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6
3월14일[사순 제4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lrxevnDsic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회 윤흥민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의 좌절과 깊은 상처에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나를 위해서라면 당신 목숨까지 내어놓으실 하느님!>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실체요 근원이신 분, 사랑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신 분,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특강을 다니다가 때로 교우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신부님들을 만납니다. 교우들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하루 해가 짧습니다. 머릿 속에는 언제나 교우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 그것을 실현시키려니 몸은 또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한갓 인간인 사제들도 이렇게 사랑이 많으신데, 사랑의 본질이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사랑이 얼마나 더 뜨겁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활활 불타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이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좋은 풀밭으로 양떼를 데려가 살찌울까 고민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좌절과 깊은 상처에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나를 위해서라면 당신 목숨까지 내어놓으실 하느님, 언제나 용서하시고, 언제나 받아 들여주시는 속도 밸도 없는 바보 같은 하느님....
하느님께서 지니신 속성 가운데 가장 우세한 속성은 아무래도 한없는 너그러움이요, 세상 말랑말랑한 부드러움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찌 그리도 하느님의 속성과는 크게 대비가 되는지 씁쓸하고 서글픕니다. 하느님께서 총애하시고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보시고 크게 개탄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이 워낙 뻣뻣하고 마음이 완고하다 보니, 부드럽고 섬세한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목디스크로 뻣뻣해진 제 목도 크게 걱정이 됩니다.
아무튼 마음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 진정성이 배제된 그들의 예배에 하느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분노에 더디신 분, 우리의 죄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중재자 모세의 당부에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즉시 거두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31-47)
<(2)저리 고운 옥색 하늘이 열리는 날>
가끔씩 바닷가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도 잔잔하던 바다, 그래서 호수 같은 바다였는데, 순식간에 세찬 바람과 함께 높은 파도가 몰려옵니다.
먹구름과 함께 인자한 노인 같던 바다는 한 순간에 화가 잔뜩 난 난폭한 젊은이로 바뀌고 맙니다. 그런 바다, 갯바위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뺨에 와 닿은 바람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몸에 느껴지는 바람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히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느껴지지 않던 새로운 감정이 밀물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내 인생도 먹장구름이 활짝 걷히고 저리 고운 옥색하늘이 열릴 날이 반드시 다가 올 거야, 하는 충만한 희망이 다가왔습니다. 잠시지만 너무나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피정의 결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불투명하고 흐리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져올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경말씀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제 영혼에 내려와 하느님 말씀 한 자 한 자가 감사와 선물로 다가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 그분의 말씀은 제게 정녕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그때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꿀처럼 달 것이고, 생명수처럼 시원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제 인생을 환히 밝히는 등불이 되겠지요. 그때 제 삶은 보란 듯이, 그리고 말끔히 정돈되고,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드는 심각한 반성입니다. 그간 너무도 주변에서만 맴돌았구나. 원뿌리를 외면하고 가지만 붙들고 있었구나, 하는 후회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원전입니다. 성서 본문입니다. 원천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봉독은 뒷전인 채, 주석서다, 해설서다, 지침서에만 너무 매달렸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말씀, 성경 원전이 제 삶의 중심이 되길 바랍니다. 그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리 삶이 허황된가, 왜 이다지도 인생이 허전한가, 생각해봤더니 말씀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더군요.
매일의 말씀에 삶의 지침이 있음을, 그러기에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말씀에서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길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어디에 있든, 그 어떤 곤경 앞에 서 있든, 그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가 다가온다 해도, 흔들리지 않고 외로워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UQQNpFx3Uk
++++++++++++++++++
<내가 누구인지는 이것으로만 증명된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는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삶과 모험을 연대기로 기록한 논픽션 책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크리스토퍼는 워싱턴 D.C.의 부유한 교외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학생이자 운동선수지만, 그의 가족의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과 그들의 표면 관계 아래에서 긴장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생기게 된 아들입니다. 그는 실력으로 아들의 자격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원하는 대로 1990년 에모리 대학교까지 졸업한 후 맥캔들리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아버지에게 받은 24,000달러를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참 ‘자유’를 찾아 미국 횡단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의 목적지는 알래스카고 자연과 하나 되는 삶입니다. 그는 시간과 돈, 경쟁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이 가장 자유롭다고 여겼습니다.
여행 중 자유를 향한 그의 탐구와 자연 세계와의 강렬한 연결에 감동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우스다코타에서 곡물 엘리베이터 운영자를 위해 일했지만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떠나고, 자기 부모처럼 떠나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는 집시 아주머니도 만나고 또 만납니다. 그리고 자기를 양자로 삼고 싶어 하는 가족을 잃은 할아버지도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1992년 4월, 맥캔들리스는 알래스카에 도착해 버려진 버스(Fairbanks 버스 142번)에 캠프를 세웠습니다. 그는 땅에서 살아가고, 작은 사냥감을 사냥하고, 식용 식물을 찾고, 자기 생각과 경험을 일기에 기록하려고 시도합니다. 여름이 진행됨에 따라 식량이 고갈 되어 갑니다. 실수로 독초를 먹게 되어 몸이 약해지고 식량을 모을 수 없게 되면서 그의 상황은 더욱 악화합니다. 눈이 녹아 불어난 강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된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라는 글을 남기고 버스 안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의 사망 4개월 후였습니다.
사람은 꼭 일해야만 살수 있을까요? 맥캔들리스처럼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맥캔들리스는 꼭 일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세상을 등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아내는 자녀를 키워야 하며 자녀는 부모의 기대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맥캔들리스가 깨달은 것은 결국 일해야 행복이 실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일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유를 위해 일하였습니다. 결국 자연이라는 공간에 갇혀버렸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당신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성경 또한 당신이 하시게 될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에덴 동산의 가죽옷이 되기 위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집안을 구원할 어린 양이 되기 위해, 광야에서 불만에 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끝까지 갈 힘을 주기 위한 구리뱀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수난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심이 바로 성경에서도 증명하는 메시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은 외우다시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두 어린 딸을 잃고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막내아들은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계속 배를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아빠는 겨우 몸을 추슬러 물에 뜨는 작은 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배를 만드는 세 시간 동안 우울증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사제는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야 하고 의사는 치료를, 선생님은 가르쳐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정체성을 잃습니다. 반대로 일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결국 내가 하는 일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분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일이란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작은 배 하나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감정의 평화를 얻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양새는 말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시어머니가 더 때리도록 응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의 슬픔과 아픔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자 단식하는 자리에 찾아와서 피자와 콜라를 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들을 가지고 돈을 벌겠다고 한다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고 외쳤던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결백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군중의 소요가 귀찮아서 무죄하신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습니다. 염불보다 제사 밥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와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고 말았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려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웃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이웃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유족들을 위해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과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피지도 못하고 지고만, 꽃잎처럼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학생들을 위해서 노란 리본을 만들어 나누어 주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황님도 세월호의 유족을 만나서 위로해 주었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참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도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죄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는 이들이 있었기에 예수님 십자가의 길은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잘못하고, 하느님과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십니다. 비록 그들의 죄가 크기 때문에 벌을 하고, 심판을 하셔도 되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하느님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도록 청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때리는 시어머니 옆에서 더 때리라고 응원하는 시누이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합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는 사제를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
(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미사 경본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모님과 성요셉,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며 자비를 청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는 이들만의 신앙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천국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성인들의 전구로 죄 중에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은 희망을 버리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마치 별이 없는 밤하늘과 같다고 합니다. 연옥은 그릇된 희망을 품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우정을 배신한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황금으로 소를 만들어서 숭배했습니다. 그릇된 희망을 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연옥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유다는 별이 없는 밤하늘과 같은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 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바빌론이 지옥이 아니라, 희망이 사라진 현실이 지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희망을 걸었던 모세는 비록 광야에서 방황하였지만, 형 아론이 동족을 선동해서 황금 소를 만들어 경배하였지만, 지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희망에 응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탓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불신(不信)을 처절하게 반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은 이제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전과 땅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에서 말씀과 실천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함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단순히 생명 활동을 이어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가치와 의미의 문제이며, 구원은 존재의 변화를 뜻합니다.
구원은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순간을 살았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은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했어도 주어지는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구원은 유전적인 형질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정신, 의미,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생명의 활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따름으로 우리에게도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나의 기도가 죽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며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31-47: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모세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36절)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37절).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이 그분에 관한 아버지의 증언이다. 그분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아들이 행하는 일은 아버지의 증언이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같은 본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일들로 인해 그분을 증언하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39절). 그들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분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40절). 그들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신다(42절). 믿음 없이 단지 성경을 읽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의 열매는 거두지 못한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을 그들은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3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이다.”(45절)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 감히 모세가 기록해 놓은 그분을 거스르고 있다. 그들은 모세를 잘못 믿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소할 이는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이다. 그들이 모세를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에”(46절)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다 이루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에는 ‘증언’이라는 말이 열두 차례나 나옵니다. ‘증언’은 어떤 사건이나 사람, 사물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여 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여러 본보기를 차례로 이야기하고, 더불어 이 증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본보기를 열거합니다. 이 내용들은 우리 현실과 매우 비슷합니다. 특별한 설명 없이도, 문장 하나하나를 그대로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깊은 묵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듯합니다. “너희는 ……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다.”
특별히 ‘성경’에 대한 경고는 매우 노골적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을 연구하고 교의에 정통한 신학자라고 하여 모두 하느님과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연구하며 주로 만나는 것은 이론과 학설이지 하느님의 실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우리의 곤혹스러운 현실을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는” 우상 숭배로 고발합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치장과 기교, 위선과 과시로 “자기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면 모두 우상 숭배이며 죄입니다.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당신 자신을 걸고 …… 맹세하신” 하느님을 내 삶의 실제 주님으로 고백하며 이를 정직하고 충실하게 증언하는 것만이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시게 하는 진정한 구원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어린양(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9-34) 안드레아 사도는 그 증언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갔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되었고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2) 신자 중에도 안드레아 사도와 같은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라는 말씀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다.”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라는 말씀도,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그리스도)이신 분입니다. 이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이 뒤의 10장에도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아버지의 일들’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여기서는 “그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믿지 마라.”입니다. <가짜 메시아들은 자기들이 진짜 메시아라고 선전하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탐욕을 채우는 일만 합니다. 그자들은 믿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믿으면 안 됩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은, 뜻으로는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입니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라는 말씀은, “지금까지는 나를 믿지 못했더라도”라는 뜻입니다. “그 일들은 믿어라.”는 “이제는 그 일들을 통해서 나를 믿게 될 것이다.”, 또는 “나를 믿어야 한다.”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표현으로는 “아버지와 내가 완전한 하나라는 것”이고, 뜻으로는 “내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게 될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깨달아 알다.’는 인생의 완전한 변화를 뜻하는 말이고, 구원과 생명에 온전히 동참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증언으로 바꾸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고, 직접 체험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한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죽음, 부활, 승천’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으로(기쁜 소식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인데(마태 4,17)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에서는 ‘부활’로 무게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복음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강조점이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우리가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증언을 구원의 진리라고 믿는 것은, 그들의 ‘삶과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자신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온 삶으로’ 증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실천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원래 믿음이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 ‘온 삶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믿는 대로 사는 것’에 포함되는 중요한 일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이 말씀은 성경을 믿으면 당신을 믿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먼저 당신을 믿으면, 성경이 당신을 증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성경이 나중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되어 있는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사도 8,30-31)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사도 8,35) 믿는 사람들,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구원으로 인도해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지만,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그저 이상한 옛날이야기 책이 될 뿐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오늘은 부활 신앙의 영성적 국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연못에서 베푸신 중풍병자의 치유 기적 사건에 대해서
너무나 엉뚱하게도 예수님의 신원을 문제 삼는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의 황당한 소행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요한 5,37)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신 일들이 이해되지 못함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래 천 년도 넘게 신앙을 물려받은 그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역사상 처음으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해 주신 정통성에 걸맞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 시절에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목이 뻣뻣한 백성으로 살다가 호되게 야단과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 후 천 년이 흐른 뒤에도 이런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못해서, 바른 신앙 자세를 가르치며 회개하기를 요청했던 세례자 요한이 그들에게는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요한 5,35)일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역사적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교회는 부활 신앙에 걸맞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의식적인 행위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사람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합니다. 이로써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됩니다.
기도는 사람이 지닌 본능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께 향하려는 신앙에서 나오는 인간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기도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사람의 혼이 성장합니다. 이것이 영혼 생명의 성장과정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신앙을 성숙시킬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하게 되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뚜렷한 원의를 가지고 신앙이 자라남에 따라서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수련 행위입니다.
모든 민족에게서 발견되는 종교양식이 하느님께서 발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수용양식이듯이,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모든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살아있게 되는 부활의 목표를 위해 행해집니다.
부활을 목표로 하되 그 단계적 지향에 따라서 기도는 흠숭, 감사, 청원, 전구로 나뉘어집니다. 흠숭 기도는 찬미하고 찬양하는 기도로서,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에 대해 바치는 기도를 찬미 기도라 하고, 은총 이전에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바치는 기도를 찬양 기도라 합니다.
찬미와 찬양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기비허의 삶, 즉 자신을 낮추고 비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신 십자가의 삶이 으뜸가는 기준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흠숭 기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감사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성찬례는 그 자체가 감사의 기도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수난을 당하게 하신 후 부활시키시어 인류를 부활케 하시려는 구원계획에 대해 총체적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 다음에야 우리는 청원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원에 있어서도 선결 조건은 죄가 있으면 속죄를 하고 나서 청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가마에 던져진 다니엘도 자신의 곤경에서 구해달라는 청원을 하기에 앞서 동족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에 의해서 불가마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청원을 함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할 것과, 필요한 것들을 청하되 개별 지향 이전에 성령을 청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청원 기도의 공식인데, 많은 신자들이 이 공식을 지키지 않고 정성만으로 기도하면 될 줄로 여기다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주어지지 않으니 지쳐서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기도의 마지막 지향은 전구(轉求)입니다. 전구는 전달 기도의 준말로서, 청원 기도의 한 형태처럼 보이지만 자기의 청원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청원을 대신 청원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영적인 애덕을 발휘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모든 성인의 통공’이 이 전구 단계의 기도에서 실현됩니다.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부터 탁월한 전구자로 활약하셨습니다.(참조 요한 2,5) 이를 근거로 교회는 성모송에서 마리아의 전구를 필수적으로 청하는 기도를 바치도록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전구는 영적 나눔의 행위로서, 물적 나눔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랑을 실천하거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 활동으로 발전하여 공동선을 증진시킵니다.
교우 여러분!
이러한 기도의 지혜가 기도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하느님 모습도 보게 하여 부활 신앙을 살아있게 합니다.
=====================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어제 복음(요한 5,17-30 참조)에 이어서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변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증언하실 때 그 증언이 유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고, 당신의 정체를 확증할 수 있는 증언들을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5,33-35 참조). 그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1,6)으로, 장차 오실 분에 대하여 증언하였습니다.(1,19-34; 3,27-30 참조)
두 번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5,36 참조). 이 일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어 행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입니다.(5,37 참조) 그분께서 직접 당신 아들을 위하여 증언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증언입니다.(5,39 참조) 성경은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에 관한 다양한 증언을 알려 주셨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원천이시고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5,40.43 참조)
유다인들의 이러한 배척은 불신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안에 하느님 말씀이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다고 지적하십니다.(5,38.42 참조)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나누는 영광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5,44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분을 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완고하여 우리 자신만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며,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을 받아들이고 구원자로 고백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5,36.45)
흔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는 표현이 있는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5,42) 고 질책하십니다. 사람과 사랑의 관계도 그렇지만, 하느님과의 사랑에 있어서 사랑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인가 봅니다. 사랑이 떠나가면 목이 뻣뻣해지듯 마음도 멀어지고 굳어지며, 사랑도 한낱 그림자로밖에 남지 않겠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마도 사랑의 관계인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라고 할 수 있는 마음 준비입니다. 가장 우선한 마음 준비는 곧, ‘깨끗한 마음’이며 하느님으로만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고 ‘갈라지지 않는 마음’을 준비하였다면, 능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광야를 횡단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내 자신들을 질곡에서 이끌어 내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하느님의 길에서 그토록 빨리 벗어나 우상에게 절을 하고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탈32,8) 라고 거짓된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5,42) 고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
어쩜 모세가 그러했듯이 예수님 또한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 홀로 서서 자신을 파견하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애원하며 기도하셨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사람들 가운데 머물면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일을 충실히 수행하지만, 눈이 멀고 마음이 닫힌 그들은 오히려 더 격렬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했던 사람을 살리는 일마저 부정하고 거부하 는 그들의 닫힌 마음을 보시고서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내 자신을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한다.”(5,31)라고 언급하시고서,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5,32)고 증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요한의 증언은 물론 어떤 사람의 증언도 당신에겐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한사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으며,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5,36.37)고 밝히십니다. 아울러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증거는 바로,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며, 그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5,36)라고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일들인 곧 사람을 살리는 일,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닫히고 갈라진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더욱더 격렬하게 부정하고 거부합니다. 그들에게는 광야를 거치면서 목이 뻣뻣했던 자기 조상들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에’(5,42참조)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머무르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5,38)고 단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단정해서 말씀하신 근거란 바로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5,39) 는 말씀에 내포되어 있고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 파견의 근거와 사명의 목적이 하느님 아버지이시고. 그 모든 일의 진정성은 바로 자신이 하는, 사람을 살리는 일과 사람들에게 생명을 얻고 더 얻도록 하시는 일이다, 고 증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믿지 않으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5,45)고 그들에게 칼끝을 돌리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사 후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게 다가와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2004년에 신부님을 갑곶성지에서 처음 뵀었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으세요.”
이 말씀은 좋은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당연히 좋은 의도가 담긴 말씀으로 감사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20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외모가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뀌지 않았다면 어디 아프거나 문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생각이 바뀌지 않고 행동도 똑같다면 이 역시 커다란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야지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분의 말씀은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것이겠지만,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혹시 아무런 변화 없이 또 변화하려는 노력도 없이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더 나은 ‘나’가 되도록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결같은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변하는 우리가 될 때, 이것이 주님의 뜻에 더 다가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모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들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한결같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율법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의 기준에 따라 큰 죄인이 되고 말았지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없어지고 오히려 활자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단 한 명도 제외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욱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게 되고, 비로소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뜻에 더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요한 5,31-47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6)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따를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걸을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믿을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바랄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사랑할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참될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착할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고울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바를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나눌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섬길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살릴 따름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옛말에 “일을 만들면 일이 생기고, 일을 줄이면 일은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뇌까리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본연의 일에 바쁜 것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들에 쫓기면서 일을 줄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만든다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고 싶은 일도 좋지만,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슨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것은 좋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분주하게 나서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에 쉽게 지치고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된 일을 한 셈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성경은 죽은 글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 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성경 공부를 하고 교리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릇된 신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도권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드러내는 일이 되길 희망합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열심히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영적 승리의 삶-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사세요!”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 105,3-4)
"어디로 가야 할 길 내게 알려주소서, 내 영혼 당신을 향하여 있나이다."(시편 143,8ㄴ)
올해 3월의 성 요셉 성월이, 사순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4월10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을 앞두고 신자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정말 깨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어느때 보다 항구히, 간절히 깨어 기도해야, 회개해야,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나라도 삽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상하면 저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가톨릭 기도서> 1.성호경, 2.주님의 기도, 3.성모송, 4.영광송 순서대로 기도를 바친 후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 나로 살기 위해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사랑을 담아 양팔을 활짝 펴들고 만세육창의 간절한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어제 “하”씨 성(性)의 이름을 지닌 분과 나눈 기발한 덕담에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도 하닮(하느님 닮기)의 여정을 살 수 있길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하느님과 같은 ‘하’씨 성이라 하닮의 여정을 충실히 살아내고 계시지요! 축하드립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영적 승리의 삶을 사세요!”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의 말처럼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불림 받은 유일무이한 성소자들입니다. 불림 받은 자로서 과연 몇%,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를 실현하며 살고 있는지요? 모세나 예수님은 제가 볼 때 100% 참나를 실현한 성소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모세의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모습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양상은 다소 달라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 모세는 역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새로운 중재자이자 우리의 영원한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때 두분께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대로 오늘날도 반복되는 인간들 모습입니다.
정말 계속되는 전쟁에, 악순환의 반복에, 눈먼 자본주의 문명의 야만시대(?)에 과연 무지한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인간성의 진보가, 영성이 바탕되지 않은 인공지능의 결과는 어떠할지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다산 어른과 논어의 공자의 말씀이 감로수처럼 삶의 지표가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가장 어른스러운 태도는, 사람에 대해 미리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다산.
‘그런데도’ 사람이 희망이기에 사람에 절망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이 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남이 나를 속일까,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지 마라. 다만 먼저 깨달아 아는 사람이 현명하다.”-논어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깨달음은 빛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서서히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만일 제1독서 탈출기에서 중재자 주인공 모세가 빠져 버린다면, 역시 요한복음에서 중재자 예수님이 빠져 버린다면 상황은 캄캄한 어둠일 것입니다. 두분의 찬연한 빛이 무지와 허무의 심연의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는 현실입니다. 정말 탈출기의 모세는 참사람의 원형이요 섬김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을 100% 발휘하는 모세의 삶이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무지한 백성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같은 처지로 참으로 진퇴양난의 위기입니다.
답은 위의 하늘 향한 기도뿐입니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배은망덕의 무지한 못난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한 모세의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와 기도가 결국 하느님을 움직여 심판을 멈추도록 합니다. 참으로 목숨을 걸고 하느님과 담판하는, 애원의 기도를 바치는 모세입니다. 백성들의 배은망덕에 진노한 하느님을 만류하는 모세의 애원이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고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하느님 답지 못하다’며 하느님의 약점을 들먹이는 이런 목숨을 건 애원의 기도가 가능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둘도 없는 파트너 모세처럼 기도하는 부모가, 지도자가, 어른이 교회뿐 아니라 각계 각층에 참으로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킨 마지막 애원이 절정입니다.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정확한 사실(facts)에 근거한 모세의 설득에 감동한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던 재앙을 거두니 하느님과 영적전쟁에 승리한 ‘기도의 사람’ 모세입니다. 새삼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영적 승리를 위해서는 모세처럼 성서의 하느님 말씀에 정통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다음은 요한복음에서는 유다인들에게 사면초가의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위한 증언을 명명백백하게 밝힘으로 이들과의 영적전쟁에 승리합니다. 1.세례자 요한이, 2.아버지께서 완수하라 맡기신 일들이, 3.아버지께서. 4.성경이 예수님 당신을 증언함을 밝히시며 이들의 부족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며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과연 무엇이, 누구가 오늘의 우리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인가 묵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우리를 증언해 줄 것이며 이웃도 우리를 증언해 줄것입니다. 만세육창을 바치는 저로 말하면 하느님이, 예수님이, 나라가, 교회가, 성모님이, 수도원 공동체 형제들이, 또 매일 삶을 담아낸 강론들이 저를 증언해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음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흡사 우리를 향한 충고 같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이들의 성서말씀 공부 부족과 믿음 부족을 맹렬히 꾸짖는 예수님입니다. 기도의 싸움에서 하느님을 이겨낸 영적 승리의 모세요, 유다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 예수님의 영적 승리로 대미를 장식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고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로, 하느님의 지혜와 힘으로 무장했을 때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구원을 가지시고, 저를 찾아 주소서.”(시편106.4)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우선 순위>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 많다고, 곧 성경도 증언하고, 모세도 증언하고, 요한도 증언하고, 아버지께서도 증언하시고, 당신이 하신 일들도 증언한다고 하시며, 그런데 그 많은 증언을 듣고서도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고 한탄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들의 잘못과 죄상을 나열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면서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말씀이 자기들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성경이 증언하는 당신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저는 그중에서도 다음 말씀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면 200주년 성서와 영어 성서를 보면 이 말씀이 조금 다르게 번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
그러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풀어서 번역한 것 같은데, 제 생각에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실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을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없고,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관련하여 저의 죄를 성찰할 때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죄보다 제가 하느님 사랑을 잘 받지 못하는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내가 나의 사랑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주실 때 그 사랑을 내가 잘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강박관념은 제가 보기에 우리의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는 것이 엄마를 기쁘게 하고 엄마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어린아이가 나도 이제 사랑에 있어서 어른이니 엄마의 사랑을 받지 않고 내가 할 거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진정 엄마를 기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실 사랑은 잘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랑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의 우리가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는 것이 우선이 되고, 그래서 사랑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요한5,36)
<구원의 중재자!>
오늘 복음(요한5,31-47)은 '구원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의해 세상으로 파견되어지신 '구원의 중재자'이십니다. 예수님을 세상으로 파견하신 '하느님께서' 이를 증언하시고, '예수님께 맡겨진 하느님의 일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고,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바로 예수님이 구원의 중재자시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 하느님의 일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 성경의 지향점이신 예수님! 이 예수님이 바로 모두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이 되신 '구원의 중재자'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탈출 32,7-14)는 '또 하나의 중재자인 모세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주님께서 큰 분노를 드러내시면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탈출 32,9)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애원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탈출 32,11.12)
주님께서는 모세의 이 중재기도를 들으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십니다.
종종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나, 구원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내가,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세와 같은 누군가의 간절한 중재기도 때문이 아닐까요?
너를 살리는 '구원의 중재자', 너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중재기도'가 되어봅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1bxWvAgB94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 42)
봄날의
사랑이
이어집니다.
사랑은
행복을 비추는
참빛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으시는
근원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이외에
어떤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한
탓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참된
기본입니다.
사랑을
마음속에
심어주신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지켜나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사랑을
기쁘게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와같이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생각한 것을
기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마저도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여행자는
사랑의
순례자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실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학습의
장(場)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루어내는
사랑의
구원입니다.
희망은 참된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깨닫게 되는
생명의 사랑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