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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2 후일의 종교는 자연의 경이와 신비, 즉 비인격 마나1를 믿는 원시 신앙에서 예시되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진화하는 종교는 개인이 그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큼 몸소 희생해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더 낫게 만들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궁극에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베푸는 봉사가 되도록 정해졌다. * 주 1. 마나mana - 폴리네시아·멜라니세아 주민들이 믿는 대자연의 힘. 103:3.4 어느 시대의 종교에서도 지극히 중요한 체험은 신학의 교리나 철학 이론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의미에 관한 느낌이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마술의 요소가 도덕의 개념으로 대체됨에 따라서 종교는 유리하게 진화한다.
103:5.8 사람의 모든 이타적 충동이 기껏해야 그의 자연스러운 군집 본능이 발달한 것이라 가르칠 때, 그것은 사람의 이상주의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자기 혼의 이 상급 욕구가 필사 지성에 깃드는 영적 세력으로부터 방출되어 나온다는 것을 사람이 알게 될 때, 사람은 고귀하게 되고 힘차게 에너지를 얻는다. 103:5.9 영원하고 신다운 무엇이 자기 속에 살며 애쓴다는 것을 사람이 일단 완전히 깨닫는 것은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넘어서, 들어올린다. 그래서 우리의 이상이 초인간 기원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 살아 있는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정당화하고, 우리의 이타적 확신, 즉 사람이 형제라는 느낌을 현실로 만든다. 철학적 조정 103:6.1 신학은 인간 정신의 행위와 반응을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의 개인적 표현에서 심리학, 그리고 신학의 체계적인 묘사에서 철학, 이 두 가지와 얼마큼 반드시 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학은 결코 하나의 과학이 될 수 없다. 신학은 언제나 너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103:6.2 사람이 바깥에서 그의 우주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에 접근할 때, 그는 여러 가지 자연 과학을 만들어 낸다. 그가 자신과 우주의 연구를 안에서 접근할 때, 그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기원을 준다.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접근하는 이 두 가지 정반대 되는 길의 발견과 가르침 사이에 처음에 나타나도록 예정된 많은 상이점을 조화하려는 노력으로, 철학이라는 후일의 기술이 발달한다. 103:6.5 대하여 논리와 일관성이 있는 철학 개념은 유물론(唯物論)이나 유심론(唯心論)의 가설 위에 지을 수 없으니, 이는 이 두 생각 체계가, 보편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우주를 비뚤게 보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속을 바깥으로 내놓은 우주를 접촉하며, 후자는 바깥을 안으로 넣은 우주의 성질을 깨닫는다. 그러면 과학이나 종교는 결코 그 자체로서 저절로, 혼자 힘으로, 인간 철학의 안내와 신이 준 계시의 빛이 없이는, 보편적 진리와 관계를 적절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 * 195:8, 102:01, 2:7 .. 참고 하세요. 원효, 일체 유심조` 다 맞는거 아니다. 그 뜻은 맞지만 그것의 성취노선 방향 결과는 작동 안하는게 많다. 시크릿, 그래도돼.. 처럼 무조건 이미지 하면 될까.. 안되는건 안됨. 영성인은 이미 그런거 벗어야.. 로또` 로 테스트 해봐요.. 우리가 사는곳이 3차원 이라서 .. 과학과 종교 등의 스승들이 너무 독단이 심해서 문제가 큽니다. (103:7.7) 103:6.8 형이상학(形而上學)은 실패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상지혜를 사람은 파악할 수 없다. 계시는 물질 세계에서 진리에 대한 감수성을 주는 상지혜의 부재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기법이다. 계시는 진화하는 구체(球體)에서 논리를 써서 발달된 형이상학의 혼란 상태를 권위를 가지고 명료하게 해 준다. 103:6.9 과학은 사람이 자기의 물리적 환경, 에너지 물질의 세계를 연구하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이 영적 가치가 있는 우주에 부딪치는 체험이다. 철학은 멀리 떨어진 이 개념들의 조사 결과를 우주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통일된 태도와 비슷한 무엇으로 조직하고 연관지으려는, 사람의 정신 노력에 따라서 개발되어 왔다. 계시로 말미암아 맑게 된 철학은, 상지혜가 없는 가운데, 그리고 상지혜를 대신하는, 사람의 논리 대체물―형이상학―이 붕괴하고 실패한 마당에, 쓸 만하게 활동한다. 103:6.10 옛날 사람은 에너지 수준과 영 수준을 구별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수학적인 것과 의지가 있는 것을 분리하려고 애쓴 것은 보라 인종과 그 안드 후계자들이었다. 문명화된 사람은 아주 일찍 있던 그리스인과 수메르인들의 발걸음을 더욱 따라갔는데, 이들은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했다. 그리고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철학은 영 개념과 에너지 개념 사이에 항상 넓어지는 틈에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간 시대에 있는 이 여러 차이점은 최상위 안에서 하나가 된다. 103:6.11 과학은 반드시 이성(理性)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상상과 추측은 그 테두리를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종교는 언제까지나 믿음에 의존한다. 하지만 이성은 안정시키는 영향력이요, 도움이 되는 하녀이다. 그리고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의 현상을 잘못 해석한 것, 그릇되게 과학과 종교라 부르는 것들이 언제나 있어 왔고, 늘 있을 것이다. 103:6.13 계시는 상물질 간격을 좁히는, 진화하는 사람의 유일한 희망이다. 상지혜의 도움이 없이, 믿음과 이성은 논리적 우주를 파악하고 연구할 수 없다. 상지혜의 통찰력이 없이, 필사인은 물질 세계의 현상에 있는 선(善), 사랑, 진리를 헤아릴 수 없다. 103:6.14 사람의 철학은 물질 세계의 방향으로 상당히 기울어질 때, 합리주의나 자연주의가 된다. 철학은 영적 수준을 향하여 특별히 기울어질 때, 이상주의나 신비주의가 되기까지 한다. 몹시 불행하게 형이상학에 기댈 때, 철학은 어김없이 회의에 빠지고 뒤범벅이 된다. 지난 시대에, 사람의 지식과 지적 평가의 대부분은 이 세 가지 파악의 왜곡 가운데 하나에 빠졌다. 철학은 감히 직선 논리의 모양으로 실체에 대하여 그 해석을 투영하지 않는다. 철학은 결코 실체의 타원 모양의 균형, 그리고 모든 관계 개념의 본질적 굴곡을 무시(無視)해서는 안 된다. 103:6.15 필사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철학은 과학에서 이성, 종교에서 믿음에, 그리고 계시가 주는 진리 통찰력에, 논리적으로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 연합으로 사람은 적당한 형이상학을 개발하지 못한 실패와 상물질계의 상지혜를 이해하는 능력의 부재를 보상할 수 있다. 과학과 종교 103:7.1 이성이 과학을, 믿음이 종교를 유지한다. 이성(理性)에 바탕을 두지는 않아도, 믿음은 타당하다. 비록 논리에 의존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건전한 논리가 믿음을 북돋아 준다. 이상적 철학도 믿음을 기를 수 없다. 정말로, 과학과 더불어, 믿음은 그런 철학의 바로 그 근원이다. 믿음,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은 오로지 계시로만 확실히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영이신 하나님의 영적 조절자의 깃드심을 사람이 몸소 겪어야 확실하게 높아질 수 있다. 103:7.2 참된 구원은, 물질의 확인으로부터 상물질 연락이 있는 분야들을 거쳐서, 영적 상관이 있는 높은 우주 상태에 이르기까지, 필사 지성을 신성하게 진화시키는 기법이다. 땅에서 일어나는 진화에서 물질적 직관의 본능이 논리로 따져 얻은 지식의 출현보다 앞서는 것처럼, 영적 직관으로 얻는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은 상물질 및 영적 논리가 나중에 출현하고 하늘에서 진화하는 훌륭한 프로그람을 체험할 것을 미리 알리며, 이 하늘의 진화는 현세적 인간의 잠재성을 영원한 인간, 즉 파라다이스 최후자의 사실성과 신성으로 변화시키는 사업이다. 103:7.3 그러나 하늘 가는 사람이 하나님 체험을 얻으려고 안으로, 파라다이스 방향으로 손을 뻗음에 따라서, 그는 물질 우주를 에너지로 이해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공간을 향하여 마찬가지로 손을 뻗고 있을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사람이 땅에서 사는 생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이 우주와 초우주를 올라가는 체험은, 적지 않게 에너지의 변질과 물질 변형의 연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지만, 신은 하나되는 것이요, 신이 하나됨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영적 가치를 담을 뿐 아니라, 우주 통제자와 파라다이스 섬의 에너지 사실을 또한 인식하고, 한편 이 두 단계의 우주 실체는 합동 행위자의 지성 관계에서 완전히 서로 상관되고, 최상 존재의 솟아나는 신의 유한한 수준에서 통일된다. 103:7.4 체험적 철학이 중재함으로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을 연합하는 것은 사람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긴 체험의 일부이다. 수학의 추정(推定)과 통찰력의 확실성은 최상위의 최대 달성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수준의 체험에서, 지성 논리의 조화하는 기능을 반드시 요구할 것이다. 103:7.5 그러나 한 인격의 과학적·영적 모습이 진리에 지배되고, 진리가 무슨 결론으로 인도하는가 상관 없이 어디로든지 인도하는 대로 진리를 따르기를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한, 논리는 과학의 조사 결과와 종교의 통찰력을 조화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103:7.6 논리는 철학의 기법이요, 그 표현 방법이다. 참 과학의 분야 안에서, 이성은 반드시 진정한 논리에 순종한다. 참된 종교의 영토 안에서, 속을 들여다보는 과학적 접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믿음이 도무지 근거가 없어 보이더라도, 믿음은 속 관점의 기초에서 볼 때 반드시 논리가 있다. 바깥으로부터 안을 들여다보면서, 우주는 물질로 보일지 모른다. 안에서부터 바깥을 보면, 바로 그 우주는 온통 영적인 듯이 보인다. 이성은 물질적 인식으로부터, 믿음은 영적 인식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계시로 강화된 철학의 중재를 통해서, 논리는 안과 바깥의 관점을 확인할 수도 있고, 그로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를 안정시킨다. 따라서, 공통으로 철학의 논리와 접촉함을 통해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가 갈수록 더 서로에게 관대하게 되고, 회의(懷疑)가 자꾸 줄어 들 수도 있다. 103:7.8 진리―우주 관계, 우주 사실 및 영적 가치의 이해―는 진리의 영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가장 잘 얻을 수 있고, 계시로 진리를 가장 잘 비평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과학도 종교도 창시하지 않는다. 계시의 기능은 과학과 종교를 실체의 진리와 조정하는 것이다. 계시가 없는 가운데서 또는 계시를 받아들이거나 붙잡지 못할 때, 필사인은 언제나 자기가 만든 쓸데없는 형이상학의 손짓에 의존했고,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진리의 계시, 즉 상물질 성격의 상지혜를 대신하는 유일한 대용품이다. 103:7.10 필사자인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는 가정(假定)에 바탕을 둔다. 상물질 수준에서는 과학과 종교의 여러 가설은 상지혜 논리를 써서 일부 증명이 가능하다. 최대의 지위를 가진 영적 수준에서, 실제로 실체를 맛보고 실체와 함께 맛보는 체험 이전에, 유한한 증명이 있을 필요가 차츰 사라진다. 그러나 그 때에도 유한한 것들을 지나서 증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이 있다. 103:7.11 인간 생각의 모든 분야는, 증명되지 않았어도, 사람의 지성 자질을 구성하는 실체에 대한 민감성을 이용하여 받아들인 어떤 여러 가정에 근거를 둔다. 물질·움직임·생명, 이 세 가지의 실체를 가정함으로, 과학은 자랑스러운 그 추리하는 경력을 시작한다. 종교는 지성, 영, 우주―즉 최상 존재―이 세 가지의 정당성을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103:7.12 과학은 공간 속에서 시간적 에너지와 물질을 다루는 수학을 생각하는 영토가 된다. 종교는 유한한 현세의 영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최고의 영을 다루기를 가정한다. 오로지 상지혜를 오랫동안 겪는 체험을 통해서, 우주를 파악하는 이 두 가지 극단이 기원, 기능, 관계, 실체, 운명을 비슷하게 풀이하도록 만들 수 있다. 에너지와 영의 분산을 최대로 조화시킨 것은 일곱 으뜸 영의 회로 연결에 있다. 그들의 처음 통일은 최상위의 신에 있고, 마지막 통일은 첫째 근원 중심,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성에 있다. 103:7.13 이성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물리적 세계 속에서, 세계와 함께 겪는 체험에 관하여, 의식이 내리는 결론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영적 의식―사람이 달리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정당성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논리는 믿음과 이성이 통일된 전진, 진리를 찾는 합성된 전진이며, 필사 존재들을 구성하는 지성 자질에, 즉 사물과 의미와 가치를 날 때부터 인식하는 데, 기초를 둔다. 103:7.14 생각 조절자의 계심에는 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진정한 증명이 있다. 그러나 이 계심이 정당함을 바깥 세계에 보여 줄 수 없고, 이처럼 하나님이 깃드심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그럴 수 있다. 조절자의 의식은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선을 초월 지성이 파악하는 것, 인격의 사랑하려는 동기에 기초를 둔다. * 영적 체험의 종교는 친교하는 충동의 근원이다. 103;7.9 철학과 종교 103:8.1 과학과 철학이 모두 추리와 논리를 써서 하나님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가정할까 싶어도, 영에게 인도받는 인간이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만이 성격을 가진 그러한 최상의 신의 확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진리를 그렇게 육신화하는 기법으로, 하나님이 있음직하다는 철학적 가정은 종교적 현실이 된다. 103:8.3 착하고 고귀한 남자가 제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지만 결혼 애정 심리학에서 필기 시험에 도저히 만족스럽게 합격할 수 없을지 모른다. 또 다른 남자는 제 배우자에게 거의 또는 아무 사랑이 없어도, 그러한 시험에 아주 쓸 만하게 합격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참된 성품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이 불완전함은 그의 사랑의 실체나 진실성을 한 푼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103:8.4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믿음으로 그를 알고 사랑한다면―그러한 체험의 현실성이, 과학이 넌지시 던지는 의심의 말이나, 논리로 트집잡기나, 철학의 가설, 아니면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는,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영리한 제안 때문에, 어떤 면에서도 줄어들거나 값이 떨어지게 하지 말라. * 103:8.5 하나님을 아는 종교가의 확신은 의심하는 유물론자의 불확신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불신자의 불확신이 체험을 가진 신자의 깊은 믿음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힘차게 도전받아야 한다. 103:8.6 철학이 과학과 종교, 이 둘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되려면, 유물론과 범신주의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오로지 성격의 실체―변화 가운데 있는 영구성―을 인정하는 철학이 사람에게 도덕적 가치가 있을 수 있고, 물질 과학과 영적 종교를 다루는 이론 사이에 연결로서 쓰일 수 있다. 계시는 진화하는 철학의 허약성에 대한 보상이다. * 범신론 - 이것도 하나의 무신론으로 치부해도 됨. 각 개인들의 현존(각자 성격자) 들이 다 하나님 이다 는 것도 맞질 않는다. 영성인들이 착각 많이 함. 각자 귀한 부처같은 존엄성으로 신적 요소들이 규합함으로 달라지는거지 당장은 아니다. 진화존재 창조존재 마찮가지. 지놔체들도 최후자 까지 가는데 많은 세월의 공부 연단 등 필요함. 그 귀한게 막 주어지지 않슴. 과정을 통과한 후.. 기존의 서적들은 모르니 저자들이 다 신으로 그렸지만.. 그게 생각 조절자님이 오셔서 역사하는 개인 같으면 그땐 견성한 (작은)하나님`` 정도로 보면 되고.. 종교의 본질 103:9.1 신학(神學)은 종교의 지적 내용을 다루고,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모습을 다룬다. 종교적 체험은 종교의 영적 내용이다. 종교의 지적 내용에 신화 같은 변덕과 심리학적 망상이 있고, 형이상학의 잘못된 가정(假定)과 스스로 속이는 기법, 종교의 철학적 내용에 대하여 정치적 왜곡과 사회 경제적 변질이 있는데도, 개인적 종교에서 얻는 영적 체험은 여전히 진정하고 타당하다. 103:9.2 종교는 단지 생각 뿐 아니라, 느낌, 행동, 생활과 상관이 있다. 사고(思考)는 물질 생활에 더 가깝게 관계되며, 온통 그렇지는 않지만, 주로 이성과 과학의 사실에 지배를 받고, 영의 영역을 향한 비물질 범위에서는 진리에 지배를 받아야 한다. 사람의 신학이 아무리 착각이고 그릇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전적으로 진정하고 영구히 참될 수 있다. 103:9.3 * 불교는 유란시아의 진화 역사 전체를 통해서 대두된 바, 하나님이 없는 최선의 종교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이 신앙이 발전되자, 신이 없는 채로 남지는 않았다. 신앙이 없는 종교는 모순이다. 하나님 없이, 종교는 하나의 철학적 모순이요 지적 부조리이다. * ub 131:3 , 94:8 .. 참조 하오 . 103:9.4 자연 종교의 마술과 신화 같은 족보는 후일에 계시 종교들의 실체와 진리, 그리고 예수가 가졌던 종교의 완벽하고 유익한 복음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마침내 종교로부터 마술의 미신, 신화(神話)의 환상, 전통적 독단주의의 사슬을 벗겨 버렸다. 그러나 이 초기의 마술과 신화는 물질을 초월하는 가치와 존재들의 계심과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나중에 나타나는 우수한 종교를 위하여 무척 효과 있게 길을 닦았다. 103:9.5 종교적 체험은 순전히 영적, 주관적 현상이지만, 그러한 체험은 우주의 객관적 실체의 가장 높은 영역을 향하여 분명하고 생생한 믿음의 태도를 받아들인다. 종교적 철학의 이상은, 온 우주의 무한한 아버지의 절대 사랑에 사람이 무조건 기대도록 이끌 그러한 믿음이요 신뢰이다. 그러한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이상주의 욕구의 철학적 객관화를 훨씬 초월한다. 그런 체험은 실제로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로지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일에만 아랑곳한다. 그러한 종교를 나타내는 표시는, 최상의 신을 믿는 믿음, 영원히 살아남기를 희망하는 자세, 그리고 사랑, 특히 동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103:9.6 신학이 종교의 주인이 될 때, 종교는 죽는다. 종교는 생명이 아니라 교리가 된다. 신학(神學)의 사명은 단지 개인의 영적 체험을 자의식하도록 돕는 것일 뿐이다. 신학은 종교의 체험적 주장을 정의하고 분명히 밝히고 해설하고 정당화하는 종교적 노력이며, 결국에는 오직 살아 있는 믿음이 이 주장을 입증할 수 있다. 우주의 상급 철학에서, 지혜는 이성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연합하게 된다. 이성, 지혜, 믿음은 사람의 가장 높은 인간적 성취이다. 이성은 사람에게 사실의 세계, 사물을 소개하며, 지혜는 사람에게 진리의 세계, 즉 관계를 소개한다. 믿음은 사람을 신성(神性)의 세계로, 영적 체험으로 들어가게 한다. 103:9.7 믿음은 이성이 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기꺼이 이성(理性)을 데리고 가며, 그리고 나서 완전한 철학의 한계까지 지혜와 함께 계속 간다. 다음에 믿음은 오직 진리의 동반을 받으면서, 한이 없고 결코 그치지 않는 우주 여행 길을 감히 떠나려 한다. 103:9.8 과학(지식)은 이성이 정당하다, 사람이 우주를 파악할 수 있다는 선천적 (보조 영의)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철학(조정된 이해)은 지혜가 정당하다, 그 물질 우주가 영적 우주와 조정될 수 있다는 선천적 (지혜 영의) 가정(假定) 위에 기초를 둔다. 종교(몸소 겪는 영적 체험의 진리)는 믿음이 정당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선천적인 (생각 조절자의)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103:9.9 필사 인생의 실체를 충분히 깨닫는 것은 이 이성, 지혜, 믿음의 가정을 점진적으로 기꺼이 믿으려 하는 태도에 있다. 그러한 인생은 진리에 자극을 받고, 사랑이 지배하는 인생이다. 이것들은 객관적 우주 실체의 이상이며, 그 실체의 존재는 물질적으로 보여 줄 수 없다. 103:9.10 일단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인식하고 나서, 이성은 지혜를 나타낸다. 지혜가 옳은 것과 그른 것, 진리와 잘못 사이에서 선택할 때, 지혜는 영의 인도하심을 보여 준다. 이처럼 지성·혼·영의 활동은 늘 가까이 연합되고, 기능 면에서 서로 연결된다. 이성은 사실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지혜는 철학과 계시를, 믿음은 살아 있는 영적 체험을 다룬다. 진리를 통해서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르고, 영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선에 이르기까지 올라간다. 103:9.11 믿음은 겨우 신의 계심을 신비스럽게 느끼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로 이끈다. 믿음은 그 감정적 결과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감정의 만족 뿐 아니라, 믿고 아는 체험이다. 103:9.12 종교적 체험에는 영적 내용에 비례하는 실체가 있으며, 그러한 실체는 이성, 과학, 철학, 지혜, 그리고 인간의 모든 다른 성취를 뛰어넘는다. 그러한 체험의 확신은 무너뜨릴 수 없고, 종교적 생활의 논리는 반박할 수 없다. 그러한 지식의 확실성은 인간을 초월한다. 그 만족감은 극도로 신성하고, 그 용기는 꺾을 수 없고, 그 헌신은 의심이 없으며, 그 충성은 더할 나위 없고, 그 운명은 최종이다―영원하고 궁극성과 보편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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