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곽재우 그 자신이 무예와 병법에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
기록을 보면 19세 때, 셈법과 병법을 공부하는 틈틈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
국경지방 체험도 그의 시야를 넓히는 데 일조했다.
23세에 의주목사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3년을 보냈다.
의주는 군사 요충지이기에 자신이 학습한 병법을 실제 군사운용 현장에 투영해보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렇듯 환경과 관심, 경험이 맞물려 전쟁 발발 직후에 집안의 재산을 털어 장사들을 모았고, 깃발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칭호를 내건 의병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 모인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자기 옷을 벗어 싸움할 군사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군사의 처자에게 입혔다.
이는 병법가 오자(吳子)가 군사의 몸에 난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의 군대(父子之兵)’를 만든 것과 같은 리더십을 실천한 사례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지원하라는 명령에 대해 “백전백승의 군졸들을 어찌 차마 죽을 곳으로 데려가겠소.
고립된 성은 지킬 수 없소”라며 출전을 거부했다.
군사에게 피해를 주는, 지는 싸움은 할 수 없다는 병법의 원칙을 지킨 고육책이다. 중국 고대의 사상가
순자(荀子) <의병(議兵)> ‘삼지(三止)’,
‘장수가 지켜야 할 세 가지
임금의 명령을 위반해 장수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라도 “장졸들을 위태로운 곳으로 몰아넣지 말라(不可使處不完),
이길 수 없는 적을 공격하지 말라(不可使擊不勝), 백성을 속이지 말라(不可使欺百姓)”
이 원칙은 이순신이 1597년 초 부산포 진격 명령을 거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곽재우가 예측한 대로 진주성은 결국 함락됐고, 이순신과 달리 조정의 불합리한 명령을 실행한 원균의 조선 수군도 전멸당했다.
곽재우가 병법에 능통했다는 사실은 1599년 11월에 쓴 ‘도산성을 수선할 것을 주청하는 장계(請繕島山城啓草)’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병법에 이르기를, ‘먼저 적이 우리를 이길 수 없게 하고, 적을 이길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고 했는데, 이는 <손자병법>의 ‘군형(軍形)’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또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지키는 곳이 없는 데 있다(亡在於無所守 城之不可不守)”는 <위료자>의 구절도 언급했다.
그의 말처럼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인 <위료자>의 ‘12릉(十二陵)’에 나오는 표현이다.
그가 얼마나 병법을 열심히 연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자신이 학습한 병법 이론과 의주에서의 경험을 실전에 적극 활용한 그가 의령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를 방어하는 바람에 일본군의 호남 진출은 봉쇄됐다.
전쟁 기간 동안 그를 상징할 눈부신 대첩(大捷)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활약에 대해 조정은 물론이고 백성 중에도 아는 이가 많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6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김세겸(金世濂)은 “<일본국사(日本國史)>에 임진년에 그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해 온 사실을 상세히 기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여러 장수 중 오직 선생의 성명만이 기재돼 있다”고 했다.
사대부 곽재우는 41세 때 의병 활동의 공로로 유곡 찰방에 임명된 이래 1616년까지 24년간 29회의 다양한 관직에 제수됐다.
그중 15회는 출사했고, 14회는 관직 자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출사했던 15회도 실제로는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직하거나, 부임했다가 바로 사직하곤 했다.
그 원인은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8세에 경상좌도 병사에 부임해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장계(狀啓)를 올려 도산성(島山城)을 수리할 것을 간청하고 성을 수비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서를 내고 낙향했다.
그로 인해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탄핵을 당해 곧바로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1년 후 귀양에서 풀려난 뒤부터는 현풍(玄風)의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끊고 솔잎을 먹으며 신선(神仙)처럼 살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신선이 될 수 없었다. 세상의 불의를 걱정하고 개혁하려는 마음과 현실을 떠나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의 경계선에서 방황했다.
‘임금이 부르는 명령이 있었음(有召命, 유소명)’란 시(詩)에는 경계인(境界人) 곽재우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몸을 편안히 하려니 군신(君臣)의 의(義)를 저버릴까 두렵고, 세상을 구하려니 날개가 난 신선이 되기 어렵네(安身恐負君臣義 濟世難爲羽化仙).” 자기 한몸을 편히 하는 것과 의리를 지키는 것, 신선처럼 탈속해 사는 것과 세상을 구제하는 일 사이에서 고심하는 인간이 그였다.
부귀영화 대신 세상의 불의(不義)를 극복하려는 열정이 강한 그가 출사를 하거나 거부할 때 쓴 상소문은 일반적인 선비 혹은 사대부라면 입밖에 낼 수 없었던 과격한 이야기가 많다.
비수와 같은 그의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이 시대의 리더들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중국 남송 때의 인물인 ‘장준에 대한 논평(張浚論)’에서는 “천하의 충신(忠臣)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충신이라고 할 수 없으며, 천하의 현신(賢臣)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를 현신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不知天下之忠臣者 不可謂之忠 不知天下之賢臣者 不可謂之賢)”며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왕과 사대부를 비판했다.
곽재우 장군의 뜻을 기려 후손들이 경북 달성군 비슬산에 세운 예연서원.
사대부가 입밖에 내지 못하던 과격한 언어들
1598년 9월 선조가 관직을 내렸을 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그의 침략성 때문이 아니라 왕인 선조가 그럴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며,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지난날의 허물을 아주 고쳐서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라”고 꼬집었다. 12월에 올린 상소도 마찬가지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조종(祖宗)의 2백 년 사직(社稷)을 생각하시고, 조종의 2백년간 다스린 백성들을 걱정해 지난날의 잘못을 통렬히 뉘우치시고 이전의 마음을 크게 고쳐야 한다”고 선조의 반성을 촉구했다.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임금 선조의 무능이라고 보고 질타했다.
또한 당쟁을 심하게 비판하면서도 당쟁은 “장차 전하의 나라가 반드시 위급해져 멸망할 지경에 이를 때 그칠 것"이라고 했다.
선조에게 악담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라를 중흥시키는 세 가지 계책 상소(中興三策疏)’에서는 광해군을 겨냥했다.
“전하께서 하신 일 중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天運)이었고, 할 수 없었던 것은 인사(人事)였다"며 능력이 아니라 운이 좋아 왕이 된 만큼 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해 왕의 능력을 보여주라고 일갈했다.
1609년에는 광해군이 궁궐 신축공사를 하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역대 제왕의 흥망성쇠가 백성의 마음과 하늘의 명운(命運)에 달려 있음을 전제, “오늘날 백성의 마음이 떠난 것인가, 떠나지 않은 것인가? 하늘의 명운이 가버린 것인가, 가버리지 않은 것인가?(今日之人心離耶 不離耶 天命去耶 不去耶)”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빨리 마음을 뉘우쳐 지난날의 허물을 힘껏 고치고, 백성의 힘을 중하게 여겨 토목의 역사는 다시 일으키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전쟁의 후유증이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궁궐공사냐고 따진 것이다.
광해군이 큰 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전하께서 편안하게 놀기를 좋아하시는 조짐이 반드시 이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면서 “왕이 나라를 중흥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하가 다스리는 나라를 하늘이 대신 다스려주는 것인가? 땅이 대신 다스려 주는 것인가? 귀신이 대신 다스려주는 것인가?(殿下之國事 天爲之耶 地爲之耶 鬼神爲之耶)”라고 거침없이 질타했다.
그의 격정적인 간언은 멈추지 않았다. “궁중의 시녀와 무당과 눈먼 점쟁이,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와 소인(小人)의 말만 듣고, 충신과 현명한 신하를 믿지 않았던 옛날의 왕들 중에서 나라를 망치고 자신을 망치지 않은 왕은 없었다”며 광해군을 다그쳤다.
선조와 광해군에게 날린 직격탄
선비 곽재우는 백성의 안녕을 선비와 임금의 임무로 보았다.
“백성이 편하게 된 뒤에 나라가 부유하게 되고, 나라가 부유하게 된 뒤에야 군사가 강하게 되고, 군사가 강하게 된 뒤에야 적을 막을 수 있고, 적을 막은 뒤에야 나라가 중흥하게 될 것이다(民安而後國富國富而後兵强 兵强而後禦敵 禦敵而後中興).”
관직을 주면서도 귀 기울이지 않는 왕에게 “전하는 신의 말을 쓰지 않으면서 신의 몸만 이용하려 한다(殿下不用臣言 而欲用臣身者).
이는 신을 관직으로 묶어 다른 여러 신하처럼 부리기만 하려는 것이다.
전하는 여러 신하를 개와 말처럼 여긴다.
그런데도 신까지 그 가운데로 몰아 넣으려고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자신은 개와 말이 될 수 없다고 관직을 거부하면서,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시옵소서 라고 선언했다.
곽재우의 삶에 대해 많은 논자는 경계인의 삶과 말년의 솔잎을 먹고 살았던 행보를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지혜라고 평가했다.
전쟁터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장수들이 권력자의 의심을 사 천수를 누리지 못한 전철을 피하려는 처세술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다양한 상소문에서 나타나듯 ‘세상을 구하려는 열정’과 그의 진정성을 왜곡한 부분적 인식이다.
그는 매순간 현실의 불의와 부조리, 관행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 싸움을 보다 능동적으로 이끌고자 거꾸로 신선의 삶을 가장했다.
30대 중반의 곽재우는 권력의 눈밖에 나 과거를 포기했지만, 은일의 시기를 다가올 국가 전란을 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40대의 곽재우는 전란이 일어나자 탁월한 병법가로 가장 먼저 ‘충의(忠義)’의 깃발을 들고 붓 대신 칼을 빼어 들고 백성을 지켰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는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도인(道人)의 모습으로 있으면서도 시시비비를 논하며, 임금에게 고함쳤다.
그가 세속의 권세를 추구하는 사대부나 글자만 아는 선비였다면 가능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쏟아냈다.
솔잎을 먹으며 신선의 삶을 동경하는 듯한 모습이나, 창녕군 도천면에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정(忘憂停)’을 지은 참 이유는 세상의 고통을 너무 잘 알고 있던 그가 세상에 소리치려는 역설적 수단이었다.
경계선 위의 삶은 위험하지만 곽재우처럼 세속적 욕망을 버린다면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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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사적지 및 기념시설물 > 의병기념시설
곽재우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유허비.
곽재우 유허비는 창녕 도천면 송진리와 우강리의 경계인 영산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강변 망우정 뒤편에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충익공망우선생비(忠翼公忘憂先生碑)’라 새겨져 있고 ‘숭정기원후3기유4월건(崇禎紀元後三己酉四月建)이라고 적힌 것으로 보아 1789년(정조 13)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당시 마을 유림 중 조언성(趙彦城)·이기성(李基成)·신영복(辛永馥)·신계동(辛啓東) 등 4명이 세웠고, 비각이 있다. 비석의 높이는 180cm이고, 너비는 70cm로 받침돌 위에 비 위쪽 양쪽 모서리를 비스듬히 깎아 만든 비신을 세웠다.
곽재우 유허비는 송진리의 1022번 지방도에서 영산천을 따라 낙동강쪽으로 100여 미터 강변으로 내려가면 망우정 경내에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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