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山淸)의 목면시배유지(木綿始培遺址)*를 다녀왔다. 어릴 적에 목화 농사를 짓는 과정을 자주 넘겨다 봐왔다. 기성 제품이 없던 시절에 대가족의 의복과 솜이불 문제 해결을 위해 불가피한 적응이었지 싶다. 그런 환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농사를 지어 거둬들인 목화의 씨를 빼고 활로 타서 솜을 만들거나 물레로 실을 뽑아 베를 짜는 과정을 지켜봤던 터라서 눈에 익었다. 하지만 뇌리에 하찮은 존재로 각인 되었을 뿐 애착을 갖거나 가까워질 계기가 없어 점점 가물가물 해지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목화를 다시 돌아보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니 축복이지 싶다.
목화씨를 파종하기 전에 반드시 물이나 오줌을 뿌려 축축해진 재(灰)에 며칠 묻어 두었다. 하도 이상해 물어봤더니 그리해야 싹이 잘 튼다고 했다. 당시는 몰랐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그를 증명해줬다. ‘목화씨를 곧바로 파종하면 씨껍질을 둘러 사고 있는 단단한 지방 성분 때문에 발아(發芽)되지 않는다. 그렇게 씨앗을 재에 묻어둠으로써 지방 성분을 녹여내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결코 과학적인 증명의 결과가 아니다. 다만 그 옛날 농민들은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구전(口傳) 되며 장구한 세월에 걸쳐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적인 제약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갔던 예를 보여주는 명징한 징표이다.
목화는 면화 • 목면 • 양화(涼花) • 초화(草花) 등으로 불린다. 이에는 여러 품종이 있으나 해도면(G. barbadense) • 육지면(G. hirsutum) • 인도면(G. arboreum) • 아시아면(G. herbaceum : 한국 • 이란 • 중국 • 일본)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산청군의 목면시배유지라는 자료에 따르면 목화의 생장 과정은 이렇다. 파종해 발아한 뒤 2주(週) 지나면 떡잎이 3~4개 나오고, 4주가 되면 가지가 생기며, 10주가 되면 개화(開花)가 시작되고, 18주가 되면 다래가 생기며, 23주가 되면 솜이 터진다고 한다.
사전에서 정의하는 면화의 종합이다. ‘아욱과의 한해살이 또는 목본성 작물로서 원줄기의 높이가 60~150cm 정도이며 잔털이 있고 곧게 자라면서 분지(分枝)가 된다. 잎은 어긋나고 가을에 흰색 혹은 누런색*의 오판화(五瓣花)*가 잎겨드랑이에서 핀다. 열매는 삭과(蒴果)*를 맺으며 씨는 검고 겉껍질 세포가 흰색의 털 모양 섬유로 변한다. 솜털을 모아 솜을 만들고 씨에서 기름을 짜 면실유(棉實油)라고 하여 식용유 • 샐러드유로 이용되며 참치 통조림(2000년대 초중반까지)을 채운 기름’이다.
목화가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의 옷감은 기껏해야 삼베나 모시를 비롯해 갈포(葛布)* 혹은 모피(毛皮)였다. 제대로 가공되지 않은 동물 가죽 즉 모피는 좀 나은 편이었지만 삼베나 모시로 만든 옷을 겹겹으로 입어도 엄동설한에 동사(凍死)하는 경우가 줄줄이 이어졌을 것이라는 예단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햇볕이나 겨우 가리던 움막이나 다름없던 집에서 여름용 삼베나 모시옷으로 겨울을 견뎌내며 기근(飢饉)에 허덕이다가 동사 혹은 아사(餓死)하는 경우가 오죽이나 많았을까.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온 백성이 차별 없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목화를 보급해 준 문익점 선생이야 말로 구세주나 다름없다. 따라서 오늘날에 비유한다면 메시아이며 구원자인 셈이다.
대략 오전 11시쯤 목면시배유지에 도착해 현지에 거주하며 시인이자 해설사인 L님의 해박한 해설을 한 시간 이상 들으며 공부했다. 기념관 쪽을 향한 대문을 들어서니 정면 너른 잔디밭 좌우에 선생을 기리기 위해 판박이 같은 비(碑) 둘이 쌍둥이처럼 서있었다. 비문의 내용만 달랐다. 좌측이 삼우당 유허비(三憂堂 遺墟碑)이고 우측이 면화시배사적비(綿花始培事蹟碑)였다. 길을 따라 왼쪽으로 다가가니 기념관이었다. 목화 파종에서 베를 짜는 과정까지의 모형 자료를 비롯해 우리 옷의 발달 과정과 일종의 노동요(勞動謠)인 물레노래나 베틀노래를 채집 전시하고 있었다.
해설사의 안내가 끝나고 전시관 왼쪽의 목화밭을 지나 가장 안쪽에 이르니 고려 우왕(禑王)이 문익점 선생을 기리기 위해 고향 동네에 내렸다는 孝子里(효자리)라고 새긴 효자비 위에 세운 효자비각(孝子碑閣),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 선생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부민후(富民后)에 봉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7간(間)의 집을 지어 부민각(富民閣)이라 했다. 이 부민각과 효자비각이 사이좋게 이웃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익점 선생은 엄청난 선구자이거나 바보다. 왜냐하면 중국 원(元)나라 사신(書狀官)으로 가서 신변 위험을 무릅쓰고 붓 대롱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왔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몰래 자기 밭에 가꿔 거둬들여 시장에 내다 팔아 떼돈을 벌어들이든지 아니면 씨앗(種子) 장사로 대박을 터뜨려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살려는 획책을 했으리라. 아니면 요즘 종묘(種苗)회사처럼 로열티(loyalty)를 받아 하루아침에 거부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아무 조건 없이 만백성 모두가 재배해 따스한 옷을 만들어 입거나 이불을 만들어 따스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천지개벽의 길을 터준 마음씀씀이가 어느 임금보다도 크고 넓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구자요 열린 사상가였지 싶다.
나는 음치 • 박치 • 몸치라서 노래와 담을 쌓고 산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목화하면 미국의 흑인 민요가수 하디 레드베터(Huddie Ledbetter)가 미국 남부 목화밭의 힘들었던 추억을 그리워하는 노래인 ‘우리가 조그만 갓 난 아이였던 무렵/ 엄마가 요람에 넣고 달래 주었지요.....’로 시작하는 목화밭(cotton fields)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 가수 중에 하사와 병장이 부른 목화밭으로 ‘우리가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가 서로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밤하늘에 별을 보며 사랑을 약속하던 너.....’가 떠오름은 어디에 연유하는지 당최 헷갈린다.
우리의 생활문화를 확 바꿨을 목화이다. 그렇다고 사랑을 속삭이거나 서정의 대상은 아닌 것 같다. 목화에 얽히고설킨 사연은 한과 시름이 압도적이지 싶다. 미국의 남부 목화밭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를 비롯해 그 옛날 우리의 젊은 여인네들이 그랬다. 가난과 모진 시집살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봉건시대 얼마나 많은 젊은 며느리들이 좌절했을까. 물레 앞에 앉아서 서러움과 한을 속으로 삭이면서 실을 뽑고, 긴긴 시간 베틀 위에 앉아 한 올 한 올 베를 짜며 필설(筆舌)로 형용키 어려운 심사를 곱씹었으리라. 그런 고뇌와 고된 노동의 아픔을 풀어냈기에 수심가(愁心歌)를 빼닮은 가락이 오늘날 구전 되는 물레노래이고 베틀노래일 게다. 한이 겹겹이 응축된 가락에서 무수한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토해내는 절절한 하소연의 환청(幻聽)이 들리는 것만 같다.
(한판암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