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카알 마르크스(1818 – 1883)
독일 트리어 유대인 가문의 출신이며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저술활동으로 인해 마르크스는 무국적자 신세로 수십년 간 영국 런던에서 처자식과 함께 망명생활을 했다. 1840년대에 그의 사상은 철학과 경제학을 결합하였다. 이것도 마르크스가 목격한 당시의 사회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런던에서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합작,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연구하며 주요 저작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1848년 출간된 소책자 《공산당 선언》과 3권짜리 《자본론》이다.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일대 학파를 이루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 사회가 계급투쟁을 통해 진보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계급투쟁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와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투쟁으로써 나타난다.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에 의해 통제되며,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이 제도는 부르주아지가 임금 노동자를 부려먹는 제도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지와 노동자간에 긴장을 일으킨다. 그 긴장에 의해 자본주의는 자멸하고 사회주의 체제로 대체될 것이라 예측했다.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마침내 계급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골자다. 노동계급이 혁명적 행동으로써 자본주의를 거꾸러뜨리는 사회경제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동하기에 평생을 바쳤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근대 사회학의 뼈대를 세운 인물 중 하나이다.
(마르크스의 생애는 생략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홍수를 이룹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일생 내내 외국으로 쫓겨 다녔고, 궁핍한 생활로 고생했고,
고생이 심할 때는 공부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1844년부터 13년간 궁한 생활을 감당하느라 여러 가지 부업을 뛰었고, 경제학 연구는 거의 내팽개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경제학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주로 영국의 자본주의와 영국의 사회를 비판하였다. 1, 2, 3권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생산은 분업에 의해 이루어지고 생산물은 거의 모두가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상품은 인간에 유용하기 때문에 생산, 판매되며, 상품은 가격을 갖고 있다. 그 가격은 대체로 그 상품을 생산할 때 사회적으로 평균하여 어느 만큼의 노동시간이 필요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화폐도 원래는 상품이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누구나 구하는 상품으로서 매개 역할을 한다(지폐는 상품이 되는 화폐, 예컨대 금화와 언제나 바꿀 수 있기 때문에 화폐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상품이 화폐를 매개로 교환된다는 것은 사실 인간의 노동이 교환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산하는 데 10시간 걸린 A라는 상품을 팔아 마찬가지로 10시간 걸린 B라는 상품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낳은 노동자라는 인간은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몸=정신적·육체적 능력='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으므로 이 유일한 소유물='노동력'을 팔아서 임금을 얻고 그것으로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노동자의 노동력마저 상품으로 매매된다는 데에 자본주의 사회의 특유한 현상이 있다. 이 노동력이라고 하는 상품의 가치, 곧 임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를 생산하기 위한 가치(비용)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비용은 바로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비인 것이다. 사들인 상품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구매주의 권리이다. 따라서 노동력을 산 주인(자본가)은 임금이 회수될 수 있을 만큼 노동자를 부리는 동시에 반드시 그 이상으로 노동자를 노동시킨다.
임금을 회수하기 위한 노동이 '필요노동(必要勞動)'이며, 이를 초과한 노동은 '잉여노동(剩餘勞動)'이다. 잉여노동은 자본가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자기 몫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착취'라고 말했다.
잉여노동이 생산하는 생산물의 가치가 '잉여가치'이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사는 목표는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잉여가치가 없으면 자본가는 살아갈 수조차 없다. 따라서 잉여가치의 생산은 불가결의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실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노동의 착취)라는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이 관계를 확대하기 위해 잉여가치를 전부 소비하지 않고 일부분을 축적하여 생산의 확대에 돌린다.
자본의 축적이 진척되면 기계 등이 사용되어 생산력이 증대한다. 그 결과 자본 중에서 생산수단(원료·도구·기계 등)을 위해 투하되는 부분과 임금에 투하되는 부분의 비율이 달라진다. 곧 전자의 후자에 대한 비율이 증가한다.
사회 전체의 자본에 대해 볼 때, 사회 전체의 자본이 증대함에 따라 임금에 할당되는 비율은 누진적으로 감소된다. 그래서 노동자가 남아돌게 된다. 게다가 대기업 때문에 중소기업자가 몰락하여 노동자가 되고 실업자는 증가한다. 그러므로 한쪽의 극(자본가 계급)에서의 부의 축적은 다른 쪽의 극(노동자 계급)에서의 빈곤, 노동고(勞動苦)·예속·불안·무지·도덕적 타락의 축적인 것이다. 물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노동 자체가 노동자 자신을 점점 더 불행하게 만들고 더욱더 비인간화하며, 거꾸로 착취하는 자본가를 더욱더 강력하게 만든다.
자본이 지배하는 한 이 모순은 계속되고 확대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그러나 학대받는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일어나고, 그들에 대한 억압·착취, 그들의 빈곤·예속·퇴폐가 증대하면 할수록 그들의 반역도 증대한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무덤을 팔 사람(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유재산 제도가 태어남으로 모든 역사는 핵심 자원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계급 간의 폭력 투쟁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와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역사의 경향과 사회갈등의 결과를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르크스 추종자들 중 일부는 공산주의 혁명은 가만히 있어도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듯이 마르크스의 생각은 '진정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세계를 직접 변혁시키고자 노력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헤겔(좌)과 포이어바흐(우)의 변증법 사상은 마르크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와 앵글스의 사상은 한 시대의 특정 계급을 반영한 것인데, 그들은 자기의 주장이 보편성이 있고, 영원하다고 믿었다.
만약에 마르크스 주의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서양 사회는 어떠하였을까?
성장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 운동조직을 만들어서 자신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앵겔스가 죽은 1895년에 독일과 프랑스에서 사회민주의 정당이 나타났다. 1912년에는 독일의 사회주의 정당이 34.8%를 얻어 제 1당이 되었고
프랑스 등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정부의 각료로 참여한다.
미국은 예외였다. 투쟁해야 할 귀족 계급이 없는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
미국은 유럽의 노동자 계급이 이민와서 성공하면 자본가가 된다.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를 위하여 싸워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1900년 전후가 되면 유럽에서 마르크스가 틀렸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물론만으로는 사회를,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왔는데도 곧 죽어도 유물론만 외쳤다.
1차 대전의 대량 살상을 공산주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었다.
레닌이 이끈 러시아 볼쉐비키즘이 혁명에 성공한 이유는 러시아 사회가 후진 사회였고, 농촌의 농민계급이 소수 토지 소유주에게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레닌이 권력투쟁 과정에서 러시아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로 이끌고 갔다.
---->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사실을 두고 실패는 자명하다고 말한다.
스탈린 이후, 중국의 마오이즘, 한국의 조선인민공화국은 현대사에서 다루겠습니다.
*공산당 선언
1848년 2월 21일 첫 출판되었다.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초안이 작성되었다. 생산 방식이 사회 제도의 성격을 규정하며 정치와 사회적 사상의식의 기초로 된다는 유물사관의 원리가 천명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모순을 가지고 나락으로 향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자동적으로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이후의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포함하여 무계급 사회를 겨냥한 일련의 행동을 권장하였다. 이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남미 등의 사회주의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공산당 선언》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로, 선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지식인층으로 대상으로 전 세계에 퍼졌다. 그러나 이미 이 때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퍼트리는 강령이라기보다는 정치와 사회를 공부하기 위한 고전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혔다. 즉 한물 간 이념이었다.
사회에 미친 영향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럽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 1871년의 파리 코뮌, 1881년에 독일에서 사회민주당 의원의 12명 당선 등등을 영향으로 본다.
공산당 선언이 "전체 사회주의 문헌 가운데 가장 널리 유포되고 가장 국제적인 작품이며 시베리아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모든 나라의 수천만 노동자들에게 인정받는 공동 강령"이다.
러시아에서의 혁명가능성을 언급했다.그리고 1917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예언한 만인의 자유 신장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도래하지 않았다.
*68혁명기(좌파 학생 운동)
68혁명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이상 세계를 뒤흔드는 여파를 끼쳤는데, 이는 《선언》의 평등 이념의 확실한 복귀이자 확장에 다름 아니었다. 신좌파는 구좌파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경제적 착취를 강력히 반대했다. 동시에 착취 개념을 무한정 확장했다. 사회적, 문화적, 관료적, 인종적, 성적 착취 등과 아동학대까지 거의 모든 사회문제와 불평등에 저항했다.
(*이때는 평등사회의 구현이 목적이었고, 불평등 사회를 학대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자본론>
부제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여기서 '비판'이 겨냥하는 대상은 경제학의 개별 이론들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전체'다. <자본론>의 목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학이라고 일컬어지는 학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고전경제학이나 현대 주류경제학은 가격(가치), 이윤, 생산자, 소비자 같은 현상들을 과학적인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와 같은 과학적 설명을 마르크스가 비판한 지점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사회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경제현상들은 오직 자본주의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정리하면, 자연스러운 경제현상이라고 당연시되는 가격이나 이윤 등부터 의문시하고 이것들이 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존재하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자본론>의 요지다.
<자본론>에는 '착시현상'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자본론>의 핵심을 담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매개하는 상품 가격이나 이윤지향 생산이 '자연화'되는 상황이 경제학자들이 어떤 오류를 저질러서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속에서 그 구성원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실천들에 연동되어 생겨난 관념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진에 담긴 풍경이 착시현상으로 인해 두 가지 모습으로 보인다고 할 때 관찰자의 눈에는 '실제로' 두 모습이 보인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기업체)을 소유하고 노동자들이 임금노동을 하고 개별 작업장들이 대량생산한 상품들이 시장에 모여 그 가치를 평가받는 사회구조,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가격/이윤/생산자/소비자 등은 '실제로' 자연적인 현상인 듯 '보인다'. 하지만 착시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사진 속 풍경의 '본질'은 아니듯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만 나타나는 경제현상 역시 인간사회의 '본질'은 아니다. 이 점을 규명하기 위해 <자본론>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상품물신, 화폐물신 등을 상세하게 논한 것이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다른 요소들이 작용하는데도 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는 것은 착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