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J를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침울해졌고, 조금 화사한 옷을 입었고,
변함없이 어두운 눈빛에 두터운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온 감정을 다해 임재범의 '고해'를 부르고, 또 아주 익살스럽게 'Bohemian Rhapsody'를 불렀다. 나는 노래방에서 'Bohemian Rhapsody'를 끝까지 부르는 것은 그대밖에 없을 거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또 내가 제일 좋아하는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불렀다. 나는 그에게 정말 'Killing me softly with your song...'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겨진 수많은 감정들, 울림에서 느껴지는 슬픔들이 내 심장을 뛰게했다. 나는 노래부르는 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슬픈 사랑의 노래'와 '언젠가는'을 불러주었다. 그 앞에서 나의 목소리는 움츠러들었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불렀다.
귀갓길, 내 신발은 플랫폼에 멈춰서 전동차 안으로 들어가길 거부했다.
...
오늘 오후 네시, 나는 K를 만났다.
그의 담배는 바뀌어 있었고, 머리는 길었고, 수염도 많이 자라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어두운 눈빛에 두터운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시커먼 그림자는 조금 더 색깔이 짙어져 있었다. 수염이 잔뜩 자란 그를 나는 아기같다 생각했다. 그와의 이별은 왜인지 언제나처럼 몽롱하고 쓸쓸했다.
...
오후 일곱시, 나는 치킨과 떡볶이를 사들고 동방으로 올라갔다.
선배 넷과 동기 하나가 있었다. 우리는 맛있는 것들을 실컷 먹고는 내 mp3모음곡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선배는 내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고, 제목이 대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이 그림의 제목은 '爆夜'라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패러디해서 이라크전쟁을 그린거라고 대답했다. 선배는 나에게 좀 더 뭉크 같거나, 아니면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런 아방가드르틱하고 싸이키델릭한 것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나의 씨디를 쇼팽의 씨디로 바꿨다.
오후 열시, 선배와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저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많은, 글을 잘쓰는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철부지같이 순수했고, 나는 그의 불타는 가슴이, 열정이 매우 부러웠다.
오늘 그는 진지한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평소에 보던 모습과 달리 그의 진솔한 얘기들은 내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얘기들은 지금까지 그의 어리다고 생각되었던 행동들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었다. 택시비 이만이천원과 바꾼 맥주 두병의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마 우리 쪽을 유심히 바라보던 Molto의 알바와 사장이 달려와서 문을 닫는다고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새벽 세시가 되어도, 날이 밝아와도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는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아주 슬픈 이야기를 했다. 특히 그가 그녀의 이야기를 하다가 도중에 '라일락'이라는 담배에 관해 얘기했을 때 나는 오늘 내가 만난 K가 피우던 담배에 '라일락'이라고 써있었다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에게 나는 물었었다. '어? 담배가 바뀌었네? 맛있어?' -아니. 이게 좀 더 순하대.-
그 생각이 떠오르자 울컥 눈물이 치밀어올랐다. 거짓말쟁이라 생각했던 K의 말들이 진실이라고 생각되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선배가 내뱉은 그녀에 대한 말들과 K가 한 말들이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내 J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던 기억을 떠올리곤 괴로워했다.
나오는 길에 나는 선배와 담배 한 대 씩을 태웠다.
뜨듯한곳에 느긋이 퍼져있던 내 혈관이 담배로 인해 수축되면서 온 몸이 벌벌 떨리었다.
음주후 끽연시에 느끼는 그 루즈한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냉기탓에 기분이 나빴다.
12시. 나는 학교 정문앞에 서있던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방학동까지 가자는 나에게 말을 했다.
"아이구, 손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오늘 나온 후로 계속 기본요금 손님만 태웠지 뭐에요. 방금도 상도역까지 가자고 그러길래 미안하다고 그냥 서있겠다고 하고는 담배 한 대 태우고 있었어요."
나는 그 택시기사의 말에 울먹이던 가슴을 훔치고 빙긋 웃어주었다.
나는 새벽 이맘때쯤 택시를 타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가.
그가 혹시 무서운 강도로 돌변하여 택시를 끌고 교외로 끌고갈까 두려워 발톱을 세우고, 손톱으로 문고리를 움켜쥐고 집에 도착할때까지 숨막히는 시간을 두려움에 떨며 가야만 했나.
그에 비해 이 남자는 얼마나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의 생을 내멋대로 상상했다.
학교가 강남에 있다는 것은 매우 축복받은 일이다.
나는 강북에 살기에 어떻게 하건 하루에 두 번 한강을 지나야한다.
밤에 보는 한강은 늘 그렇듯 너무나도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은 택시를 타고 집을 가기위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위에는 빨갛고 노란 불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나는 문득 사람이 좋아져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문자들을 보냈다.
내가 고등학교 때 관심있었던 것은 정치도, 경제도 문학도 아니요.
그저 노장사상과 음악, 그리고 그림이었다.
노자와 장자, 그리고 불교의 말들. Rock. Escher. Darley...
역설의 극치인 제논의 정리와 도덕경이 내 사상의 전부였다.
인생은 찰나일 뿐이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짧은 찰나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기쁨을 겪느냐이다. 나는 그것을 모두 즐기리라 마음먹었고, 많은 일들이 생겨주기를 깊이 바랬다.
나는 그래서 세상에 아무 관심이 없었고, 특히 인간엔 아무 관심도, 집착도 없었다.
그저 내 몸을 둘러싼 테두리속의 나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심리학을 공부해보리라 다짐했다.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을 잃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 거기 있었냐는 식의 만남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다.
인간이란 얼마나 즐거운 것들인가. 나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들은 얼마나 순수한 존재들이며, 얼마나 중요한 존재들인가.
첫댓글 님글 보니...좋아요. 글 잘 쓰시네요. 부럽네요
나는 인천에 살기 때문에, 한강을 지나려면 강북으로 놀러가야하지... 나빠. 우리학교 강북으로 이사가라!! (그리고, 바이올렛. 보고싶어♡)
나도 학교갈때 올때 매일 한강 봐. 지하철 유리창에 철썩 붙어서. 아침에 볼때랑 저녁에 볼때랑 둘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