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구속사 강해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10여 년이 지나면서 신령한 나라를 건설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하는 계획은 점차 구체적으로 계시되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아브라함은 두루 살펴봄으로서 그 땅에 새 나라가 건설될 것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새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건설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 왔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는 말씀에서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의 약속을 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였던 약속하신 땅에 대해서는 이미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창 15:18-21).
그러나 그 땅에 건설될 새 나라를 구성할 백성들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수차 확인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는 그 나라를 건설할 아들이 없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 15:4)는 약속을 명확하게 하셨고 아브라함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는 증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정하고 언약 체결식을 거행하셨던 것이다.
1. 아브라함의 후손이 차지하는 구속사적 위치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창 15:13-16)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셨다.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그 모든 하나님의 경영을 이루기 위한 약속이 실제로 성취됨을 상징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일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건설할 새 나라와 새 민족에 대한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제 그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아들이 태어날 때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또 하나의 귀중한 증표였다. 사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라에게서는 전혀 아들을 생산할 잉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사라는 자기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관습에 따라 여주인이 아들을 얻지 못할 때, 몸종이 대신 아들을 생산하여 가문을 잇게 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라도 그러한 관습을 익히 보아왔기 때문에 자신에게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아들을 생산할 수 없음을 알고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고자 한 것이다. 아브라함 역시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라도 아들을 얻을 수 있다면, 장차 그 아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유업을 잇게 하여 그 아들의 후손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의 첩이 된 하갈은 마침내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였다. 하갈이 잉태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가계를 이을 자식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새 나라를 건설할 아브라함의 후손이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건설할 새 나라의 백성들을 생산할 것이고 그 후손들이 새 나라의 백성이 되어 신령한 나라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것은 역사상에서 새 나라를 건설해 나감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유업에 대한 사라와 하갈의 싸움
하갈은 종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였다는 것 하나만으로 처음부터 자유인이었던 자기의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였다. 이에 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아브라함을 통해 재차 확인하고 하갈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종으로 취급하고 학대를 하였다. 사라와 하갈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발생한 것이다. 이 싸움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여자들의 질투만은 아니었다. 그 내면에는 “누가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느냐?” 하는 싸움이었다. 즉 “누가 하나님께서 건설할 새 나라에 참여하느냐?” 하는 중대한 싸움이 숨겨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였다는 것은 곧 그 씨가 장차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그 씨를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잉태하느냐 하는 것은 장차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와 같은 중대한 분기점에 사라와 하갈이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몸종인 하갈이 주인 사라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사라는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갈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사라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는 도전을 허용할 수 없었다. 새 나라의 백성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될 것이지만, 하갈이 그 후손을 잉태하였다는 이유로 사라의 위치와 역할까지도 빼앗길 수 없었던 것이다. 사라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역사적 위치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자신과 하갈 사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판단해 주실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창 16:5). 그러자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처음부터 하갈이 사라의 종이었음을 상기시키고 하갈을 사라의 마음대로 처신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아브라함 역시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인가에 대하여 자기가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사라의 처지가 가련하게 여겨지는 인간적인 정분 때문에 하갈을 사라의 손에 맡긴 것은 아니었다. 사라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갈이 사라의 유업을 탈취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하갈의 편을 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갈을 두둔하지 않고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려 보낸 것이다.
사라가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삼게 해서라도 아들을 얻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필히 이 땅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역사적인 요청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러한 사라의 의도를 하갈이 잘 알고 있었다면, 비록 자기가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였다 하더라도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갈이 사라보다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되어야 하는 역사적인 당위성에 그 의미를 부여해야 했던 것이다. 그만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라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아들을 낳을 수 없음을 알고 하갈을 통해서라도 아들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하갈은 그러한 사라의 의도를 모를 리 없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한 것을 기화(奇貨)로 주인을 멸시하고 사라가 누릴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광을 대신 누리려고 하는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러한 하갈의 간사하고 음흉한 속셈을 알아차린 사라는 그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아브라함의 집을 떠남으로서 더 이상 아브라함의 통치 영역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하갈과 그 자식 역시 새 나라에 속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갈은 이미 하나님께서 건설할 새 나라를 포기하고 아브라함의 집을 떠난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사라로부터 빼앗아 보겠다는 하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기 전에는 감히 사라가 누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 도전하거나 빼앗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하갈은 사라의 통치 영역에 속하여 있었다면 당연히 그 주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라가 건설됨에 있어 비록 사라의 종이지만 사라를 대신하여 아브라함의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갈은 그처럼 중대한 위치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육신의 생각으로 사라가 누릴 영광을 탈취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