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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천이씨 후손들이여! 원문보기 글쓴이: 이승섭
영천이씨는 고려 초기 영천永川출신 평장사 이문한李文漢을 시조로 하여 여러 분파가 있고, 현재 전국 산재한 인원은 15만 명 정도 추산된다. 안동 영천이씨는 신호위대장군으로 영양군에 봉해진 이대영李大榮의 5대손,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역임한 이헌李軒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헌은 고려 말 혁명의 시절에 영천에서 태어나 벼슬을 싫어하고 산수를 사랑하여 안동 도산의 분천汾川으로 이거했다. 헌의 묘소(녹전면 서삼리 소재)비석에 '生長革命之時, 不樂仕進'라 쓰여 있다. 이를 역산해보면 안동영천이씨는 62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며, 입향조로부터 22대손까지 내려왔다.
헌은 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파坡는 의흥현감으로 외손녀(金有庸의 딸)가 퇴계의 조모이다. 둘째 오塢는 예문관직제학으로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손서가 되었다. 손자 효손孝孫은 봉례奉禮를 역임했고, 증손 흠欽은 인제현감을 지냈다.
회재(晦齋 李彦迪)선생의 조모와 농암의 증조모가 청주양씨 자매여서 또한 7촌이 되기도 한다.
흠의 아들에 농암(聾巖 李賢輔1467-1555)이 태어나 안동 영천이씨의 문호를 열었다. 문과 급제하여 호조참판, 형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품계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청렴 강직하고 경로와 효성이 독실하여 몰 후 '효절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은퇴하여 우리말의 시가문학을 창작하여 당시 '관료적문학'이 성행하던 시절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 그리하여 국문학사에 '강호문학의 창도자'라 일컬어졌다. 청백리에 녹선 되었고,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추모행사가 있었다. 강원감사), 계량季樑(거창현감), 윤량閏樑(내의원판사), 숙량叔樑(왕자사부, 의병장), 연량衍樑(사복시정)이 모두 관직을 역임했고, 사위 산남 김부인(山南 金富仁, 병사兵使)은 탁청정 김유(濯淸亭 金綏)의 아들로 무과 급제했다.
이를 '구인수九印樹'라 불렀다. 이는 당시 농암의 아들, 사위 등 9남매가 벼슬을 하여 수연을 하기 위해 모이면 이 나무에 9개의 관인 끈을 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짓고 복거하여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숙량은 호가 '매암梅巖'으로 '선성3필', '안동3처사'로 일컬어졌으며, 최근 '월천집月川集'에 의병장으로 활동한 일기가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대구 '연경서원姸經書院'에 배향되었다.
농암의 동생으로 습독習讀을 역임한 현우賢佑는 도산의 상류 '내살미(川沙)'에 살다가, 아들 충량忠樑(영해교수)이 부사직 박승장朴承張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로 이거했다. 손자에 '계문고제溪門高弟'로 이름 높은 간재(艮齋 李德弘1541-1596)가 태어났다.
또 한 곳의 집성촌을 형성했다. 퇴계의 명으로 제작했고, 거북선의 원형설계도로 추정되는 '귀갑선도龜甲船圖'를 제작했다. 간재는 교분이 두터운 동문 서애(西厓 柳成龍)와 임진왜란 극복에 비슷한 대처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여러 측면에서 기여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퇴계의 사랑을 받아 임종 직전 "서적을 관리하라"는 명을 받았다. '오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간재는 맏아들 시蒔를 제외한 입笠(문과급제, 설서), 강(문과급제, 교리), 점(문과급제, 한림), 모慕(문과급제, 수찬) 등 4형제, 손자 영구榮久(대과급제, 학유)와 더불어 5叔姪이 대과급제하여, 풍산면 오미동의 '풍산김씨 5형제 문과급제'와 더불어 오래 인구人口에 회자되었다. '3형제 같은 날' 급제는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맏아들 시蒔는 호가 '선오당'으로 당대의 학자였다. 국문시조 '조주후풍가', '오로가'를 지었으며, 아버지의 학풍을 이어 무수한 제자를 두었다. 대과급제 9명(농암, 仲樑, 笠,강,점, 慕, 榮久, 長泰, 時獻), 내, 외손 문객으로 서원배향 8명(농암-분강서원, 간재-오계서원, 류중엄柳仲淹-타양서원, 이숙량-연경서원, 김부인-낙천사洛川祠, 김언기金彦璣-용계서원 龍溪書院, 황준량-욱양서원郁陽書院, 박의장朴毅長-구봉서원九峯書院), 유고와 문집을 남긴 분이 70여명이다.
1) 1519년 9월 9일(음), 농암은 이날 안동부사의 신분으로 '남여귀천'을 막론하고 안동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함께 초청한 실로 파격적인 잔치를 열었다. 이를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이라 했다. 그리고 은퇴를 전후하여, 고향(도산)에서 70세 이상 노인을 초청했는데, 마침 그 숫자가 아홉이고 '애일당'에 모였기에 '애일당구로회 愛日堂九老會'라 했다. 농암은 이런 경로잔치 때마다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노인들과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렸다. '애일당구로회' 근세까지 450여년을 이어와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당시 농암가문에는 유난히 장수자가 많았는데, 농암은 89세, 아버지는 98세, 어머니는 94세, 조부 84세, 증조부 76세, 고조부인 입향조 84세이며, 삼촌(鈞, 직장) 96세, 외삼촌(權受益, 문과급제, 호조참판)92였다. 그리고 아들 6형제도 문량 84세, 희량 65세, 중량 79세, 계량 82세, 윤량 74세, 숙량 74세를 살았다.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런 광경을 유추해보면 농암가문의 경로전통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우리 고향은 늙은이가 많았다고 했다. 가정 계사 가을 내가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내려와 성친하고 수연을 베푸니 이때 선친의 연세가 94세였다. 내가 전날 부모님이 모두 계실 때 이웃을 초대하여 술잔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만 계시는지라 잡빈은 제외하고 다만 향중에 아버지와 동년배인 80세 이상의 노인을 초대하니 무릇 8인이었다.
마침 향산고사에 '구로회九老會'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날의 백발노인들이 서로서로 옷깃과 소매가 이어지고, 간혹은 구부리고 간혹은 앉아있고 편한 대로 하니 진실로 기이한 모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연유로 '구로회'를 열고 자제들에게 이 사실을 적게 하였다." 퇴계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명현 43명이 축하시를 보냈고, 그 시가 농암종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화산양로연도', '분천헌연도', '애일당구경첩' 등이 그것이다. 40여명이 같은 운韻으로 한꺼번에 축하의 시를 쓴 경우는 보기 어렵다.
2) 필사본으로 전한다. 한 집안에서 450여년을 계속한 경로잔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유래가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 이 책에 기록된 한강(寒岡 鄭逑) 선생의 발문 한 부분은 이러하다.
"아아! 농암상공께서는 벼슬이 숭품(崇政大夫)에 있으면서도 세속의 영리를 던지고 풍류의 아름다운 도량을 지녔으니 거의 고인古人에 비교해도 뒤서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상공께서 양로연을 개최함은 처음 그 부모를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효도의 지극함은 노래자老萊子도 하기 어려운 것이니, 사람들이 추앙함은 당연한 것이다....지금 이 구로회가 어찌 예안 한 지역만의 일이랴! 마땅히 우리 동방 곳곳으로 알려 그 아름다움을 칭송할 일이다."
가을부터는 참여했다. 명칭도 이때는 '애일당속로회愛日堂續老會'라 했다. 1585년 대사장大寺場에 모인 것은 회곡(晦谷 權春蘭)의 영천군수 송별 때문이었고, 1602년에는 "이때 오천의 한 상민常民이 왔는데 101세라고 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1705년에는 "마땅히 애일당에서 해야 하나 금기하는 일이 있어 분천 아래 '실거랑(綿溪)'의 송정松亭으로 자리를 옮긴다"다고 했다.
1659년의 주관자인 동추 이영운(同樞 李榮運)의 회문을 보면 "구로회가 중도에 단절되었음은 우리 고장의 큰 손실이다. 지금 늦봄의 꽃이 만발한데, 호산湖山에서 한번 만나기를 기약하니 각자 술병을 차고 오기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모임의 경우는 6명의 회원이름만 남아있다. 자료손상 때문이다.
또 1705년 분계 이원필(汾溪 李元弼)의 기록을 보면 속로회, 백발회등의 명칭변경은 "회원이 점점 많아진 까닭에 '구로'라는 명칭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농암가문의 구로회 전통은 450여 년을 이어왔고, 세월이 흐르면서 회원 숫자도 많아졌다.
1902년의 모임에는 회원수가 37명이나 되고, 나이 합계가 2651세라고 했다. 나이 합계를 기록해 놓은 점은 매우 흥미롭다.
"아아! 농암 효절공께서 낙동강 상류 분강에 '애일당'을 지음은 진정 뜻이 있음이다. 전에 내가 문집을 보니 '구로회', '속구로회', '속로회', '백발회' 등의 여러 이름으로 모임이 이어졌는데, 대개 70세 이상 노인 12, 13인이 항상 모였다.. 돌아보건대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산천은 의구하고 '애일당'은 퇴락했다.. 그런데 지금 효절공의 자손인 부호군께서 90세이니 모두 말하기를 '이 모임을 잇지 않을 수 없다' 한다.
'애일당' 산간을 나와 '탁영담'으로 올라와 작은 배를 타고 흘러 내려가다가 '귀먹바위(聾巖)' 아래에서 배를 묶어두고 술을 한잔씩 돌리고 '어부가 3장'을 노래했다. 높은 갓과 백발들의 그림자가 산수에 비치고 음식은 마른고기, 젓갈, 국수, 밥으로, 불과 5그릇도 안되니 그야말로 진솔회라 할 수 있다.
떠오르나, 이미 취하고 또 취하여 모두들 돌아감을 잊었더라." 1) 권씨부인- 선반가 시조작품을 남겼다. 특히 권씨부인이 지은 '선반가宣飯歌'는 이 지역에 우리말로 된 노래의 전통이 흘러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국문학계에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은 자식이 승진하여 귀향하니 어머니가 아들을 맞이하며 기뻐서 노래한 작품이다.
선반가
이 노래가 지어진 연유를 농암은 이렇게 기록했다. "1526년 여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남방 진해 등지에서 관원들이 해산물과 선적에 비리가 있음을 국문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달이 지나도록 분주히 다녔으나 일이 끝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유서가 내려와 엎드려 보니 뜻밖에 당상관 병조참지에 임명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돌아가는 길에 어버이가 계신 고향 예안에 잠시 들려 이 사실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가 기뻐하시면서 눈물을 흘렸다.
마침 서울 친구가 보낸 '옥관자玉冠子'가 도착하여 곧 부모님 앞에서 망건을 풀고 옥관자를 달았다. 이에 어머니께서 손으로 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옥관자에 구멍이 많아 뀌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 하시어, 내가 우스개 소리로 말하기를 '다는 것이 어렵지 어찌 뀌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하니, 온 집안이 기쁘게 웃었다. 내가 이때 시 한 수를 지었다..."
"다음 해 봄, 또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잠시 말미를 얻어 찾아뵈오니, 어머니께서 나의 일정을 듣고 언문으로 노래를 지어 아이계집종에게 말하기를, '승지가 오거든 내가 지은 노래로 노래하라' 했다. 그 노래는, '먹디도 됴 샤 승졍원 션반야, 노디됴 됴 샤 대명뎐 기슬갸, 가디됴 됴 샤 부모 다힛 길히야'이다.
이는 대개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숙인 문절공(文節公 金淡) 집에서 성장하시어 '승지' 벼슬이 귀한 것을 알았고, 또 당시 내간의 말을 기억하고 계셨는데, 지금까지 정원의 관원들이 조석을 '선반宣飯'이라 했다. 내가 와서 듣고 찬탄을 이기지 못해 시를 지었다...".
"그때 감사 東陽 申大用(韋庵 申상)이 와서 수연壽宴을 주선하고 이 일을 들었다. 신 감사는 일찍이 부모를 여윈지라 더욱 절실히 흠모하여 또 시를 지었다..."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경향으로 벼슬길에 다닌 것이 어언 40년, 어버이를 모신지가 이미 여러 해이나 오직 이 두 가지 일이 가장 즐거웠다. 희롱하던 것들과 지은 시를 버릴 수 없어 작은 책을 만들고, 신 감사의 시를 아울러 실어 '애일당愛日堂'에 갈무리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도록 하였다." 농암집, '愛日堂戱歡錄序' 2) 농암- 생일가, 어부가, 농암가, 효빈가 등 굽은 허리로 자제들로부터 수연을 받고, 그 감격을 '생일가生日歌' 한 수로 표현했다. 이후 3년 뒤 설날 아침, 다시 수연을 받았는데, 참석자들은 축하의 시를 썼다. 이 날 참석하여 축하 시를 쓴 사람은 김유金綏, 퇴계, 황준량黃俊良, 예안현감 이봉수李鳳壽와 농암의 아들 문량, 희량, 중량, 계량, 숙량 등이다.
功名이 그지 이실가 壽夭도 天定이라
해석
이 노래에 대한 농암의 기록은 이러하다.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는데, 향중의 노인들과 이웃 고을의 원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술잔을 나누다보니 마침내 취해서 춤추고 각자 노래를 불렀다. 늙은이 역시 노래를 지어 여기에 화답하였다." '분천강호가 6장(汾川講好歌 6章)'을 합창하게 했다. 주제는 효, 제, 충, 신으로, 자녀교육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여기서는 그 2장과 6정을 소개한다.
제2장
제6장 4) 이시- 조주후풍가, 오로가 '조주후풍가3장操舟候風歌三章', '오로가1장烏鷺歌一章'을 지었다. 전자는 순풍을 기다려 출항하기를 권유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백로는 까마귀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데, 당시 북인이 집권하고 있는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풍계諷戒했다. 역시 농암가문의 국문시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여기서는 '오로가'를 소개한다.
가마귀 지져귀는 곳에 白鷺야 가지 마라.
4. 농암가문의 유적과 유품 글: 김호종 안동대교수, 재작 : 김세일 성균관대교수, 건립: 안동청년유도회
나. 유물 *계원명단: 도승지 남세건南世楗, 좌승지 정순붕鄭百朋, 우승지 오준吳準, 좌부승지 김광철金光轍, 전우부승지 이현보李賢輔, 우부승지 양연梁淵, 동부승지 조인규趙仁奎, 주서 이몽량李夢亮, 주서 이원손李元孫. 이상 7인.
다. 비지정문화재 수천여점에 이르는 '고문서' 와 '목판' 등의 종택 보관 유물을 기탁하였다. 이는 그 분량 적인 면에서 도산서원, 퇴계종택 등과 더불어 압도적인 것으로, 국학원은 별도의 목록책자를 만들기로 하였다고 한다.
국학원은 지금 이의 목록작업을 하고 있다. 유물 가운데는 '내사본內賜本' 책 8권을 비롯한 보물급 문화재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1700년 무렵부터 농암종택에 부처 온 여러 문중과 선현들의 편지들이 대부분 봉투 그대로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데, 이들 역시 후일 공개 되면 향토문화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창원일기創院日記', '복원일기'를 비롯한 분강서원 관련 고문서들도 가지런히 보존되어 있어 서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가. 농암종택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분강촌의 옛 유적들로는 종택 소속 건물과 여기서 100여m 떨어진 동쪽의 분강서원, 또 여기서 동쪽으로 200여m 정도에 애일당이 밀집되어 있었다. 신도비각은 그 사이에 있었다.
'분천헌연도'는 농암 당시의 종택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 사진에 보이는 거목은 느티나무로 농암 당시부터 있었는데 '구인수(九印樹)'라 불렀다. 그 이유는 농암 당시 아들, 사위 등 9남매가 벼슬을 했는데 수연을 하기 위해 모이면 이 나무에 그 인끈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또 마당에는 '옥인석(玉印石)', '금상석(金床石)'이라는 우아한 4각형의 단아한 바위가 있었고, 명농당 앞에는 '영금당(影襟塘)'이라는 연못도 있었다.
"…공의 거처는 비록 협소했으나 좌우로 서책이 차 있으며, 마루 끝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담 아래에는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의 모래는 눈처럼 깨끗하여 그 쇄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나. 긍구당 이분의 현손으로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났다. 농암 당시 퇴락하여 중수하고 '긍구당肯構堂'이라는 편액을 붙였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는다"는 뜻으로, 이후 종택의 당호堂號가 되었고 중심 건물이 되었다. 모든 문사가 이집에서 논의 되었다. 글씨는 당시 명필인 영천자(靈川子 申潛)선생께서 쓰셨다.
사돈 탁청정 김유, 족질 퇴계, 손서 금계 황준량, 예안현감 이봉수, 그리고 다섯 아들들이 시를 지었다.
농암은 이 마루에서 85세인 1551년 7월 29일 생일을 맞이하여 '금서띠(金犀帶)' 두른 굽은 허리로 자제들로부터 수연을 받고 그 회포를 국문시조 '생일가生日歌' 한 수로 표현한 바 있다. 그 시조는 다음과 같다.
공명이 끝이 있을까 수요는 하늘에 달린 것
다. 농암, 분강 "이 바위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언문에는 '귀먹바위-이색암(耳塞巖)'으로 불려 전해지고 있었다. 바위 앞의 큰 강, 상류의 빠른 물살과의 합류, 그리하여 그 물소리가 서로 향응하여 사람들의 귀를 막아버리니, 정녕 '귀먹바위의 이름'은 이로써 유래한 것이 아닐까. 은둔하여 관직의 승진과 좌천에 달관한 은자가 산다면 진실로 어울리는 곳이다. 이런 까닭으로 이 바위를 '농암'이라 하고, 늙은이가 스스로 자호로 삼았다....
그런데 바위 위에는 대臺가 있고, 대 위에는 또 대가 있어서 그 첩첩함이 층탑과 같았다. 소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작은 돌 사다리가 놓여있어, 사람들이 한번씩 숨을 몰아쉰 이후에 올라갔다. 북쪽은 높은 산에 의지해 있고, 구름에 닿을 듯한 서쪽은 긴 숲이 무성하게 감싸 안았다. 동쪽은 긴 강이 유유히 흐르는데, 멀리 청량산으로부터 만학천봉 사이를 구비 돌아 반나절 정도 흘러와 '관어전官魚箭'에 이른다.
그 빼어난 모습은 긴 성과 같고, 그 앞에서는 충격으로 아래에 깊은 소沼를 이루는데, 이 소를 '별하연別下淵'이라 한다. 쏘는 절벽을 베개로 하는데, 절벽 위에는 '병풍암屛風庵'이라는 옛 암자가 있다. 좌우로 기암괴석이 뾰족한데 그 그림자가 소에 떨어져 쳐다보기조차 어렵다. 이곳으로부터 물결은 점점 완만해져서 그 모습이 징·홍·청·격(澄泓淸激)의 경계를 이룬다. 이 물굽이가 농암 아래에 이르면 넓고 가득하게 퍼지고 쌓여 조그만 배를 띄우고 노를 저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분강汾江'이라 한다. 강 가운데는 반석이 있어 마치 비단자리와 같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점석 巖'이라 한다." 그 시조가 '농암가'이다. 시조와 농암의 소회는 이러하다.
'영위(令威)의 감회'가 없지 않았으나, 그 옛날 놀던 오랜 자취가 그때처럼 의연하여 이 노래를 짓는다." '날 사랑의 집'이란 뜻의 '애일당愛日堂'이란 집을 지었다. 이 농암각자는 이 자연암석에 두 자씩 새겨놓았던 것인데 '농암 선생 정대 구장(聾巖 先生 亭臺 舊庄)'이라고 따로따로 조화롭게 음각되어 있었다.
각자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농암 사후 문인들이 옛 정자 터를 기념하기 위해 새겼다. 글씨는 해서체로 한 글자의 크기가 무려 75㎠나 되는데 이와 같은 큰 글씨는 다른 곳에서는 유래가 드물다. 안동댐으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글자부분만을 절단하여 옮겼다.
그 후 1699년(숙종 25년) 다시 '서원'으로 개편하고 선현추모와 교육기능을 다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1967년 복원했다. 지금 도산면 운곡동에 있으나 곧 가송리로 이건 될 예정이다. 분강서원의 관련 고문서와 자료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보존되어 있다.
1). 분강서원 편액: 성세정成世珽
마. 농암묘소 토목공사의 성격을 띠게 된다. 도산서원에서는 안동으로 대형 상여喪輿를 주문하고 있다. 지금의 청량산 묘소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관료들의 만사輓詞 35점이 고스란히 발견된 점이다. 아래 소개한 만사한 분은 이때 발견된 것이다. 이 부분의 처리과정이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있어 당시의 장례절차 및 예법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대현길지大賢吉地'라는 표현이 보인다. 감영의 관리가 산역을 지키는 가운데 3동의 임시막사가 지어지고 안동부사가 제수를 장만하여 영양군수가 치제致祭하고 수많은 인사들이 치전致奠했다. 이날 참석자는 무려 800여명에 이르러 방명록의 종이가 부족할 정도였다 한다.
'정자동면례일기亭子洞緬禮日記'에 그 시말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의 묘소를 옮기는데 다소 무리하게 느껴질 만큼의 규모와 예법 절차를 갖추는 데서 이 일기가 하나의 기록을 넘어서 당시의 유교적 문화와 향토적 정서의 한 단면을 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