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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십자가의 길, 영광의 길
요한복음 12:20-33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아 예배에 참석하신 교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아주 특별한 내용입니다.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신 주님은 특별한 면담요청을 받습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전해주는 내용은 특이하게도 헬라인들이 주님을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은 다짜고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헬라인들의 면담요청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헬라인들은 그리스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월절과 같은 명절에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꼭 유대인들만 온 것은 아니고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유대인들을 흠모했던 이방인들이 함께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보면, 헬라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방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셨지만 그들의 관심사항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고 다른 일정도 다 잡혀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왜 만나자고 했을까요? 만나서 무슨 말씀을 나누었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헬라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하고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요?
훗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9-11절)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영광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에서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라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본체를 회복하시는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이 세상의 영광을 쟁취하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종려주일에 많은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환영을 하고 자기 옷을 길에 펴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것이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왕이 되는 세상의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으셨지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영광을 뒤로 하고 로마군인들에 잡혀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군중들의 환호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바뀌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다음의 부활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실 영광을 생각하심으로 끝까지 고통과 수치를 참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영광을 기대하며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생각하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도들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고난 속에 동참하고 주님이 받으신 영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헬라인들의 면담요청을 받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모든 사람들, 그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들을 보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달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면담요청을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하나의 사인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기를 다시 한 번 다짐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길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27절을 보면, 주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이 참으로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번역합니다.
이 시간을 면하게 해 달라는 간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렬해지고 할 수 만 있다면 이 잔을 면하게 해 달라는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간구대신에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 구원의 방법을 완성하라는 뜻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가고 그 십자가를 담당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주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기로 다짐합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속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속에 부족한 모습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내 뜻, 내 목적, 내가 바라는 일을 위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간구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을 내 이익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이루어주시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으면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옵니다.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을 주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말씀과 내용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나의 신앙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보다는 하나님,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 내 생각보다는 주님의 생각을 먼저 앞세우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면 필요한 것은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시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24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야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절)
이러한 말씀은 영광을 얻는 것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광을 얻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이기거나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독교의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은 놀랍게도 십자가와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빌립보서의 내용을 통하여 앞부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영광을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본래적인 신분을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 곧 하나님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빌2:7-8절)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시인하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복종하시고 희생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비결이셨고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인줄 믿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이미 주님이 지심으로 끝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잘 감당하고 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길이 어렵고 힘들지만 끝까지 붙잡고 나아갈 때 영광이 주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6절에서 주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는 말은 주님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나도 걸어간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고 주님을 본받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면 그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고 험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길은 따라가는데 내가 원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길은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가운데 ‘주의 길을 가리’가 있습니다.
1.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2.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1절에서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이라고 노래하면서
그러나 2절에 가서는 이 길을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라 가는 길은 처음에는 고난의 길같이 험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길은 끝내 승리의 길이 되고 영광의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고 주님 걸어가신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미 에콰도르의 아오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목숨을 잃은 짐 엘리엇이 학창 시절 큐티를 하며 묵상한 내용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세상엔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오히려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한다.
젊음도 지나가고, 명성과 쾌락도 지나가고, 아무리 많은 물질도 결국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저를 불태워 주옵소서.”
하나님을 위한 고난과 십자가의 삶은 괴롭고 힘들어도 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는 영광의 길입니다.
이 신앙의 길, 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영원하고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기쁨으로 감당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