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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은 카잔차키스가 죽기 2년 전에 탈고한 책으로, 완성본은 아니었으나 그의 타계로 그대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그는 일생동안 끝없이 여행했고 방랑했다. 유럽의 수도원을 순례했고, 러시아의 혁명 현장을 목격했고, 중국과 아시아의 나라들을 탐색했다. 이 자서전은 그의 투쟁과 반항, 피흘림의 기록이며, 그가 일평생 여행한 나라들에서 깨달은 잠언들의 모음집이기도 하다. 일흔이 넘도록 계속되었던 내면의 투쟁, 그 피흘림의 기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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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명문장
작가노트
7 인간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지고 그의 골고타를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걸음 나아가다가 여로의 중간에서 숨을 몰아 쉬며 쓰러지기 때문에 골고타의 정상에, 그러니까 의무의 정상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다른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사형이 두려워 그들은 마음이 약해지고, 부활에로의 길이 십자가뿐임을 모른다. 다른 길은 없다
7-8 내가 오르는 길의 결정적인 단계는 넷이었고, 그 단계는 저마다 성스러운 이름을 지닌 인물들의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이제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니 나는 이 위대한 영혼들을 하나씩 거치는 피의 여로를 이 여행기에 남기려고 노력할 터이다. 내 영혼 전체는 외침이요. 내 모든 작품은 그 외침에 대한 설명이다. 내 생애에 항상 나를 괴롭히고 채찍질을 한 단어는 언제나 <오름>하나뿐이었다
9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이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담겨 주소서 주님이며,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프롤로그
1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12 정열적으로, 조용히 나는 크레타의 흙을 한 줌 꼭 쥔다. 나는 이 흙을 방황의 시절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벅찬 고뇌의 순간에는 손으로 그 흙을 꼭 쥐며, 마치 아주 다정한 친구의 손이라도 잡은 듯 힘을, 큰 힘을 얻었다.
13 나는 내 임무를 다했다. 잘 있거라 손을 내밀어 문을 열고 떠나기 위해 나는 이 땅의 빗장을 찾지만, 빛이 찬란한 문간에서 잠깐 동안 머뭇거린다. 세상의 돌멩이와 풀밭과 헤어지려니 내 눈과 귀와 마음은 어려움을, 무척 심한 어려움을 느낀다. 우리는 만족했으니 마음이 평화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의무를 완수했으므로 당장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은 저항한다. 돌멩이와 풀을 움켜잡으며 마음은 애원한다. <잠시만 더 머물게 하라!> 나는 마음을 설득하여, 서슴없이 <그러마)라고 양보하도록 타이른다. 우리들은 매를 맞고 눈물을 흘리는 노예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 마셔서 이제는 아쉬운 바가 없는 왕처럼 이 땀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도 가슴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소리 지른다 <잠시만 더 머물게 하라!>
18 머리카락이 백리향 뿌리로 뒤엉진 불굴의 조상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명령이 가득찬 꿋꿋한 외침이 시나이산 꼭대기에 남았으며, 대기는 떨렸다
"손에 닿지 않는 것을 잡아라"
나는 깜짝 놀라 잠이 깨었다. 어느새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가서 포도 넝쿨이 무겁게 얽힌 격자 울타리로 나아갔다. 이제 비는 멎었고., 돌멩이들은 반짝이며 웃었고, 나무 잎사귀들은 눈물을 묵직하게 머금었다.
"손에 닿지 않는 것을 잡아라!"
그것은 당신의 목소리였다. 이 세상에서는 만족할 줄 모르던 할아버지.
20 <실패한 곳으로 돌아가고, 성공한 곳은 떠나라>-크레타의 격언
조상들
21 나 자신을 굽어보고 나는 전율한다. 아버지 쪽의 내 조상들은 바다에서는 피에 굶주린 해적들이었고, 땅에서는 투사들이어서 신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어머니 쪽은 하루 종일 흙 위에 몸을 굽혀 씨 뿌리고, 태양과 비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추수를 하고, 저녁이면 집 앞 돌로 만든 긴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신께 희망을 걸었던 선량한 농민들이었다. 불과 흙, 이 두 가지 투쟁적인 조상을 내가 몸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가?
22 어느 날 밤 나는 친구와 함께 눈 덮인 높은 산을 걸었다. 우리들은 길을 잃고 어둠을 만났다.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 없고 침묵하는 보름달이 머리 위에 걸렸으며, 우리들이 길을 가던 산등성이로부터 저 아래 평원에 이르기까지 백설이 새파랗게 반짝였다. 침묵이 불안하게 굳어버려 참을 수가 없었다. 영겁에 걸쳐 달빛에 씻긴 밤들은 항상 이러했을 터여서, 신도 그런 침묵을 견디다 못해 흙을 집어 인간을 빚었다.
23 그건 내가 아니었어. 그건 내가 아니었어."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다른 사람이었어." 그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누구였을까? 내 뱃속이 그토록 깊고 계시적으로 노출된 적은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나는 마침내 여러 해 전부터 추측하던 바를 확신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의 몸 속에는 쉰 목소리들이, 굶주린 털 북숭이 짐승들이, 어둠이 겹겹이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원시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고난과,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의 모든 밤과 달은 우리들이 살아 있는 한 우리들과 함께 살고 배고파하며, 우리들과 함께 목말라하고 고통을 받으리라. 나는 창자 속에 담고 다니던 무거운 짐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렸다. 나는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가? 내 뱃속은 영원히 깨끗해질 수 없을 것인가?
26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목소리와 비밀스러운 내면의 목소리들을 혼합시킴으로써, 이성의 밑바닥에 깔린 원시의 암흑을 뚫고 닫힌 문을 열어서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속을 보게 된 순간부터 내 영혼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처럼 계속해서 굽이치지 않았고, 광채를 발산하는 중심둘레에서 어느 얼굴이, 내 영혼의 얼굴이 엉겨 짙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짐승으로부터 내가 피를 물려받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항상 변하는 길을 따라 왼쪽으로 그러고는 오른쪽으로 가는 대신, 나는 나의 참된 얼굴과 하나뿐인 의무를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 있게 나아갔으나, 그 의무란 가능한 한 모든 인내심과 사랑과 기술을 동원해서 이 얼굴로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일을 한다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얼굴을 불꽃으로 바꿔 놓고, 죽음이 오기 전에 시간이 있다면 이 불꽃을 빛으로 바꾸어서 카론이 나에게서 빼앗아 갈 것이 하나도 없게 함을 뜻했다. 죽음이 가져 갈 것이라고는 몇 개의 뼈 이외에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으려는 것이 내 가장 큰 야망이 었다
27 이 확실성에 이르도록 무엇보다도 더 나를 도와준 것은 아버지 쪽의 조상들이 태어나고 자란 땅의 흙이었다. 아버지 집안은 메갈로 카스트로(이라클리온)에서 2시간 거리인 바르바르라는 마을에서 비롯되었다. 비잔티움의 황제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10세기에 아랍인들로부터 크레타를 다시 빼앗은 다음 몇 개의 마을에서 학살로부터 생존한 아랍인들을 따로 한곳에 몰아 놓고 그 마을을 바르바르라 일컬었다. 아버지 쪽 조상들이 뿌리를 박은 곳은 그런 마을이었다. 그들은 모두 아랍인의 기질을 지녔다. 자부심이 강하고, 고집스럽고, 모질고, 검약하고, 비사교적이다. 분노와 사랑을 가슴속에 몇 년 동안이나 간직하면서 전혀 한마디 말도 없다가 갑자기 악마에게 씌우면 발작적인 감정을 터뜨린다. 그들에게 가장 숭고한 혜택은 삶이 아니라 정열이다. 그들은 선하지도 않고 다루기 쉽지도 않으며 그들이 곁에 있으면 참지 못할 만큼 압박감을 느낀다. 내면의 악마가 그들의 목을 조른다. 숨이 막히면 그들은 피를 흘리고 안도감을 찾기 위해 멍한 혼란 상태에서 스스로 팔뚝을 칼로 찌르거나 해적이 된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여인에게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그녀를 죽이기도 한다. 아니면 줏대가 없는 자손인 나 같은 사람은 어두운 짐을 영혼으로 바꿔 놓기 위해 땀흘려 일한다. 야만적인 조상들을 영혼으로 바꾸다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가장 숭고한 시련을 거치게 함으로써 그들을 말살시켜 버림을 뜻한다
30 어머니의 그리스인 피와 아버지의 아랍인 피가 내 혈관 속에서 나란히 두 줄로 흐른다는 착각의 영향은 긍정적인 보람을 주어서, 나에게 힘과 기쁨과 풍요함을 베풀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충동으로부터 종합을 이루려는 투쟁은 내 삶에 목적과 통일성을 부여했다. 내 마음 속의 애매한 예감이 확실성으로 변하는 순간 주변의 가시적 세계는 질서를 찾고, 나의 내적이거나 외적인 삶은 두 선조의 뿌리를 찾아 서로 조화를 이룬다.
아버지
31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었고, 웃거나 싸움에 끼어드는 적도 절대 없었다. 아버지는 이를 갈거나 주먹을 불끈 쥐기만 할 따름이었고, 마침 껍질이 단단한 아몬드를 쥐고 있었다면 그것은 부스러져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
36 어머니는 성자 같은 여인이었다. 50년 동안 곁에서 사자의 강렬한 숨결과 탄식을 느끼면서도 상심해서 괴로워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인가? 어머니는 대지의 다정함과, 끈기와 인내를 지녔다. 어머니 쪽의 조상은 모두 땅 위에 엎드리고, 흙에 달라붙고, 손과 발과 마음이 흙으로 가득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땅을 사랑했고, 모든 희망을 거기에 걸었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흙과 한덩어리가 되었다.
37 외할아버지는 항상 검은 장화를 신고, 짙은 쪽빛의 헐렁헐렁한 외출용 바지에 파란 얼룩무늬의 하얀 목도리를 둘렀다. 그리고 손에는 항상 똑같은 선물인 솥에다 구워 레몬 잎사귀로 싼 젖먹이 돼지를 들고 왔다. 웃으면서 외할아버지가 꾸러미를 벗기면 온 집안이 향기로 가득했다. 외할아버지는 구운 돼지와 레몬 잎사귀와 완전히 하나여서, 그때부터 구운 돼지고기 냄새를 맡거나 레몬 과수원에 들어서기만 하면 내 머릿속에는 항상 생전의 유쾌한 외할아버지가 구운 새끼 돼지를 손에 들고 들어서는 모습을 떠올랐다. 그리고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외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몸 속에서 외할아버지가 살아갈 터이기에 나는 기쁘다. 우리들은 함께 죽으리라. 내 속의 죽은 자가 죽지 않도록,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죽지 않기를 바라게 한 사람은 이 외할아버지였다. 그 후로 떠나가 버린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덤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혔으니, 내가 죽지 않는 한 그들도 계속해서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외할아버지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은 죽음의 정복이 가능하다는 의식으로 힘을 얻는다. 그토록 등잔불처럼 상냥하고 고요한 광채가 얼굴을 감싼 사람을 나는 평생 본 적이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소리를 질렀다. 헐렁혈렁한 바지에 넓고 빨간 허리띠를 두르고, 빛나는 둥근 얼굴에 유쾌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방금 축축한 풀 냄새를 풍기며 과수원에서 튀어나온 흙의 혼령이나 물의 요정 같았다.
38 [훌륭한 아내만 곁에 있다면 가난과 헐벗음은 아무것도 아냐.] 외할아버지가 가끔 말하곤 했다.
39~40 또 언제인가 나는 외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린 돼지를 잡아야 하거나, 우리들이 그걸 먹으면 기분이 언짢아지지 않나요?" "하느님께 맹세컨대, 난 정말 마음이 아프지" 외할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어린 것들이 너무나 맛이 좋아서 말이야!! 뺨이 발그레한 이 늙은 농부를 회상할 때마다 흙과 흙에서 하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나의 믿음은 더욱 깊어진다. 외할아버지는 세상이 떨어지지 않도록 어깨에 올려놓고 버티는 기둥들 가운데 하나였다.
42 어머니와 아카시아와 카나리아는 내 머릿속에서 영원히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한 덩어리가 되었다. 나는 아카시아의 냄새를 맡거나 카나리아의 소리를 듣기만 하면 어머니가 무덤에서 내 심장에서 솟아올라 그 향기와 카나리아의 노래와 한 덩어리로 합쳐지는 기분을 느낀다.(.) 내가 사랑하는 생각이나 사람들은 모두 떠나려고 머릿수건을 찾고 있음을 아는 까닭에 나는 고뇌를 느끼며 그들을 살펴본다.
43 창문과 문틈으로 비와 번갯불이 스며들었고, 바람은 오렌지와 흙 냄새를 풍겼다. (.. 집 밖에서는 신이 아직도 고함을 질렀다. 천둥이 더 심해졌고, 마을의 좁은 골목들 은 강이 되었으며, 돌멩이들이 마구 웃어 대면서 굴러 내렸다. 신은 격류가 되어 대지를 껴안고, 물을 주고, 비옥하게 했다.
44 창가로 가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나는 쏟아져 내려 흙을 파먹는 빗발을 응시했다.
46~47 작고 빨간 불빛들이 꺼졌고, 춤추는 여자와 그녀 머리 위에 떠오른 별들 이외에는 광활한 밤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꼼짝도 않으면서 그들 또한 춤을 추었다. 무리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갑자기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 여인은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춤을 추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게 아양을 떨며 함께 희롱하는 우리들의 영혼, 바로 그것이었다.
아들
50 대지와, 바다와, 여인과, 별이 가득한 하늘 (.) 나는 오늘날에도 이 네 가지를 육체와 영혼으로 깊이 탐닉한다. (.) 내 모든 감정은, 그리고 지극히 추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내 모든 사상은 이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로 이루어졌다. 내 머릿속에서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문제까지도 바다와, 불과, 인간의 땀 냄새가 나는 따스한 실체의 형태를 취한다. 개념이 나에게 이르려면 따뜻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 냄새 맡고, 보고, 만질 때 - 그때가 되어야 나는 이해한다.
52 내가 좋아하는 어느 비잔티움 신비주의자가 말했다. "현실은 바꿀 수가 없을 터이니 현실을 보는 눈을 바꾸자" 어렸을 때 나는 그랬고, 지금도 삶에서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에는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53 아이의 눈보다 더 신의 눈을 닮은 것은 없으니, 아이는 처음 세상을 볼 때 그의 세상을 창조한다.) 아이의 세계는 진흙으로 만들어 굳어 버린 것이 아니라, 구름으로 이루 어졌다.
55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우리들은 양말을 벗고 우리들은 양말을 벗고 누워서 발바닥을 서로 꼭 대었다. 우리들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나는 에미네의 따스함이 내 발바닥으로 전해지고, 다음에는 조금씩 조금씩 무릎과 배와 가슴으로 올라와 온몸을 가득 채우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경험한 기쁨은 어찌나 강했던지, 기절할 지경이었다. 평생 동안 그토록 엄청난 즐거움을 나에게 주었던 여자는 다시 없었으며, 여자의 몸이 지닌 따스함의 신비를 내가 그토록 깊이 느꼈던 적도 없었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눈을 감으면 에미네의 따스함이 발바닥으로부터 올라와 온몸에, 영혼 전체에 퍼지는 감촉을 느낀다.
54 글을 쓰다가 바다나 여인이나 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으면, 나는 가슴속을 들여다보며 내 속의 아이가 하는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그는 나에게 받아쓰라고 글을 불러 주는데, 어쩌다가 어휘를 사용해서 바다와, 여인과, 신의 위대한 힘을 비슷하게나마 묘사하는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 속에 살아 있는 아이의 덕분이다. 나는 티없는 눈으로 세계를 항상 새롭게 보기 위해서 또다시 아이가 된다.
초등학교
69 "조용히 하세요. 선생님" 그가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하셔야 새소리를 든지."
64 인간의 본성을 보다 잘 알게 되자, 나는 파테로포로스 (1학년 때 담임 선생)의 회초리를 찬양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짐승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오름길을 따라가려면 고통이 가장 위대한 길잡이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바로 그 회소리였다
76 "가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가난뱅이야.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아."
외할아버지의 죽음
79 아들 한 사람이 일어섰다. 그는 새까만 수염이 덥수룩했다.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는 석류를 가지고 나와서 아버지가 하데스로 가지고 가도록 손에 쥐어 주었다.
79 "젊은이들아, 잘 있거라."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내 몫의 빵을 다 먹었으니 이제는 가겠다. 나는 마당 가득히 자식과 손자들을 두었고, 항아리 가득히 기름과 꿀을 채웠으며, 술통은 포도주로 가득 채웠으나 아무 불평도 없구나. 잘들 있거라!
80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귀를 기울여 내 마지막 지시를 들어라. 얘들아 소와 양과 당나귀 - 짐승들을 잘 돌보거라. 짐승들도 인간이고, 우리들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가죽을 쓰고 말을 못 할 뿐이니까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마라, 그들도 옛날에는 인간들이었으니까 배불리 먹이거라. 그리고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잘 돌보아라. 열매를 얻고 싶은면 거름과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하느니라. 나무들도 옛날에는 인간이었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 줄 모르고 살아갈 뿐이란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을 하니 그래서 인간이 아니겠느냐.
81 죽음이란 함상 나를 유혹하는 이상한 신비였다.
크레타와 터키
83 학교와 선생들보다 훨신 더, 세상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기쁨과 두려움보다도 더 깊이 내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준 것은 정말로 독특한 면에서 내 마음을 움직였던 크레타와 터키 사이의 투쟁이었다
84~85 연약한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은 열망과 증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싸움을 벌일 각오가 선 나는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맞선 양편에서 어느 쪽을 택해 야 하며 내 의무가 무엇인지 잘 알았고, 할아버지와 어버지의 뒤를 이어 전쟁을 할 만큼 어서 자라고 싶었다. 이것이 씨앗이었다. 이 씨앗으로부터 내 삶의 나무가 싹트고, 움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내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공포나 고통이 아니었고, 쾌감이나 장난도 아니었으며,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 나는 자유를 찾아야 했지만,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인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나는 거칠고 쉴 곳 없는 자유의 오름길에 올랐다 우선 터키인들로부터 찾아야 하는 자유, 그것이 첫 단계였고, 그 다음에는 내면의 터키인인 교만과 악의와 시기로부터 공포와 게으름으로부터, 눈을 멀게 하는 헛된 사상으로부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과 흥모를 받는 대상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우상들로부터 자유를 찾으려는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 크레타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결정적 이 시기에 크레타인으로 태어났다는 우연을 통해서 나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세상에는 삶보다도 고귀하고, 행복보다도 감미로운 선인 자유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성인의 전설
89 나에게는 최초의 큰 욕망이 자유였다. 지금까지 머릿속에 남아 나를 괴롭히는 두번째 욕망은 성직에 대해서였다. 영웅성을 지닌 성인, 그것인 인류의 가장 숭고한 본보기이다. 어릴 적에도 나는 이 본보기를 담청색 하늘에 아로새였다.
92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다음에 나는 이런 비밀스러운 조작이 <창작>이라고 일컬어짐을 깨달았다.
도피하려는 열망
95 그 시절에는 세월이 느릿느릿 무료하게 흘러갔다. 사람들은 신문을 읽지 않았고 라디오와 전화와 영화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으며, 삶은 말없이 진지하게 띠엄띠엄 이어져 나갔다.
99 내 몸 속에서는 크레타의 피가 끓어올랐다. 크레타의 피를 확실히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나는 참된 인간이란 아무리 곤경에 처했어도 신의 앞에서까지도 저항하고, 투쟁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정을 내졌다
101 훨씬 더 나중에 세르반테스의 책을 읽었을 때, 주인공 돈키호테는 우리들의 초라한 일상생활을 초월해서 표면적인 사물들의 뒤에 숨은 본체를 찾으려고 남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길을 떠난 위대한 성인이요 순교자처럼 여겨졌다.(.) 지금까지 인간은 개인을 초월하는 목적을 위해 한 개인을 순종시키고 물질을 배척하는 길 이외에는, 자신을 향상시키 위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마음을 믿고 사랑한다면 헛될 일이 없으니 오직 용기와 믿음과 보람 있는 행동만이 존재한다..(..)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내 상상의 혼돈 위에 질서를 세우려고 했지만, 어릴 적에 아직 희미하게 말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이 본체가 항상 진리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고는 했다.
I02 아니 (목적) 달성이 아니다. 자신을 아끼는 영혼이라면 이 목표에 다다르자마자 곧 그것을 더 멀리 밀어 놓는다. 달성이 아니라 오름을 절대로 쉬지 않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삶에 숭고함과 단일성을 부여한다.
104 크레타에는 일종의 불꽃이 있는데, 삶이나 죽음보다도 더 강렬한 그것은 차라리 <영혼>이라고 불러야 하리라. 자존심과 집념과, 용기 이외에도 형언하거나 헤아릴 길 없는 무엇이 존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임을 기뻐하면서도 전율하게 만든다.
대학살
112 어제는 난장판을 벌이며 사람들을 마구 잡아 죽이다가도 오늘은 웃어 대는 것이 운명이다.
113 글을 쓰는 사람은 억압되고 불행한 숙명을 산다. 그것은 그가 맡은 일의 본질이 어휘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면 내적인 격렬한 흐름을 정체시켜야 함을 뜻한다. 모든 어휘는 위대한 폭발적인 힘을 내포하는 견고한 껍질이다. 그 의미를 찾아내려면 인간은 내면에서 폭탄처럼 그것이 터지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안에 같힌 영혼이 해방된다.
117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항상 나를 지켜 준 인내와 집념을 나는 아버지의 냉혹한 가르침에서 얻었다. 삶이 끝나 가는 지금 나를 다스리고, 신이나 악마에게서 위안을 받아들이는 몰락을 범하지 않도록 해주는 모든 불 굴의 사상도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얻었다.
낙소스
119 이곳(낙소스 섬)에서는 자유가 존재하므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오히려 존재하지 않았다. 삶은 때때로 몸추림치기는 하지만 폭풍우는 일으키지 않으면서 만족하고 졸리는 물처럼 끝없이 흘렀다. 낙소스를 돌아다니면서 섬의 첫 선물이 편안함임을 나는 의식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안정감은 권태가 되었다
119 나는 시골 저택의 책장에서 책더미를 발견했다. 책들은 낡아서 변색이 되었다. 나는 책들을 가져다가 날마다 올리브나무 밑에 않아 뒤적였다. (.) 내 마음은 넓어졌고, 그에 따라 세상도 넓어졌다. 내 상상의 세계는 거대한 나무들과, 이상한 짐승들과, 검거나 누런 사람들로 가득찼다. 내가 읽은 몇 구절의 글이 내 마음을 들끓게 했다. 빛이 바랜 어느 책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 었다. <가장 많은 바다와 가장 많은 대륙을 본 사람은 행복할지어다> 그리고 <집에서 기르는 소처럼 1년을 살기보다는 하루 동안이나마 들소가 되리라>는 구절도 눈에 띄었다.
122 "전 가톨릭 신부님들이 무서워요."내가 말했다. "나도 그래. 참된 인간은 두려워하지만, 그러면서도 두려움을 정복하지. 난 너를 믿는다." 아버지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이 한 말을 수정했다. "아니 난 너 를 믿는 것이 아니라, 네 핏줄 속에서 흐르는 크레타의 피를 믿겠어."
123 이웃에 사는 페넬로페 부인이 어느 날 어머니에게 말했다. "항상 구름만 쳐다보더군요." "걱정 말아요. 페넬로페." 어머니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살아가다 저 애가 눈을 떨구게 될 날이 올 테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그런 때는 오지 않았고, 성채로 오르면서 나는 구름을 보며 거듭거듭 감탄했다. 나는 자꾸만 고꾸라지고 미끄러졌다. 아버지는 나를 붙잡아 세우려는 듯 내 어깨 를 움겨쥐었다. "구름은 그만 쳐다봐. 떨어져 죽고 싶지 않으면 발 밑의 돌이나 살펴보라고."
125 무엇보다도 나는 시라는 방법을 통해 고통과 노력이 꿈으로 변형되기도 하며, 아무리 덧없는 고뇌라고 해도 시가 영원한 노래로 바꿔 놓기도 한다는 커다란 비밀을 이제야 의식하게 되었다. 이때가지만 해도 나는 공포와, 공포를 정복하려는 투쟁과, 자유에 대한 그리움 따위의 두 세 가지 원시적인 격정들의 지배만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름다움과 학문에 대한 갈망이라는 두 가지 새로운 정열이 마음속에서 불붙었다.(.) 전 세계를 크레타로 바꿔놓음으로써 나는 사춘기 초기에 모든 인류의 고뇌와 아픔을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127 나는 완전히 얼떨떨해졌다. 누구의 말이 옳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두 길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이 문제가 여러 해 동안 나를 괴롭혔고, 어느 길이 옳은지를 마침내 알게 되었을 때, 내 머리는 백발이었다.
해방
136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크레타 땅에 발을 디딘 날 나는 가슴이 벅찼다. 나는 몸과 두뇌와 영혼이라는 인간의 여러 다른 요소들이 뭉그러져 뒤엉키고, 끔찍한 피의 방황 이후에 인간성이 다시 신성한 원시의 단일성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모양이라고 느꼈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와 <너>와 <그>가 없고, 모두가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는 죽음의 신으로 하여금 낫을 버리고 사라지게 만드는 심오하고 신비한 도취감이다. 따로따로 보면 우리들은 하나씩 죽어가지만, 함께 모이면 불멸하다. 돌아온 탕자들처럼 굶주림과 갈증과 반란으로 그토록 시달린 다음, 우리들은 팔을 벌려 우리의 부모인 하늘과 대지를 껴안았다.
사춘기의 어려운 문제들
142 나는 젊은 시절의 흔한 어려움들에 시달리며 사춘기를 보냈다. 커다란 두 마리의 야수가 내 몸속에서 머리를 들었으니, 하나는 육체라는 표범이요, 또 하나는 인간의 내장을 파먹으며 먹으면 먹을수록 배고파하는 이 성이라는 독수리였다.
149 정말로 끔찍한 첫 번째 비밀은 우리들이 믿던 바와는 정반대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태양과 별이 총총한 하늘은 지구의 둘레를 얌전하게 맴돌지 않았다. 지구는 우주 공간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작고 하찮은 별에 지나지 않아서 노예처럼 태양의 주위를 돌았으니, 우리들의 어머니인 지구의 머리에서 왕관이 굴러 떨어졌다.
150 두 번째 상처는 인간은 신이 아끼는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153 <난 저 애가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 맞을 때에만 걱정을 합니다. 나머지 다른 일이라면 이제 다 컸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어야죠."
에이레 아가씨
167 리츠와 바이런의 시를 따라가며 그녀 위로 몸을 숙이며, 나는 그녀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후끈하고 시큼한 체취에 마음이 혼탁해졌으며, 키츠와 바이런은 사라지고, 한 사람은 바지를 입고, 또 한 사람은 치마를 걸친 초조한 두 동물만 자그마한 방안에 남았다.
172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무척 많은 즐거움을 느꼈던 나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파도 위에 뜬 크레타 성 전체의 풍경이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였다.
아테네
174 젊음은 눈멀고 사리를 분별치 못하는 야수이다. 젊음은 먹이를 탐하지만 먹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며, 발길에 채는 행복을 마음만 먹고 주우면 되는데도 줍지 않고, 샘터로 가서 시간이라는 물을 쓸데없이 흘러말라 버리게 그냥 내버려 둔다. 스스로 야수인 줄을 모르는 야수 - 그것이 젊음이다.
175 나는 계속해서 외국어를 배웠다. 내 이성이 젊어진다는 의식은 굉장히 기뻤지만, 항상 이상하고 미적지근한 젊음의 바람이 곧 불어오고, 모든 기쁨은 시들어 버렸다. 나는 여자와 배움 이상의 무엇을, 아름다움 이상의 어떤 선()을 열망했지만 -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176 나는 모든 젊은 여자에게서 신선한 얼굴을 지워 버리고 미래의 쪼글쪼글한 노파를 보았다. 꽃은 시들었고, 즐겁게 웃는 소녀의 입 뒤에서 나는 노출된 해골의 턱뼈를 의식했다.
176 어느 날 나는 새가 우는 소리를 들었고, 강철처럼 파란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자 지나가던 농부를 붙잡아 세웠다. "이봐요.저 건 무슨 새죠?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런 건 알아서 무얼 하려요?" 그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잡아먹지도 못하는 새인데."
177 한쪽에서는 호메로스의 말처럼 갈기가 하얀 파도들이 호메로스의 신선한 시처럼 시원하게 물결쳤고, 다른 쪽에서는 기름과 빛이 가득 찬 아테나의 올리브나무와 아폴론의 월계수와 모든 술과 노래의 기적을 일으키는 디오니소스의 포도가 펼쳐졌다
178 나는 젊은 여인의 얼굴 뒤에서 미래의 쪼글쪼글한 노파를 미리 찾아보려는 시도가 잘못이며, 오히려 노파의 얼굴에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소녀의 신선함과 젊음을 재창조하고 다시 이룩해야 된다고 믿었다.
180 나는 파르테논이 2나 4처럼 짝수라고 생각했다. 나는 짝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숫자들의 삶은 너무 편안하게 마련되어서, 위치가 너무 견고하고, 위치를 바꾸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만족하고, 보수적이고, 걱정이 없었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욕망을 실현하며, 차분해졌다. 내 마음의 맥동에 맞는 것은 홀수였다. 홀수의 삶은 전혀 편안하지 않다. 홀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것을 바꿔 보고, 보태고, 더 밀어 보려고 한다. 그것은 한쪽 발로 땅을 딛고 다른 발은 떼어 떠나려고 한다. 어디로 갈까? 잠깐 멈춰 숨을 돌리고 새로운 추진력을 얻기 위해 다음 짝수로 간다.
크레타로 돌아오다 - 크로소스
189 구슬프게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날 밤 나는 사랑과, 죽음과, 신이 하나이며 똑같다고 느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는 심연과 우리 마음속에서 그리고 혼돈의 심연 속에서 숨어 기다리는 무서운 삼위일체를 더욱 깊이 의식하게 되었다.
190~19 고뇌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고뇌라기보다 마음 한가운데 맺힌 응어리였고, 입맛은 독처럼 썼다. 마당 한가운데서 선 아카시아와, 열매가 묵직하게 달린 나무와, 수를 놓는 여동생과, 힘든 집안일의 멍에를 지고 소리 없이 드나드는 어머니를 창문으로 물끄러미 내다보려니까, 응어리가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나는 목이 졸리었다. 나는 천국에서 추방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추방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천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도망쳤고, 닫힌 문밖에서 내가 저지른 행동을 후회하며 풀이 죽어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뚜렷한 목적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그날 아침 아마도 그 렇게 함으로써 내 마음속의 고뇌가 문을 열고 빠져나갔는지도 모른다
191 나는 어휘들을 동원하고, 읽었던 시와, 성자들의 전기와, 소설들을 되내뿜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서 훔쳐 가며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맨 처음 종이에 다 적어 놓은 어휘들을 보고 나는 놀랐다. 나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살지 않았었다. 나는 그런 내용들을 쓰기를 거부했었다. 어째서 그것을 썼을까?
193~194 인간은 저마다 맞서 싸울 적의 정체를 결정짓는다. 비록 그것이 파멸을 뜻할지언정, 나는 신과 싸우게 되어서 기뻤다. 그는 흙을 빚어 세상을 창조했고, 나는 어휘를 빚는다. 신은 지금처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인간을 만들었고, 나는 꿈을 이루는 공기와 상상력으로 시간의 횡포에 항거하는 인간을, 보다 영적인 인간을 빚어내리라, 신의 인간은 죽지만, 내가 창조한 인간은 살리라! 이토록 악마적인 나의 교만함을 돌이켜보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때 나는 젊었고, 젊다함은 세상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다 훨씬 훌륭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뻔뻔스러움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195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팔에 낀 바구니를 덮은 잎사귀 두세 개를 들추더니 노부인은 무화과 두 개를 꺼내 나한테 주었다. "저를 아세요, 할머니?" 내가 물었다. 노부인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단다. 얘야. 모르는 사람한테 뭘 주면 안 된단 말이냐? 너는 인간이지? 나도 그래.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아?"
205 춤은 자아를 제거하고, 일단 자아가 제거되면 신을 만나지 못하게 막는 모든 장애물이 없어지기 때문이죠.
그리스 순례
208 평생 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 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 - 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 굶주린 듯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 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는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 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침내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고운체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 이런 마음의 연금술은 모든 사람이 누릴 자격이 있는 위대한 기쁨이라고 나는 믿었다.
210 그리스의 여러 지역은 두 가지 본질을 지녔고, 거기에서 파생하는 감정도 두 가지 본질을 나타낸다. 가혹함과 부드러움은 나란히 서서 성교를 하는 남자와 여자처럼 서로 돕는다. 그런 부드러움과 가혹함의 원천으로는 스파르타가 있다. 앞에는 절벽투성이인 딱딱하고 교만한 타이게토스가 버티고 섰으며, 사랑에 빠져 발 밑에 길게 누운 여자처럼 저 아래에는 열매가 풍성하고 유혹적인 평원이 펼쳐진다. 그리스의 시나이 산인 타이케도스에서는 민족의 무자비한 신이 지극히 준 엄한 계명을 내린다. 삶은 전쟁이고 세상은 싸움터이니, 네 임무는 오직 승리뿐이니라. 잠을 자거나 몸치장을 하거나, 웃거나, 떠들지 마라. 네 삶의 목적은 투쟁뿐일지니 싸우라! 그런가 하면 타이게토스의 발치에는 헬레네가 있다. 네가 야만스러워져서 대지의 부드러움을 꾸잦으려 하면 , 갑자기 꽃이 만발한 레몬나무처럼 헬레네의 숨결에 네 마음이 비틀거린다.
224 삶이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약간의 여유를 누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문명은 태어난다
236 하나의 순환이 끝났다. 내 눈은 그리스로 가득찼다. 석 달 동안에 내 이성이 무르익은 듯싶었다. 지성적 투쟁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전리품은 무엇이었나? 내 생각에 그것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명을 휠씬 분명하게 파악했고, 그리스의 숭고한 업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달았으며, 그리스의 비극적인 운명과 모든 그리스인이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음을 보다 깊이 의식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238 수도원장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내가 선생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내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그 에게 대답했다. "난 저 애가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을 때에만 걱정을 합니다. 그 두 가지 경우에만 말예요.다른 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어야죠!! 아버지의 말을 나는 깊이 새겼고, 이 말을 듣 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으리라고 믿는다. 아들을 키우면서 아버지는 갓 태어난 새끼를 키우는 늑대의 어둡고 빈틈 없는 어떤 본능에 따른 듯싶다.
239 나에게는 부족한 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몸과 마음과 영혼, 이 세 가지 광포한 야수는 다 같이 환희를 느꼈고, 다 같이 만족했으며, 그들의 굶주림은 다 같이 사라졌다. 영혼과의 신혼여행 기간 동안 줄곧 평생 처음으로 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인간은 늙거나 병들거나 불운이 닥칠 때만 그런 요소들이 내면에서 서로 분열하고 맞서 싸운다. 때로는 육체가 지배하고 싶어하며, 때로는 영혼이 반란의 깃발을 올리고 도망치려한다. 그리고 이성은 무감각하게 물러서서 붕괴의 과정을 지켜보고 점검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리고 튼튼할 때는 그 세가지가 같은 젖을 빨면서 세 쌍둥이처럼 우애로 단결되지 않던가!
240 나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분주히 돌아 다녔다. 그림과 조각품과 성장과 궁정들. 얼마나 엄청난 탐욕과 갈망이었던가! 내 굶주림과 갈증은 풀어질 줄 몰랐다. 사랑스러운 산들바람이 내 이마를 자꾸만 스쳤다. 여인 이나, 사상이나, 신과의 접촉에서 나는 평생 그런 기쁨을 다시는 맛보지 못했다. 아직은 추상적인 고민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나는 보고, 듣고, 만지는 쾌감을 발견했다. 내면의 세계는 바깥 세계와 하나가 되었다. 이 무렵 나에게 신을 창조하라고 했다면 나는 뺨에 솜털이 잔뜩 나고, 무릎이 꿋꿋하며, 가슴이 가날프고, 고대 코로스(건장한 청년을 조각한 그리스 미술품)처럼 세계를 어깨에 걸머졌으며, 사춘기의 몸을 지닌 신을 만들어 냈으리라.
241 모두가 어린애처럼 너무나 단순했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으며 삶의 사과 속에는 벌레가 들어 있지 않았다. 겉만 봐도 만족스러워서 나는 그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242 여자들은 남자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고, 그보다도 골칫거리나 그냥 필요한 존재일 따름이었다..(.) 나이가 50도 더 먹어서 결혼한 어떤 사람은 이런 핑계를 대었다. "글쎄, 별수 없잖아? 다른 사람들처럼 내 베개에도 곱슬 머리카락이 좀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
244 따스함처럼 행복감이 발에서부터 종아리로, 허벅지로, 가슴으로 번져 올라옴을 느꼈다. 나는 탐욕스럽게 솥에서 올라오는 김을 들이마셨다. 콩을 구워 음식을 마련하는 모양었는데, 향기가 그윽했다. 행복이 인간에게 어울리려면 어느 정도로 속되어야 하는지를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천국에서 그리고 마음속에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대상은 희귀한 새가 아니다. 행복은 자기 집 마당에서 발견되는 새이다.
250 "나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어서, 내가 행복감에 점점 길이 들어서 강렬함과 영광을 몽땅 상실하느냐, 아니면 그런 감정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전과 마찬가지로 항상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며 완전히 자아를 상실하느냐 하는 것이었죠. 난 언젠가 꿀에 빠져 죽은 벌을 보고는 교훈을 얻었어요."
나의 벗 시인 - 아토스 산
253 산과, 바다와, 도시와, 사람들 - 세계라는 육체로부터 영혼을 단절시키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영혼은 낙지이고, 이런 모든 것은 흡반이다. 이탈리아는 내 영혼을 차지했고, 내 영혼은 이탈리아를 차지했다. 우리들은 이제 한 덩어리로 이루어 서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힘도 인간의 영혼처럼 제국주의적이지는 못하다. 영혼은 점유하기도 하고 정유를 당하기도 하지만, 항상 제국이 너무 좁다고 느낀다. 답답해진 영혼은 자유롭게 숨 쉬기 위해 전 세계를 정복한다.
256 나는 내면의 함성을 쏟아 내어 자신이 터져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웅이나 성자가 될 능력이 없었던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무능함에 대한 위안을 조금이나마 얻으려고 시도했다.
257 나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웃어 대기만 하는 계집아이로구나, 나는 내 영혼에게 자주 말했다. 그래, 계집아이지, 한심한 영혼아, 너는 굶주렸지만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와 빵을 먹는 대신 하얀 종이를 꺼내어 <포 도주, 고기, 빵>이라는 단어들을 써 넣고는 그 종이를 먹는다.
259 자네는 구원의 길을 찾았다고 믿으며, 그렇게 믿음으로써 자넨 구원을 받는데, 나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지.
270 "어느 날 그(후궁에 아내를 365이나 거느린 위대한 왕)가 수도원에 가서 고행자를 만났죠. 그는 불쌍하다는 듯 고행자를 쳐다 보았어요.<정말 굉장한 희생을 치르시는 군요.>그가 말했죠.<당신의 희생이 더 커요>라고 행자가 대답했어요. <어째서요?> <나는 덧없 는 삶을 버렸는데, 당신은 영원한 삶을 버렸으니까요.>
278 대수도원장들을 생각하면, 황제여 나는 미칠 지경으로 분노하오. 고급 생선은 저희들끼리만 배불리 먹고 나한테는 말라빠진 다랑어만 준다오. 그들은 녹초가 될 때까지 키요스 포도주를 퍼마시고,
내 불쌍한 뱃속은 식초로 부글거리오.
288 수사가 한숨을 지었다. 아뇨, 난 그럴 덕망을 전혀 쌓지 못했어요. 우리 몸의 눈만으로는 부족한가 봐요. 영혼의 눈도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내 영혼은 근시랍니다.
295 농담을 하자는 건가요? 그들이 말을 타고 수도원에서 돌아다니는 동안 줄곧 악마는 안에서 대수도원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죠. 대수도원장이 악마였으니까요!
300 수사들은 판토크라토르(천상에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 총회, 모든 것의 통치자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를 가리켰다. "저 글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서로 사랑하라> 그 말을 막대기에다 하면 꽃이 피지만 인간에게 하면 꽃이 피지 않아요. 우린 모두 지옥에 떨어질 운명입니다."
304 "오름의 길, 한 계단씩 올라가는 거야. 배부름에서 굶주림으로, 축인 목구멍에서 목마름으로, 기쁨에서 고통으로 신은 굶주림과, 목마름과, 고통의 정상에 앉았고, 악마는 안락한 삶의 정상에 않았어. 선택을 해야지!!
310 "그래, 좋다.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니 신을 보지 못하게 하라. 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환희를 느끼고, 내가 기독교인이며 수도원에서 보낸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끔 신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게 해다오."
315 나(이그나티우스 수사)는 그녀를 보내 주지 않고 새벽까지 붙잡아 두었어요. 그 기쁨, 정말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막힌 부활이었죠. 평생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살았지만, 그날 밤 부활했어요.
예루살렘
324 <너는 선하고 평화롭고 참아야 하며,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주어야 하며, 현세의 삶은 가치가 없으며, 참된 삶은 천국에서 찾아야 한다>고 성서가 가르쳤다. <너는 강해야 하며, 포도주와 여자와 전쟁을 사랑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죽이고 죽어야 하며, 이 땅의 삶을 사랑하고, 하데스의 왕이 되느니 살아서 노예가 되라>고 그리스의 할아버지인 호메로스가 말했다
338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겸양을 알아서 남들 앞에서는 옷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남게 되자마자 나는 속은로 소리쳤다. 가거라. 가거래
라!황야로! 그곳에서는 타오르는 바람처럼 신이 불어올지니, 나는 옷을 벗고 신으로 하여금 내 몸을 태우게 하리라!
"영혼이라는 이름의 부인이며, 떠나지 마오"신이 말했다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시나이까? " "나는 당신이 옷을 벗기 바라오, 영혼부인" 저한테서 어찌 그것을 바라시나이 까? 저는 부끄럽습니다." "영혼 부인, 우리들 사이는 아무리 얇은 베일일지언정 아무것도 가로막아서는 안되요. 그러니 부인, 당신은 옷을 벗어야 하오." "됐나이다. 저는 옷을 벗었습니다. 저를 가지세요."
346 해답을 찾아 나서면 안 되고, 그것이 당신을 찾아올 겁니다. 찾아올 테니 내 말을 듣고 마음을 편히 가져요. 언젠가 윗사람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어느 수사가 평생 동안 신을 추구했는데,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야 그는 줄곧 신이 그를 찾아 다녔음을 깨달았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