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업조합설립추진위원회 운영규정에서는 개략적인 사업시행계획서의 작성을 위해 필요한 경우 건축사사무소 등과 용역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건축사사무소 등과의 용역계약을 제외한 '설계자' 선정의 업무는 조합의 업무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 ‘건축사사무소’는 곧 ‘설계사무소’를 지칭한다.
지난해 8월 25일 추진위 운영규정이 개정 시행되면서 추진위 단계에서 설계업체를 선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면서 설계자 업무는 할 수 없도록 규정하는 모순이 발생한 것.
정비사업 관계자들은 개정 추진위 운영규정에서 신설된 제5조 4항 ‘시공자·철거업자·감정평가업자·설계자(제2항에 의한 건축사사무소 등과의 용역계약을 제외한다)의 선정 등 조합의 업무에 속하는 부분은 추진위원회의 업무범위에 포함되지 아니한다’는 조항을 지나친 규제로 해석하고 있다.
∥운영규정대로 ‘건축사사무소’ 선정
현행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르면 특별시장·광역시장 또는 시장은 ▲정비사업의 기본방향 ▲정비사업의 계획기간 ▲인구·건축물·토지이용·정비기반시설·지형 및 환경 등의 현황 ▲주거지 관리계획 등을 포함한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기본계획)을 10년 단위로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시장·군수는 기본계획에 적합한 범위 안에서 노후·불량건축물이 밀집하는 등의 요건에 해당하는 구역에 대해 ▲정비사업의 명칭 ▲정비구역 및 그 면적 ▲도시계획시설의 설치에 관한 계획 ▲공동이용시설 설치계획 ▲건축물의 주용도·건폐율·용적률·높이·층수 및 연면적에 관한 계획 ▲도시경관과 환경보전 및 재난방지에 관한 계획 ▲정비사업시행 예정시기 등이 포함된 정비계획을 수립해 시·도지사에게 정비구역지정을 신청해야 한다.
이처럼 기본계획 수립과 정비계획 수립 업무는 기본적으로 관의 업무이다. 현행 주거정비법에서는 민간에 의한 구역지정 제안 근거도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다르다.
관이 수립하는 기본계획은 말 그대로 기본계획이다. 특정 지역이 기본계획에 포함됐다 하더라도 노후도 등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기본계획에 포함됐다고 다 정비구역으로 지정돼 정비사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는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기본계획에 포함된 정비예정구역이 정비구역 지정을 받기 위해서는 직접 노후도 등을 조사해 관청에 제시하는 것이 관행이다.
이러한 관행은 기본계획에서 제외된 노후지역이 기본계획에 반영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점에서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 추진위 단계에서의 설계업무는 사실상 도시계획 엔지니어링업무가 주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진위 운영규정에서는 ‘건축사사무소 등과 용역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추진위들은 엔지니어링 성격의 업체를 선정하면서도 의례 설계업체인 ‘건축사사무소’를 선정한다.
또한 도시계획 업무에 설계업체의 지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일부 재개발사업 추진위의 경우 엔지니어링업체와 건축사사무소를 구분 선정하기도 한다. 이 경우 명확한 업무 구분의 목적 외에 설계업체와 도시계획업체가 제대로 된 용역비를 산정하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설계와 도시계획 업무를 일괄 수주할 경우 두 가지 업무에 대한 용역 평가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합 바뀌면 설계업체도 바꿔야?
개정된 추진위 운영규정에 따라 설계업체가 겪는 애로사항은 무엇보다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현재도 큰 변수가 없는 경우 추진위에서 선정한 설계업체가 조합에서도 총회를 거쳐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비대위가 조합이 되거나 기존 추진위가 아닌 제3의 세력이 조합을 구성했을 때는 설계업체 역시 교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조합장이 바뀌면 설계업체가 바뀐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이론적으로는 설계업체가 조합에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추진위 단계에서의 업무를 보상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부분 설계업체는 도시계획과 개략적인 사업시행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설계 용역까지 수행하기 위해 정비사업에 입찰한다.
업계에서는 추진위의 설계업체 선정 입찰에 ‘용역비 없는’ 입찰 제안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조합 단계에서의 본설계 용역을 염두에 둔 것일 수밖에 없다.
실상 도시계획업무는 설계업무에 비해 위험도 크다. 은평구 U구역은 6개월 정도 도시계획 업무 끝에 노후도가 부족하다는 판단에 따라 설계계약이 종료됐다.
추진위 단계는 자금력이 부족해 용역비가 체납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추진위 단계의 용역비 없는 입찰은 어차피 받지 못하는 용역비를 조합 설립 이후에 받겠다는 포석도 있을 수 있다.
또 추진위 단계에서 설계업무의 평가가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기존 설계계약은 추진위에서 조합까지의 전 과정에 대한 금액으로 체결해 왔다. 설계업체가 조합에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소송을 통해 추진위의 업무를 입증해야 한다. 이에 대해 법원은 입증자료에 의해 손해배상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용역업무에서 용역비와 증빙자료에 의한 금액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건축사사무소 대표를 맡고 있는 권 아무개 건축사는 “세금계산서 등으로 증빙할 수 있는 부분은 실투입비의 20%미만이다”면서 “인건비도 직접인건비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설계업체 변경으로 사업속도 못내
설계업체의 지위가 불안하면 1차적인 불이익은 설계업체 자신이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조합이 그 영향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업계에서는 추진위와 조합에서의 설계업무의 연속성 단절에 따른 비용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 편이다. 추진위에서 설계업무가 ‘개략적인 사업시행계획서의 작성’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진위 단계에서 향후 업무를 일정 부분 수행하면 조합 설립 이후 사업이 빨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조합설립후 사업시행인가까지의 업무들이 그것이다.
설계업체의 지위 불안은 비용보다는 사업추진속도에 영향을 미치고, 특히 설계업체 지위 불안이 집행부가 불안한 사업장에서 불거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이들 사업장은 이래저래 사업진척이 더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때로 설계업체 흔들기는 시공사에 의해 감행된다. 시공사의 조합 흔들기의 일환일 수도 있고, 유관업체를 밀어주는 차원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조합과 조합원의 손실은 더 크다. 시공사가 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설계가 시공비와 조합원 분담금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논란 속에서 향후 정비사업에서 시공사 설계겸업 허용이 거론되는 가운데, 이 경우 설계에 편리한 측면이 있는 반면 현재도 시공사에 비해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은 조합이 더 시공사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엄격하게 뽑고, 지위 인정해야
설계업체의 지위가 불안하다고 해서 설계업체에 완전 기득권을 보장할 수는 없다. 또 현행 규정이 비위 등을 견제하는 순기능이 있을 수도 있다.
설계업체들이 수주경쟁을 벌이다 보면 감당할 수 없는 현장에서조차 저가 입찰로 일단 수주하고 보자는 현상이 있고, 이 때문에 설계업체에 변경을 가져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추진위 단계 모든 설계업체의 연속성을 보장하지 않는 현행 규정은 치유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업계에서는 대신 ‘현격한 하자가 있는 경우’에 대해 재검증 과정을 거치자는 의견이다. 또한 설계업체의 입찰 과정에 시공사 선정 만큼의 엄격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D건축사사무소의 장 아무개 부장은 “설계업체 또한 시공사 못지 않게 중요한데도 서면결의만으로 선정이 가능해 비전문가, 영세사업자의 저가 수주가 가능한 현실이다”며 “설계업체 선정절차를 현행 운영규정 대신 법 또는 법령에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 저가 수주 등을 통해 설계업체가 내정되면 조합 또는 추진위는 해당 설계업체에 맞는 입찰조건을 공고함으로써 사실상 타 경쟁업체의 입찰을 배제하는 것도 관행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사업 규모별로 정형화된 입찰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상표 기자 2007-04-30 21:3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