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허공에 쓴 직유법
이서빈
삶뿌리 흰눈처럼 깨끗해지면 참 좋겠습니다.
온누리 흰눈처럼 희디희면 참 좋겠습니다.
행복가루 흰눈처럼 싸락싸락 쌓이면 참 좋겠습니다.
사랑도 흰눈처럼 폴폴 내리면 참 좋겠습니다.
지옥 같은 푸른근심 흰눈으로 지우면 참 좋겠습니다.
후미진 곳에 고인 어둠 다 발라먹고, 밀려오는 슬픔더미에 하얀수련 피우면 참 좋겠습니다.
늙은 정한수 그릇에 담긴 흰기도에 주름살 지우고 물청빛 웃음 피면 참 좋겠습니다.
소나무 눈 터는 소리 푸드득, 푸르러지면 참 좋겠습니다.
온갖 더러움 흰눈으로 삶고 두드리고 행군 우주를, 빨랫줄에 널어 말리면 참 좋겠습니다.
저 눈의 눈처럼 해맑은 웃음이,
까르까르르 펄럭이면 참 좋겠습니다.
--이서빈 외 {새가 허공에 쓴 직유법}에서
이 땅에 발 붙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 인간들의 가장 이상적인 동물은 새이고, 따라서 새는 우리 인간들의 찬양과 숭배의 대상이 된다. 뱀과 독수리의 결합체인 용은 우리 인간들의 수호신이 되고, 수많은 새들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전도사가 된다.
이서빈 시인의 [새가 허공에 쓴 직유법]은 “온갖 더러움 흰눈으로 삶고 두드리고 행군 우주를, 빨랫줄에 널어 말”리고, “저 눈의 눈처럼 해맑은 웃음이” 온세상 곳곳으로 “까르까르르 펄럭이면 참 좋겠”다는 너무나도 간절한 소망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삶뿌리 흰눈처럼 깨끗해지면 참 좋겠고, 온누리 흰눈처럼 희디희면 참 좋겠다. 행복가루 흰눈처럼 싸락싸락 쌓이면 참 좋겠고, 사랑도 흰눈처럼 폴폴 내리면 참 좋겠다. 지옥 같은 푸른근심 흰눈으로 지우면 참 좋겠고, 후미진 곳에 고인 어둠 다 발라먹고, 밀려오는 슬픔더미에 하얀수련 피우면 참 좋겠다. 늙은 정한수 그릇에 담긴 흰기도에 주름살 지우고 물청빛 웃음 피면 참 좋겠고, 소나무 눈 터는 소리 푸드득, 푸르러지면 참 좋겠다.
삶의 모든 고통과 그 고통의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지옥 같은 푸른근심”을 다 지우고, “후미진 곳에 고인 어둠 다 발라먹고, 밀려오는 슬픔더미에 하얀수련”을 피워내는 시인 정신이 자유로운 새가 된 것이고, 이 시인 정신이 은유가 아닌 ‘직유법’을 너무나도 과감하고 용기 있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은유란 옷이고 장식이지만, 직유란 알몸이고 사실 그대로의 진실인 것이다. 그는 언어와 도덕과 역사와 전통 속에 숨은 은둔자도 아니고, 그 어떤 대물림의 상속자나 위선자도 아니다. 그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그 앎과 지혜를 그의 동료들, 즉,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들’과 함께 실천하는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전도사라고 할 수가 있다. 이서빈 시인의 언어는 너무나도 순수하고 깨끗하며, 그래서 인간과 모든 동식물들이 다 함께 공존-공생할 수 있는 삶의 철학의 선구자가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서빈 시인은 새가 되고, 새는 자유자재롭게 하늘을 날아다닌다. 새의 날개는 직유와도 같고, 직유는 정직함과 성실함의 대명사와도 같다. 이서빈 시인은 오늘도, 내일도 날아오른다. 하늘높이 날아올라 모든 민족적 독선과 종교적 광신을 짓밟아버리고,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거짓과 위선과 이기주의를 짓밟아버리고, “온갖 더러움 흰눈으로 삶고 두드리고 행군 우주를, 빨랫줄에 널어 말리”듯이, 이 지구촌과 이 우주에서 [새가 허공에 쓴 직유법]으로 그의 ‘삶의 철학’을 선사한다.
“저 눈의 눈처럼 해맑은 웃음이”, “까르까르르 펄럭”이는 그날까지......
이서빈 시인의 ‘삶의 철학’은 ‘흰눈의 철학’이며, 그의 ‘흰눈의 철학’은 ‘우주철학의 행복’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삶뿌리 흰눈처럼, 온누리 흰눈처럼, 행복가루 흰눈처럼, 사랑도 흰눈처럼, 그의 삶의 철학은 ‘흰눈의 철학’이며, ‘순결의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흰눈은 결백이고 순수이고, 흰눈은 정결이고 순결이다. 흰눈은 최초의 최초이고, 그 어떤 얼룩도 없는 ‘무오류성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흰눈은 그의 꿈이고, 열정이고, [새가 허공에 쓴 직유법]은 나와 너, 인간과 동식물, 은하계와 은하계까지 다 포함하는 ‘우주철학의 행복론’으로 활활 타오른다.
흰눈이 불타고, 흰눈이 훨훨 타오른다.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