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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것, 축복 중의 축복
□ 본문 : 사도행전 1장 8절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사도행전 1장 8절을 통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기에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증인은 ‘마르튀스’입니다. 그리고 ‘마르튀스’는 순교자입니다. ‘마르튀스’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마르튀스’ 순교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명은 생명을 다해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전하다 순교의 자리까지 갈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있다고 해도 극히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순교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교를 각오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끝에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성도의 최고의 영광이고 축복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한국어성경은 ‘오직’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을 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원어를 보면 ‘오직’이 ‘너희가 권능을 받고’를 수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너희가 권능을 받고’가 문장 맨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바로 권능을 받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권능’은 ‘뒤나미스’입니다. ‘뒤나미스’는 성령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성령과 능력은 함께 합니다. 성령님이 임하면 권능을 받습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성령 받은 제자들은 능력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주저합니까? 성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어려운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성격 때문에 전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다고 전도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하겠는데 전도만큼은 못하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핑계가 아니라 정말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모든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고, 전도만큼은 빠지고 싶습니까? 마귀의 공격입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게 ‘사탄은 우리가 누군가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는 한 모든 좋은 일들을 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마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지옥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로 죄의 결박을 끊으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천국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마귀에게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어떻게 그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도하지 못하도록 선교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 두주 전에 간증했던 것처럼 수요일 치바역 전도를 처음 시작할 때 한 달 넘게 수요일만 되면 몸이 아팠습니다. 서 있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수요예배를 인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예배도 힘든데 어떻게 전도를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막 치바역 전도를 시작했는데 성도님들만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간신히 전도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통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언제 아팠느냐 싶을 정도로 완전히 정상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 이것이 마귀의 방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전도를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달 보름 치열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아프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육적으로 공격할 뿐 아니라 전도에 대한 부담감을 줍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다 하겠는데 전도만큼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것은 더더욱 부담입니다. 이유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 비행기 못 탄다, 음식이 맞지 않는다. 잠자리 바뀌면 잠을 못 잔다. 물갈이 한다. 체력이 약하다. 핑계가 아닙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선교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땅 끝까지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순종할 때 나타납니다. 순종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이 모든 연약함을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정 권사님이 후에 간증하시겠지만 권사님도 단기선교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공황장애를 치유 받았습니다.
성령 받은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순종하면 전도와 선교를 방해하는 마귀가 떠나갑니다. 순종하면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순종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선교할 수 없는 영과 육의 모든 연약함이 떠나갑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2.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성령을 받았습니다.(행2:38)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습니까? 아멘입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이 역시 아멘입니다. 그러면 능력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아멘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령을 받으면 능력을 받았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왜 아멘이 되지 않습니까?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고친적도 없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이 다를 때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현실을 지배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이 되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모습이 다를 때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아무리 큰 죄라도, 아무리 부끄러운 죄라도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마귀가 참소합니다. 회개했다고 어떻게 그런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회개했지만 여전히 나는 더럽고, 그래서 더러운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정죄하고 점점 하나님을 피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의 참소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신,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능력을 받은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성령을 받았으니 능력 받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고친적도 없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적도 없는데요?’
그런 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향해 명령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자신이 아플 때나 가족이 아플 때는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나? 목사님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사인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병든 분들이 기도를 부탁할 때 부담이 되었습니다. 안 나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았기에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막상 병든 사람이 기도해 달라고 하면 그런 부담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저의 능력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고치는 것인데, 저의 이름으로 병자가 낫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낫는 것인데, 제가 할 일은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인데, 그러면 역사는 주님이 하시는데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못 걷데 된 이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자신들에게 몰려든 백성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으로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3:16)
지식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니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상황을 만나면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 받은 자는 능력 받았다는 말씀을 믿고 기도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니 강하고 담대하게 기도합니다.
포인트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모두 능력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믿음으로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병든 자를 고친 적이 없습니까?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귀신을 쫓아낸 적이 없습니까? 귀신 들린 자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능력을 주신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을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그 일을 통해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또 복음을 전하다 아픈 사람을 만나면 기도해 주십시오.
※ 제자훈련교재 ‘예수님의 사람’(유기성)에 보면 워싱턴에 있는 한인교회의 청년들이 멕시코에서 단기선교 했을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청년들이 어느 빈민 지역에 약품을 가지고 가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또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기도를 하는데 소경이 눈을 뜬 것입니다. 소경이 말입니다. 눈을 뜬 소경도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도 깜짝 놀랐지만, 제일 놀란 사람은 바로 기도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이 이게 진짜인가 아닌가 자꾸 만져봤답니다. 성경에서 소경이 눈을 뜨는 이야기를 읽어보았고, 어느 목사님이 기도해서 어느 선교사님이 기도해서 소경이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설마 자신이 기도할 때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이 표적을 통해 소경도,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이 청년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예수 이름의 능력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육신의 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들의 손을 잡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슬픈 마음, 상한 마음을 고쳐주십니다. 우울증도 고쳐주십니다.
마귀는 복음의 영광을 가립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전도대상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마음속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복음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방해가 사라집니다. 귀신들린 자를 만날 때 강하게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이 사람 안에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은 떠나가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마귀가 역사할 때 성령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내 안의 분노와 미움은 떠나가라! 내 안의 불평과 원망은 떠나가라! 근심과 두려움은 떠나가라! 악한 생각을 주는 마귀는 떠나가라!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악한 영은 떠나가라!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마귀는 떠나가라!’ 그러면 떠나갑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복음의 사명을 감당합시다.
3. 복음이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복음 그 자체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전하기만 하면 되는데 전하지 않으니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 영혼을 향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민족, 유대인의 구원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바울은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라도 그토록 구원받기를 원했던 유대인들은 누구입니까? 바울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육신의 생명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모든 형편과 상황을 이기게 하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심지어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걸고서 기도하는 능력입니다. 원수까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한 영혼을 위해 생명까지라도 걸 수 있는 구령의 소원을 주시도록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성령님, 한 영혼을 향한 마음을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 지난주에 ‘깡통지옥’이라는 책을 쓰신 김상호 장로님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산신을 섬기는 가정에서 자라나 자신도 산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가족 중 다섯 명이 무당이었을 정도로 무속신앙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집안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에서, 온 동네가 산신을 섬기는 동네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었기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모진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을 복음화 시키고, 산신을 섬기던 동네 사람들의 80%가 장로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장로님이 무당이었던 장모님을 전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장모님이 장로님 집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장로님은 이번이 장모님을 전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자네나 잘 믿어.”
“아닙니다. 장모님도 구원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내가 믿는 신이 있어. … 신을 바꾸면 내게 큰 환난이 오고 귀신이 해코지 한단 말이야. 말처럼 그게 쉬운 일이 아니야.”
“장모님 생사가 달린 문제입니다. … 이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세상도 존재하는데 예수 안 믿으면 영원한 지옥불에 고통을 당합니다.”
장로님이 아무리 전도를 해도 장모님은 한사코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장모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밥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는 단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님! 어머니가 예수 믿는다고 할 때까지 나는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겠습니다.”
사위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장모님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면서 물도 입에 대지 않는 사위를 보며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도 입에 대지 않고 고된 농사일을 하던 장로님은 단식 6일째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장모님은 자기 때문에 사위가 죽게 되었다고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쓰러진 사위의 손을 붙잡고 장모님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어떡해야 되겠는가? … 예수 믿으라는 것 빼고는 다 들어주겠네.”
“예수 영접하지 아니하시면 저는 이대로 죽을 것입니다.”
“할 수 없지 뭐. 이러다가는 하나밖에 없는 사위가 죽을 텐데 … . 지금까지 내가 섬겨오던 모든 신을 버리고 나도 이제부터 자네 따라 예수신을 섬기겠네.”
이렇게 해서 장로님은 무당 장모님을 하나님께 인도했습니다. 장로님은 단식을 하면서도 장모님이 이렇게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일반사람도 아니고 무당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못해도 하나님은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지옥에 가는 장모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기도한 장로님의 기도에 하님께서 놀랍게 응답하셨습니다. 장로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전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이 개발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제일 중요한 것은 남을 전도할 때 ‘생명 바친 기도 없이는 남의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책, pp, 236-240)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 받은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전도할 수 없고 선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이유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 앞에 무당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도 굴복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을, 복음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놀랍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성령의 능력이 복음을 전하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복음을 듣는 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도 고치고, 복음을 전하는 자도 살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도 새롭게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생의 허무함이 사라지고 삶의 목적을 발견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기쁨과 만족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삶을 가장 의미 있게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천국을 위한 최고의 투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명이며,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됩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