개 전남 장성 백양사 방장 서옹(西翁) 스님이 13일 밤 좌선하는 자세로 입적(좌탈입망ㆍ坐脫立亡)한 장면이 15일 공개됐다. 밝은 황토색 바지와 적삼을 입은 스님은 왼 발을 오른 발 위에 올리고 오른 손을 왼 손 위에 올리고 있다. 장의위원회는 앉은 모습 그대로 입관해 19일 백양사에서 다비식을 치를 예정이다. ‘좌탈입망’은 참선 수행을 오래 한 선승 가운데서도 드물게 보는 일로 높은 법력(法力)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까운 예로는 지난달 22일 세수 90세로 입적한 태고종 전 종정 덕암(德菴) 스님이 있었다. 덕암 스님은 수행의 경지가 높아 태고종 내에서는 조계종 전 종정 성철(性徹) 스님과 비견되기도 했다. 근세 고승 가운데 오대산 상원사 방한암(方漢巖) 스님의 좌탈입망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서옹 스님의 은사였던 송만암(宋曼庵) 스님도 좌탈입망했다.
자료출처: 한국일보
“큰 스님 불 들어 갑니다. 빨리 나오세요.” 13일 밤 참선하던 모습 그대로 입적한 조계종 전 종정 서옹 스님의 다비식이 19일 오후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거행됐다. 눈발 사이로 피어 오른 흰 연기를 타고 스님은 이승을 떠나 열반에 들었다. 조계종 법전(法傳) 종정과 법장(法長) 총무원장 등 스님 2,500여 명과 각계 인사, 신도 등 3만여 명이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법전 스님은 영결 법어를 통해 “노승의 진면목은 아득하고 심오하다”고 추모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조윤제 경제보좌관이 대독한 조사에서 “대종사께서 남기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가르침을 소중한 좌표로 삼겠다”고 애도했다. 다비식은 낮 12시50분부터 거행됐으며 20일 오후 습골 등의 절차를 거쳐 마무리된다. 사진출처: 국회사진기자단 [중앙일보 기사] 지난 13일 92세를 일기로 앉아서 입적했던 서옹 스님이 19일 평소 자신이 설법하던 우주의 영원한 품에 안겼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사리
지난 19일 다비식을 치른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당(西翁堂) 상순(尙純) 대종사의 법체에서 나온 사리. 4과(顆) 모두 백옥빛을 하고 있으며 2과는 쌀알보다 약간 크고 나머지는 작다.
완전밀봉 항아리서 사리 나왔다…서옹스님 다비후 4과 나와
최근 큰스님들이 잇따라 입적하면서 사리를 남겼다. 사리는 수행력과 무관하다는 것이 불교계의 정설이지만 일반인의 사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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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Grand B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