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1384년에 태어난 프란치스카는 로마의 귀족 집안의 자녀로 12살 때
다른 로마의 귀족인 로렌조 폰지아니와 형식적인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수녀가 되려고 하였으나,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였고, 모범벅인 아내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결혼 후 얼마 안되어서 그녀는 중한 병이 들었는데 남편은 그 병을 고치려고 마법사를 불러들였으나,
프란치스카는 그를 딱 잘라 거절하며 집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성 알렉시스가 나타나서 그녀를 치유해 주었다.
그 후로 그녀는 그 수호천사의 발현과 도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 수호천사는 그녀를 팔꿈치로 슬쩍 건드리곤 했다.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지역에는 폰지아니의 성이 있었고 그 한 모퉁이에 리빠의 성 프란치스코 소성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1212년에 세떼솔리의 야고바라는 로마의 귀부인이 성 프란치스코에게 바친 것인데, 그녀는 1226년에 프란치스코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다.
적어도 1414년 까지 그 이웃 수도원은 트린치의 바오로 형제와 바울루치오 형제에 의해 1368년에 시작되었고, 다음 세기에 베르나르디노와 요한 카피스트라노 같은 성인에 의해 공포된, 프란치스코 1회의 엄수파 수사들의 개혁운동에 속하는 34개중의 하나였다.
프란치스카 폰지아니가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한 곳이 이 리빠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그곳 신부들 중에서 바르톨로메오 본디 신부가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비노자라는 프란치스카의 큰오빠의 아내가 폰지아니 성에서 함께 살았는데, 그녀도 역시 결혼전에는 수도회에 들어가고 싶어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프란치스카와 함께 자선과 신앙 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함께 쓰지 않는 다락방이나 정원의 낡은 여름 움악에서 몇 시간 동안 기도 하곤 하였다.
17살에 프란치스카는 첫 아들을 낳아 아기의 이름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지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프란치스카는 집안 일을 도맡게 되어 유능하게 또 성실한 크리스챤답게 의무를 잘 해나갔다.
마을에 기근이 들었던 동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옥수수와 포도주를 제공하였는데 너무 후하게 주어
그녀의 남편은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비어있던 곡식창고가 놀랍게도 밀로 가득 차 있고, 빈 술통이 포도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는 아내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해 주었다.
1400년 로마는 칩입을 받은데다 뒤따른 내란으로 폰지아니 집안에도 재난이 가해졌다.
로렌조는 로마 교황의 군대와 싸웠으나 부상을 당했다.
프란치스카가 그를 간호하여 건강이 회복되자 또 다시 전쟁에 참여하였다.
첫아들 요한은 포로로 잡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페스트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나 프란치스카의 둘째 아들과 딸이 그 병으로 죽었다.
황폐한 폰지아니 농장에서 농부들이 음식을 구걸하기 위해 프란치스카에게 왔다.
프란치스카는 환자들, 굶주린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그룹으로 조직된 로마의 부인들이 그녀의 일을 돕기로 하였다.
얼마동안 그녀도 페스트에 걸렸으나, 잠시 후 금방 회복되어 자선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카의 죽은 둘째 아들이 나타나서 대천사를 그녀의 수호천사로 모셔다 드렸다.
수호천사는 그녀가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면 자신을 감추어서, 그녀가 통회의 행실을 보여 줄 때까지 다시는 빛을 발하지 않았다.
큰아들 요한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얼마되지 않아 어떤 경솔한 성품의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그여자는 프란치스카를 매우 싫어하여 화를 내다가 이상한 병에 걸려 괴로와 했다.
프란치스카의 다정한 손길이 그녀를 치료해준 후 며느리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프란치스카는 집안 일을 며느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도시의 자선사업에 전적으로 봉사하였다.
1425년에는 그녀와 동료 6명의 로마의 귀부인들이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이것이 3회 회원임을 취소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프란치스카와 바노자가 100마일을 걸어 로마에서 성프란치스코의 도시인 아씨시로 순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씨시 근처에서 성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 발현하여 그의 지팡이로 야생 배나무를 쳐서 배고프고 목 마른 이 순례자들에게 시원하고 물이 풍성한 배를 선물하였다.
1433년 로렌조가 죽자 프란치스카와 그녀의 동료들은 '헌신자회'를 창설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거룩하신 성부와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일했다.
도시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픈 아들을 방문하고 수녀원에 돌아온 후 프란치스카는 갑자기 병이 들어 폰지아니성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7일 후인 1440년 3월9일 그녀는 사망하였다.
교황바오로 5세는 1608년 그녀를 시성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그녀를 기념하여 산타 프란치스카 로마나라고 불리우는 로마 성당의 제대 아래에 있다.
성녀는 모든 베네딕도회의 중요한 수호자로 존중되고 있으나
역시 프란치스코 3회의 옷을 입었던 성인들 중의 한 분이시다.
(평화의사도 -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기념집에서)
1384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매우 어려서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았다.
성녀는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병자를 돌보아 주었다.
덕행에서 특히 겸손과 인내 그리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선업에서 뛰어났다.
1425년 성 베네딕도의 회칙을 따르는 봉헌자회를 창설했으며, 1440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