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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1회)
1. 들어가는 글
누군가 나에게 한민족의 상고사를 묻는다면, 그리고 웅혼했던 고구려의 역사에 목말라 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갈석산에게 물어보라!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의 블랙박스 같은 존재이다. 갈석산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보았으며, 또한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모두 지켜 본 유일한 산증인이다. 그러므로 갈석산을 모르고 고구려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등불 없이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처럼 위태롭다.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 한나라 낙랑군은 한민족 상고사의 심장부인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또 갈석산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요동 땅은 고구려의 요람이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일어나 웅지를 펼쳤고, 요동을 상실하고 한숨지었으며, 요동을 다시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고, 다시 찾은 그 요동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요동의 시작점인 갈석산을 모르고 어찌 고구려의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세 종류의 갈석산이 있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학자들의 착오에 의해 생겨난 좌갈석과 우갈석, 그리고 역사왜곡을 위하여 동쪽으로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이 있다.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들은 한민족 상고사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한없이 왜곡 축소시켜왔다. 바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과 한반도 평양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에 벌어졌던 고대판 동북공정의 완결판이며, 한반도 평양의 갈석산은 현재진행형인 현대판 동북공정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일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고대판 동북공정도 현대판 동북공정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찬란했던 한민족의 상고사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고구려는 요령성의 요하나 하북성의 난하에 가로막힌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저 멀리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을 넘어 대륙을 호령하던 대제국이었다. 오로지 갈석산이 이를 웅변해줄 것이다.
2. 갈석산의 특징
오늘날 갈석산에 대한 논의는 매우 복잡다단하다. 그러나 본래의 갈석산을 알고 나면 그 모든 논의는 아침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만다. 갈석산의 특징은 아래의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다.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상서』 ‘우공편’
역사에 등장하는 갈석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발해만 북부지역에 살던 동이족의 한 갈래인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인 중국 하나라 우임금 시절에 도이가 배를 타고 발해만 연안을 돌아,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에 우뚝 솟은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갈석산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 구절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첫째 특징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는 사실이다.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다. 역사적으로 황하 하류는 그 흐름이 여러 번 바뀐다. 이로 인하여 착오에 의한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나면서 혼란이 발생하였다. 오늘날 현대 과학은 시대별 황하 하류의 흐름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라 우임금 시절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의 위치를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 이 갈석산이 오늘날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백석산 동쪽의 한 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이다.<필자의 글『부도지』로 보는 고조선의 비밀(제2회) 참조>
(2) 갈석산은 태행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한다.
“태행산맥 동쪽 끝의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동쪽 부목榑木 땅에 이른다.(太行石間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東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時則訓’
한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B.C. 179~122)이 편찬한 『회남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갈석산이 태행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갈석산을 넘으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나온다고 하였다. 이때는 위만조선시대(B.C195~108)에 해당한다. 태행산맥은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를 이루는 험준한 산맥이다. 갈석산과 조선의 연관성을 알려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3)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다.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사기색은』
위의 (1)에서『상서』‘우공편’에 나오는 구절은 『사기』‘하본기’에도 나온다.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위치한 이 갈석산을 『사기색은』에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이 갈석산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또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라고 하였다. 이는 위의 『회남자』에서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라는 구절과도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하며 또한 ‘태행산맥’에 위치한 이 갈석산(백석산) 너머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의 지명을 찾을 수 있는가? 그렇다. 갈석산(백석산) 바로 동편에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버젓이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에서 편찬된 『무경총요武經總要』와『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등에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갈석산의 중요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황하 하류에 위치했던 갈석산 너머로 우리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쯤해서 많은 독자들이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한반도 평양이라고 달달 외었다. 그런데 그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한반도 평양에서도 수천 리 서쪽의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아마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갈석산이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다’는 『상서』‘우공편’의 내용과 그 갈석산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는 『사기색은』의 구절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두루 나오는 내용이다. 중국의 모든 역사서를 부인하지 못하는 한 ‘갈석산이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하며, 그곳이 한나라 낙랑군이 위치했던 곳’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갈석산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형을 따라 험난한 곳을 이용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만여 리에 이르렀다(築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 『사기』 ‘몽념열전’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장군에게 명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에 이르렀다(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 起自臨洮, 至于碣石).” 『수경주』‘하수河水 3’
위의 두 구절에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임조에서 요동까지’ 또는 ‘임조에서 갈석까지’이며, ‘갈석산이 곧 요동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위 『태강지리지』의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는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갈석산을 넘어서면 고구려의 요람이었던 요동 땅이 시작된다.
(5) 갈석산의 특징을 다시 요약해보자.
①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다. ② 갈석산은 태행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한다. ③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다. ④ 갈석산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구비한 갈석산은 오늘날 중국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백석산 동쪽의 한 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이다. 본래 갈석산은 오직 백석산(또는 낭아산) 하나 뿐 이었다. 기원전의 모든 역사서에 언급된 갈석산은 이 백석산(또는 낭아산)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대를 따라 황하 하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학자들은 그 바뀐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갈석산을 찾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왜곡을 위해 갈석산의 지명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남으로써 한민족의 상고사가 안개 속을 헤매게 되었다. 이제 새롭게 생겨난 갈석산들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3. 착오로 생겨난 갈석산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한다. 이것은 갈석산의 절대적인 명제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B‧C 602년 이전까지 황하 하류는 하북성 보정시 방면으로 흘렀다. 이때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은 백석산(또는 낭아산)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원전 B‧C 602년부터 A‧D 11년까지 황하 하류가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으로부터 500여리 떨어진 하북성 천진 방면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천진방면에 새로운 갈석산이 생겨났다. 이것이 『통전』에 등장하는 좌갈석이다. 그리고 A‧D 11년부터 893년까지 황하 하류의 흐름이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 방면으로 흐르게 되면서 이곳에 또 새로운 갈석산이 생겨났다. 이것이 『통전』에 등장하는 우갈석이다. 이들 착오에 의해 생겨난 갈석산들을 사서를 통해 살펴보자.
(1) 『사기색은』에 나타난 북평군의 갈석산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려성현 서남에 있다.’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 또 『수경』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 있다.’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인 듯하다.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다(아니다).(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是(非)北平之碣石)” 『사기색은』
『사기색은』은 갈석산을 두 개로 보고 있다.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황하 하류의 흐름과 해안선의 위치가 변하면서 새로 생겨난 북평군 려성현 서남쪽이며 요서 임유현 남쪽에 있는 갈석산이다. 『통전』에서는 이 갈석산을 좌갈석이라 하였다. 위 『사기색은』의 구절은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판본에 따라 마지막 구절을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다(當是北平之碣石)’ 로 쓴 것이 있는 반면 이와는 정반대인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 아니다(當非北平之碣石)’로 쓴 판본도 있다. 『사기색은』의 저자 사마정은 당나라 시대 사람이다. 그 당시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상곡군에 속하였고, 황하 하류로부터 서쪽으로 50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러므로 착오에 의하여 새로 생겨난 좌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다.
(2) 『통전』에 나타난 좌갈석과 우갈석
“갈석은 해변의 산이름이다. 지금의 북평군 노룡현에 있다(碣石海邊山名 在今北平郡盧龍縣也).” 『통전』‘고기주古冀州’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 태강지지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와 옛 경계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이 아니다(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통전』‘고기주古冀州’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에 있다. 지금 북평군 남쪽 이십 여리에 있는 즉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통전』‘변방邊防1’
『통전』은 갈석산을 3개로 보고 있다. 즉 『태강지리지』의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며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옛 경계(高麗舊界)에 있는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과, 북평군 노룡현에 위치하며 고구려 안에 있는(高麗中) 좌갈석과 두우 당시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우갈석이다. 『통전』에 나오는 이 세 가지 갈석산만 제대로 이해하면 갈석산에 대한 모든 혼란이 사라진다. 더불어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가 어디인지, 당시의 요수遼水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위 『통전』의 3번째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에서 일어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요수遼水는 어느 강물을 말하는 것일까? 『회남자』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온다. 요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으로 흘러 똑바로 요동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遼水出碣石山 自塞北東流 直遼東至西南入海)” 『회남자』‘권4 추형훈墜形訓 고유高誘의 주석’
갈석산(백석산)에서 나오는 물은 오늘날의 거마하拒馬河, 역수易水 당하唐河 등이다. 이 물들이 중류에서 만나 대청하大淸河를 이루어 천진부근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제 아래의 『연장성(?) 지도』및 『중국지도집』(1972년판)을 보자. 갈석산(백석산)에서 나와서 요새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요수(遼水, 지도에서 푸른색으로 표시함)는 오늘날의 역수易水와 그 하류인 대청하大淸河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통전』의 저자인 두우가 직접 답사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은 『연장성(?) 지도』에서 무수武遂라고 표시된 지역이며, 『중국지도집』(1972년판)에서 수성遂城으로 표시된 지역이다. 두우는 이곳에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대청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을 본 것이다. 참고로 위 『회남자』를 주석한 고유高誘는 후한시대 학자이다. 그 당시는 바다가 『연장성(?) 지도』의 웅현雄縣 부근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러므로 웅현의 대청하 북쪽이 후한 시대 요동의 서남쪽에 해당한다. 이곳이 전한의 탁군 신창현 지역이며, 후한의 요동군 신창현 지역이며, 북위의 북평군 신창현 지역이며, 훗날 수나라 북평군 노룡현 지역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한다.
위에서 『통전』이나『회남자』에서 나오는 요수遼水를 오늘날의 요령성 요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수遼水는 역사 강역의 변동에 따라 여러 번 그 위치가 바뀐다. 요수遼水를 무조건 오늘날의 요하遼河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두우가 『통전』에서 말한 세 개의 갈석산 중에서 고구려 안(高麗中)에 있는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이 갈석산을 현재의 하북성 난하 하류 창려부근에 있는 갈석산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은 황하 하류가 직접 천진부근으로 흐를 때(B‧C 602~ A‧D 11) 생겨난 것이므로 천진방면에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이 하북성 난하 방면의 갈석산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주류사학계에는 엄청난 충격이다. 두우는 이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이 고구려 중에 있다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난하보다 더 서쪽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이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이 천진부근임에랴!
앞으로 고구려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북평군 노룡현에 위치한 이 좌갈석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므로 사서를 통해 그 위치를 알아보자.
『구당서』‘평주’조를 보자.
“평주는 수나라 북평군이다. 무덕(武徳, 618~626) 2년에 평주로 고쳤고 임유현과 비여현을 다스렸다. 이 해에 치소를 임유현에서 비여현으로 옮겼고, 노룡현으로 이름을 고쳤고 다시 무녕현으로 고쳐 설치하였다. 7년에 임유현과 무녕현을 없앴고 북평군으로 고쳤다. 건원(乾元, 758~760) 원년에 다시 평주라고 하였다(平州. 隋為北平郡. 武徳二年, 改為平州, 領 臨渝 肥如 二縣. 其年, 自臨渝 移治 肥如, 改為盧龍縣, 更置撫寧縣. 七年, 省 臨渝 撫寧 二縣. 天寶元年, 改為北平郡. 乾元元年, 復為平州)”.
즉 당나라 북평군은 수나라 북평군이었다. 그러면 『수서지리지』‘북평군’조를 보자.
“북평군은 옛날 평주에 설치했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2269이다. 노룡현은 옛날 북평군에 두었다. 신창현과 조선현 등 2개의 현을 다스렸다. 북제에서 조선현을 신창현에 편입시켰다. 또 요서군의 해양현을 없애고 비여현으로 편입시켰다. 개황(581~ 600년) 6년에 또한 비여현을 신창현에 편입시켰다가 18년에 노룡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업(605~618년) 초에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장성이 있다. 관관(闗官)이 있다. 임유궁이 있다. 복주산이 있다. 갈석이 있다. 현수, 노수, 열수, 윤수, 용선수, 신량수가 있다. 바다가 있다(北平郡. 舊置平州. 統縣一, 戸二千二百六十九. 盧龍. 舊置北平郡, 領 新昌 朝鮮 二縣. 後齊省朝鮮入新昌, 又省遼西郡并所領海陽縣入肥如. 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 十八年改名盧龍. 大業初置北平郡. 有長城. 有闗官. 有臨渝宮. 有覆舟山. 有碣石. 有 玄水 盧水 湼水 閏水 龍鮮水 臣梁水. 有海)”
즉 수나라 북평군은 북위의 평주 북평군이었다. 『위서지형지』‘북평군’조를 보자.
“북평군은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430이며, 인구수는 1836명이다. 조선현은 전‧후한과 진晉에서는 낙랑에 속했으며 후에 파하였다. 연화(432~435년) 원년에 조선 사람을 비여로 옮겨 다시 설치하여 속하게 하였다. 신창현은 전한에서는 탁군에 속하였고, 후한과 진晉에서는 요동군에 속하였다가 후에 (북평군에) 속하였다. 노룡산이 있다(北平郡, 秦置. 領縣二, 户四百三十, 口一千八百三十六. 朝鮮, 二漢晉屬樂浪後罷延和元年 徙朝鮮民於肥如復置屬焉. 新昌, 前漢屬涿後漢晉屬遼東後屬 有盧龍山)”
여기서 북위의 북평군 신창현의 위치를 알아보자. 전한의 탁군 신창현은 <보주補注>에 따르면 ‘오늘의 신성현 동쪽 30리(今新城縣 東三十里)’에 있다. 또 신성新城은 『청사지리지』‘직예 보정부’조에 의하면 ‘보정부 동쪽 150리’에 있다. 그러므로 신창현은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부 동쪽 180여리에 있었다. 위의 『수서지리지』에 의하면 신창현이 요서군 비여현 등 다른 현들을 흡수하여 노룡현으로 바뀌었고, 그곳에 갈석산이 있었다. 결국 『위서지형지』『수서지리지』『구당서』등을 참조하면 『통전』의 저자인 두우 당시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은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동쪽 180여리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질 수는 없다. 이 갈석산이 난하까지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이 갈석산을 특정할 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갈석산이 당시 천진방면으로 흐르던 황하 하류 해변가를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고지도인 『대청광여도』『당토명승도회』등을 참조하면 오늘날의 대청하大淸河와 자아하子牙河가 합류하는 지점의 남산南山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위가 설치한 평주이자 수나라와 당나라의 북평군이 오늘날의 난하 방면이 아니라 하북성 보정시와 천진시 사이에 위치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통전』에서 언급한 우갈석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우갈석은 고구려 역사해석에 크게 중요하지 않으므로 간단하게 언급한다. 이 우갈석은 황하가 A‧D 11년에서 893년까지 산동성 빈주시 방면으로 흐르면서 생겨났다. 산동성 빈주시가 2005년에 무체현의 대산大山이 갈석산임을 고증하여 갈석산으로 개명하였다. 청나라 시기 지도인 『당토명승도회』에 진시황, 한무제가 갈석산에 올랐다는 시황대와 한무대가 이 갈석산 부근에 표기되어 있다. 현재 중국은 하북성 난하 부근의 갈석산과 산동성 빈주시의 갈석산을 공식적인 갈석산으로 지정해 놓고 서로 진짜 갈석산이라고 우기고 있는 실정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하여..... 진짜 갈석산(백석산)이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4.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갈석산은 모두 역사왜곡을 위하여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들이다. 2개의 가짜 갈석산이 있는데 현재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난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과 한반도 평양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이제 이들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과 그로 인하여 한민족의 상고사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알아보자.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의 핵심인 한나라 낙랑군에 위치하였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한 곳이다. 또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며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지명 이동은 한민족 상고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1) 난하 하류의 갈석산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위치한 난하 부근의 갈석산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역사왜곡을 위하여 동쪽으로 1,000여 리 지명 이동한 것이다. 갈석산의 지명이 이동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인 요나라(916년 ~ 1125년) 시대이다.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됨으로써 고구려 역사의 요람인 요동이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에서 요령성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갈석산의 지명 이동과 더불어 한민족 상고사 및 고구려 역사와 관련된 지명들이 대거 하북성에서 요령성으로 1,000여 리 동쪽으로 지명 이동되었다. 고대판 동북공정이 벌어진 현장이다. 이로 인하여 한민족의 상고사는 짙은 안개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한민족 상고사와 고구려의 역사를 복원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가짜 갈석산인 이유와 지명 이동된 시기 등을 살펴보자.
① 난하 부근의 갈석산이 가짜 갈석산인 이유
첫째, 갈석산은 반드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나 난하 하류 갈석산 방면으로 황하가 흐른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진짜 갈석산으로 둔갑시키기 위하여 ‘황하 하류가 난하 방면으로 흘렀다’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었다. 그 대표적인 설이 ‘구하 윤해설淪海設’이다. 즉 옛날 발해만이 육지였고, 황하가 난하 방면으로 흘렀는데 황하 하류 500여리의 육지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로 인하여 지금처럼 황하 하류와 갈석산이 500여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들은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허황된 설에 불과하다. 오늘날 현대과학은 황하의 시대별 흐름을 모두 알고 있다. 황하 하류는 결코 하북성 천진 방면을 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가짜 갈석산이다.
둘째, 갈석산은 태행산맥 동쪽 끝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나 난하 하류 갈석산은 태행산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셋째,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해야 한다. 난하 하류 갈석산 부근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이덕일교수의 견해를 살펴보자.
“수나라 정사인 『수서지리지』 ‘상곡군’ 조는 수성현遂城縣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했다는 뜻이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天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는 갈석산이 버티고 있어 평양이 아니라 이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었음을 몸으로 증거한다.” <2006.11.8 조선일보 이덕일칼럼>
이덕일교수는 『수서지리지』‘상곡군’조에서 낙랑군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 하였고, 난하 하류 갈석산 지역의 현재 지명이 창려이기 때문에 이곳이 낙랑군 수성현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 사서를 통해 살펴보자.
“수성현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했다. 북위가 영주에 준하여 남영주를 설치했다. 5군 11현이다.(용성현‧광흥현‧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석성현‧양무현‧광도현은 건덕군에 속한다. 양평현‧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한다. 영락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부평현‧대방현‧영안현은 영구군에 속한다.) 북제北齊는 오직 창려군 한 개만 남겨놓고 영락현과 신창현 등 2개현을 다스렸으며,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개황원년(581년)에 주州를 옮겼으며, 3년에는 군을 폐하였고, 18년에는 수성현으로 고쳤다. 용산이 있다(遂城.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 五郡十一縣. 龍城 廣興 定荒 屬 昌黎郡, 石城 陽武 廣都 屬建德郡, 襄平 新昌 屬遼東郡, 永樂屬樂浪郡, 富平 帶方 永安 屬營丘郡. 後齊唯留黎一郡, 領 永樂 新昌 二縣, 餘並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改為遂城. 有龍山.)” 『수서지리지』‘상곡군 수성현’
위 『수서지리지』‘상곡군 수성현’조에서 북위의 남영주이자 북제의 창려군이며, 수나라의 수성현이었던 곳은 정확히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있던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아래의『중국역사지도집』 ‘남북조시대 북제’편 참조)
그러면 난하 하류의 창려라는 지명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독사방여기요』를 보자.
“창려현은 영평부 동쪽 80리에 있다. 전한의 요서군 교려현이며, 후한이 창려로 고쳤다. 그 땅은 지금의 폐영주 경에 있다. 오대五代시대인 l양나라 말에 거란이 정주定州의 포로들로 옛날 유성현 경에 광녕현을 설치하고, 아울러 영주인해군을 설치하였다. 후에 광녕현의 치소를 이곳(난하 방면)으로 옮겨 평주에 속했다. 금나라 대정 29년(1189년)에 창려현으로 고치고 원나라 지원 7년(1271년)에 없앴다가 12년에 다시 설치하여 난주 영평로에 속했다....후략(昌黎(永平)府東八十里 漢治交黎縣屬遼西郡後漢改曰昌黎 其地在今廢營州境 五代梁末契丹以定州浮戶置廣寧縣於故柳城縣境兼置營州隣海軍 後徒縣治此屬平州 金大定二十九年改爲昌黎縣元至元七年省 十二年復置屬灤州尋屬永平路....後略)”『독사방여기요』 ‘직예8 영평부’
위의 구절을 살펴보면 난하 방면의 창려현 지명은 1189년(금나라 대정 29년)에 생겨난 것으로 북제의 창려군이나 수나라의 수성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 주변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었다는 주장은 틀렸다. 오히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방면의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되면서 창려라는 지명도 같이 이동한 것이다.
② 난하 부근으로 갈석산의 지명이 이동된 시기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한 시기는 언제일까? 이는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역사왜곡된 시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의 역사서와 이후의 역사서는 요동에 대한 해석을 달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통전』에 나타난 3개의 갈석산을 살펴본 바 있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하북성 보정시에서 천진시 사이인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과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우갈석 등이다. 『통전』은 당나라 사람 두우(杜佑 : 735~812)가 801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때까지도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보이지 않는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우적도』(남송시대 1136년 작)이다. 이 『우적도』에서 난하(유수) 부근에 갈석산과 더불어 노룡현과 평주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어서 『구주산천실증총도』(남송시대 1177년 작)와 『거란지리지도』(남송시대 작) 등에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나온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난하 하류의 창려라는 지명도 1189년(금나라 대정 29년)에 지명 이동 되었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생겨난 시기는 『통전』의 편찬 이후인 801년에서 『우적도』가 그려진 1136년 이전으로 대략 요나라(916 ~ 1125년) 시기로 추정된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여 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대적인 지명의 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요사』이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을 의미하며, 『요사』이후의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은 오늘날의 요령성을 의미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역사서를 연구해야만 한민족의 상고사 및 고구려 역사를 올바로 볼 수 있다.
(2) 한반도 평양의 갈석산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산이다.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학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지난 천여 년 동안 진짜 갈석산 행세를 해오면서 한민족 상고사를 왜곡하였다. 그런데 한반도 평양의 가짜 갈석산을 주장하는 자들은 갈석산의 기본요건조차 망각하고 있다. 오로지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만들려다 보니 갈석산을 한반도 평양으로 가져와야 하고, 진나라 만리장성을 끌고 와야 했다. 그러나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흔적은 조작할 수 있으나 황하 하류를 어떻게 한반도로 끌고 올 수 있겠는가?
갈석산이 한반도 평양에 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식민사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이다. 그는 일제시대 『사학잡지(史學雜誌)』에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 및 왕험성 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고에서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며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라는 이나바 이와기치의 설은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뒤를 이었다. 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수성현’조를 보자
“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산천조勝覽山川條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소축後代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東西行城의 석성石城(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를 패강장성浿江長城의 유지遺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 설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한국고대사연구』박영사 1976. 148쪽>
이병도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成縣을 황해도 북단의 수안遂安에 비정한 것은 수성현의 ‘수遂’ 자와 수안의 ‘수遂’ 자가 같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황해도 수안에 갈석산과 장성이 없자, 『진서지리지』‘수성현’조의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秦築長城之所起)”는 구절을 터무니없는 맹랑한 설로 부정하고 있다.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이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은 『진서지리지』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서 두루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다. 황해도 수안에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없으면 ‘황해도 수안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다’는 설이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병도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라는 자신의 설을 고수하기 위하여 중국과 한국의 수많은 역사서를 부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황해도 수안의 요동산이 갈석산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황해도 수안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다’라고 믿고 싶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참으로 어설픈 희망사항은 해방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단사학을 장악한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하여 확고한 주류학계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같이 본래의 진나라 만리장성은 중국 감숙성 임조에서 태행산맥의 갈석산(백석산)까지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인 요나라(916 ~ 1125년) 시대에 태행산맥의 갈석산(백석산)이 하북성 난하 하류 부근으로 지명 이동되면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오늘날의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까지 왜곡 연장되었다. 그로부터 또 1000여년이 지난 일제시대에 갈석산의 지명이 한반도 평양으로 지명 이동되면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한반도 평양까지 왜곡 연장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중국역사지도집』에 진나라 만리장성을 한반도 평양까지 당당하게 그려놓고 자국민들을 교육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홍보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날, 모든 동북공정은 부질없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이제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속으로 배를 띄운다. 누군가 갈석산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이가 있다면, 마침내 가슴 뭉클한 한민족의 상고사로 향하는 보물섬 지도를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수천 년 전 과거로의 머나먼 여정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특히 고구려로 향하는 역사항로에는 현기증이 나는 5호16국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해 가야한다.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갈석산이 우리들의 긴 여정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