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총독 제러미 울프는 '플리머스 파'의 수장으로서, 존 화이트가 이끄는 '체서피크 파'와 경쟁하는 위치의 인물이었습니다. 체서피크 파가 체서피크 만 입구의 제임스타운과 로어노크를 근거지로 하는 것에 반해 플리머스 파는 구 에스파냐령 플로리다 식민지를 근거지로 하고 있었습니다. 체서피크 파가 주로 개척과 정착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 플리머스 파는 사략함대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무력을 동원해 원주민들로부터 개척지를 방어하는 것을 우선시했습니다.
이 두 파벌 사이의 경쟁은 그리 심각한 편이 아니었으며, 특히 버킹엄의 제임스의 중재로 인해 큰 문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 파벌 간 대립은 앵글로-포우하탄 전쟁을 계기로 서서히 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성공회 신부이자 선의(船醫)였던 제임스. 버킹엄 출신이었으므로 보통 '버킹엄의 제임스'라고 부른다. 아메리카 개척 초창기부터 세인트오거스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그의 아들인 제러미 버킹엄은 잉글랜드 해군에 들어가 아메리카 식민지 방위에서 활약하게 된다.
총독은 포우하탄 연맹과의 친분을 등에 업고 도그(Doeg) 부족의 거주지 인근에 새로운 개척지를 건설하자는 체서피크 파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제임스타운의 낙관적인 전망과는 정반대로 포우하탄 연맹이 이에 거세게 반발, 소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해 도그 부족이 초토화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한편으로, 식민정부의 수도가 세인트오거스틴에 만들어져 정치에서 소외될 것을 염려하는 버지니아 식민지를 달래기 위해 '과세-대표 원칙'을 재확인합니다. 식민정부에 '지사대리(중앙 식민정부에 지사 대신 참여하며 출신 지역의 이익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는 직책으로, 지방 선출직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상 중앙 관료에 가까웠다)'를 파견할 수 있는 지역에 한하여 과세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 말해 지사대리를 파견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개척지에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에, 처녀지 개척에 나선 이들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혜택이 되므로 결국 개척의 동기를 부여하는 원칙이었습니다.
1594년 4월, 포우하탄 연맹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래트클리프 선장이 살해된 것입니다.
이야기를 잠시 돌려 1593년, 제임스타운의 개척민들은 포우하탄 연맹과의 우호관계 확립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웨스트 선장은 상당량의 선물을 제공하면서 포우하탄 대추장을 잉글랜드 왕국의 봉신으로 삼기 위한 대관식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으라는 요청을 대추장이 거부했기 때문에, 꼿꼿이 선 상태에서 유럽인들 여럿이 낑낑대며 머리에 관을 씌워주어야 했습니다.
물론 그런 대추장이 개척민들의 바람처럼 잉글랜드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품을 리가 없었죠.
제임스타운 영역 너머에 요새와 정착지를 건설하려는 잉글랜드의 시도는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포우하탄과 잉글랜드 간의 우호관계는 거의 단절되었습니다. 존 화이트와 같이 식민개척을 주도한 원로들은 공공연히 유감을 표했지만, 정착지 확장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동의했습니다. 다시 말해 원주민들과의 충돌은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할 뿐이라는 것이지, 원주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개척을 포기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체서피크 파가 주장하던 '원주민들과의 공존'은, 결국 수월한 개척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었던 것입니다. 포우하탄 연맹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생활을 방해하는 백인들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한편, 세인트오거스틴에서 출항해 제임스타운을 방문한 래트클리프 선장은 선박 수리 문제로 거주민들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식량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포우하탄으로 향했습니다. 플리머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를 원주민들에게 보급받기 위함이었는데, 그의 접근을 제임스타운의 무력도발로 오해한 포우하탄 부족민들은 그와 선원들을 포로로 붙잡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트클리프 선장은 원주민들을 조롱하는 등 무례하고 오만한 언행을 반복했고,
결국 포우하탄 인들은 그를 불태워 죽입니다.
1594년 9월, 잉글랜드 정부는 래트클리프 선장의 죽음을 계기로 포우하탄 연맹을 정복할 것이라고 통보해왔습니다. 체서피크 파는 크게 반발하였으나 뜻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총독은 결국 이런 상황에 마주하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양다리를 걸칠 생각을 합니다. 제러미 울프는 버킹엄의 제임스를 직접 파견하여 포우하탄 연맹의 유타넌드(Youghtanund)와 교섭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교섭은 실패하고, 포우하탄의 전사들은 버지니아 식민지를 휩쓸기 시작합니다.
제임스타운 자체는 무사했으나, 제임스타운 근방에 위치한 다른 소규모 정착촌에서는 학살이 잇따랐습니다. 그동안 있어왔던 소규모 충돌로 누적된 적개심이 폭발한 것입니다. 학살을 면했더라도 농경지가 파괴되어 버려진 정착촌 역시 속출했습니다.
이듬해 5월, 버지니아가 전부 점령당하고 나서야 13척의 잉글랜드 해군이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식민정부는 포우하탄의 공격에 대해 큰 저항을 하지 않았고, 원하는 개척민들에 한해 플로리다로 향하는 피난선을 운용했을 뿐입니다. 그보다도 총독에게는 플로리다 반도 남단에 에스파냐 요새가 건설되고 있다는 소식이 더 큰 위협으로 보였습니다.
잉글랜드 해군이 도착하자 그것만으로도 전세는 크게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본국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라던 개척민들은, 잉글랜드 해군이 개척지의 선박을 통제하며 항구를 봉쇄하자 곧 극심한 물자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케이프피어 강의 하구에 상륙한 잉글랜드 군은 식수 보급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성지를 침범, 무력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유타넌드가 이끄는 포우하탄 전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잉글랜드 군을 기습하였으나, 소수의 기병들이 사전에 우회하여 역으로 기습하자 전멸을 면치 못했습니다.
잉글랜드 군은 중간의 개척지들을 건너뛰고 빠르게 진군하여 포우하탄 연맹의 근거지를 포위했습니다.
에스파냐 해군 선박이 북아메리카 해안선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목격되자, 식민정부는 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에스파냐가 북아메리카 일대에 다시 한 번 진출하리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총독은 세인트오거스틴에 한하여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지정함으로써 이베리아 문화의 색채를 지우려 애썼습니다.
1596년 1월 1일을 기해 앵글로-포우하탄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포우하탄 연맹의 여러 부족들은 잉글랜드의 속국이 되었으며, 버지니아 식민지의 영역은 급격히 넓어졌습니다.
1596년 11월,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정복전쟁이 시작됩니다. 아메리카 식민지와는 큰 관계 없는 사건이었지만, 본국에서의 전쟁 때문에 잉글랜드 해군이 대부분 철수한 틈을 타 에스파냐 개척민들이 호르단 강(Rio Jordan, 영어로는 샌티 강) 유역을 점거하고 개척에 나섭니다.
루카스 바스케스 데 아이욘. 카스티야 출신으로 산토도밍고의 부유한 설탕 농장주였다. 1526년, 600여 명의 개척민들을 실은 6척의 수송선을 이끌고 출항했다. 오늘날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조지타운 인근에 도착한 그들은 캐롤라이나~조지아에 이르는 해안을 탐험하고 산 미겔 데 괄다페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이는 리오그란데 이북에서 최초로 건설된 유럽인 정착지였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서배너 강 또는 알타마하 강 부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데 아이욘 본인의 죽음과 함께, 혹독한 겨울을 버티지 못해 식민 자체는 3개월만에 실패하였으나(히스파뇰라로 돌아온 생존자는 약 150명이었다), 탐험 과정에서 샌티 강을 발견하고 요르단 강에서 이름을 따 호르단 강이라고 명명하였다.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호르단 강을 중심으로 해안을 뒤덮기 시작하자 아메리카 식민정부는 다급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이단추방령'을 선포하여, 성공회 신자가 아닌 자에 한해서는 '과세-대표 원칙'에서 예외로 두었습니다. 요컨대 이단이더라도 지사대리를 파견하지 못하는 변경 지역에 거주한다면 과세하지 않으되(애초에 과세할 능력도 없었고 말이죠), 과세 대상 지역에 거주한다면 대표를 선출할 자격을 박탈함으로써 식민정부의 정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도들과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식민지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1599년 6월 17일,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전쟁이 종결됩니다. 잉글랜드는 로디언과 애버딘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정부는 나날이 가중되는 에스파냐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제임스 강 유역의 포우하탄으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새로운 수도는 포우하탄 언덕의 약간 서쪽에 제임스 강을 끼고 건설되었으며리치먼드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해당 지역에서 제임스 강을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이, 런던 부근의 리치먼드에서 템스 강을 바라본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를 정벌하기 시작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왕위계승권을 내세워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왕국의 건국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스코틀랜드 국왕을 칭하는 자가 두 명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정착하기 시작한 이주민들은 기존의 원로들과 달리 근시안적인 시각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식민지에 식량을 공급하는 대신 상품작물을 내다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식민지는 곡물 부족과 경제적 혼란에 직면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식민정부는 새 정착민들에게 농지의 일정 비율에서 반드시 식용 작물을 재배해야 한다는 법령을 내렸습니다.
제러미 울프는 에스파냐와의 식민개척 경쟁과 그에 따른 위기의식을 자극했고, 포우하탄 연맹과의 우호관계 수립에 실패한 책임을 버지니아 식민지의 체서피크 파에게 전가함으로써 정치적 우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체서피크 파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제러미 울프는 총독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리치먼드 건설 이전의 버지니아 식민지 지도. 지도의 오른쪽 방향이 북쪽이다. 체서피크 만 입구에 위치한 포우하탄 강이 영어로 제임스 강이 된다. 포우하탄 강을 따라 상류로 오르면 북안에 제임스타운이 보이고, 항해가 가능한 마지막 지점까지 더 올라가면 북안에 포우하탄이 보인다. 포우하탄은 포우하탄 강의 폭포선상에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한편, 포우하탄 강의 바로 북쪽에 있는 작은 강이 파문크 강인데, 오늘날의 파문키 강-매타포니 강-요크 강을 포함한다. 오늘날 요크 강에 해당하는 물줄기의 중간 정도 북안에 웨로워코모코를 찾을 수 있는데, 이곳이 포우하탄 연맹의 또 다른 수도이다. 연맹의 초기 수도였던 포우하탄에서 웨로워코모코로 수도를 옮겼다고 봐도 무방하나, 여전히 포우하탄의 상징성도 크게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플로리다를 차지한 시점에서 이미 13개를 넘어버렸죠... 몇 개 주라고 정해놓기보다는 아예 아메리카 식민지 전체를 총괄하는 중앙정부를 만드는 방향으로 설정을 짰습니다. 에스파냐의 부왕령과 비슷한 개념으로요.
미....구..아니 버지니아!
종주국의 국가변화에 맞춰 식민지도 변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