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聖地 에페소 여행기 -
기원전 문화를 좀더 알고싶고, 에베소가 기독교 성지 이기에
가 보고싶었다. 그래서 여행지를 터키로 택했다.
유럽의 문화가 오래되기는 했지만, 여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기원이후(AD)인 것에 비하여, 터키는 기원전(BC)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동양과 서양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터키는 역사와 문화가 다양하고
풍요롭다. 한마디로 터키는 동(東)과 서(西), 고(古)와 금(今),
성(聖)과 속(俗)이 한자리에 얽혀져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13시 20분에 출발하여 거의 12시간 가까이를 날아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어둠이 깔려있었다.
우리나라와 터키의 시차는 터키가 7시간 늦는데 터키의 서머타임
기간(3월 27일부터 10월 29일까지)에는 6시간이 늦다.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서 국내공항으로 이동, 국내항공으로
이즈밀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로 1시간정도 걸려 터키의 대표적인
해변휴양도시 쿠사다시로 이동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에게해를 바라보니 바다는 칠흑같은 어둠이다.
배가 고파 식당으로 내려서니 한국사람들 일색이다.
너무 혼잡하여 우리들의 식사 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고
푸른 에게해와 작별을 하고 차에 오르니 오늘 마레 호텔에 투숙한
한국인이 200여명이나 된다고 가이드가 일러준다.
그 만큼 우리들도 삶의 질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호텔을 떠났다.
지중해의 휴양도시 아이발릭의 마레호텔을 출발하여 기독교 성지로
많이 알려진 에베소로 향하는데 비가 내린다.
지중해성기후라 이곳은 우기를 나타내고 있었고 떠남이 마냥
어설퍼 졌지만 이내 날씨는 맑아졌고 우리들의 얼굴도
밝아졌지만 또 언제 비가 낼릴지 모르는 날씨다.
-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 에베소(에페스) -
지금은 없어진 도시, 소아시아시대의 수도였던 에베소를 보았다.
초기 에베소는 기원전 10세기에 이오니아인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에베소 사람들은 유방이 스물 네 개 달린 다산(多産)과 풍요의 상징인
" 아르테미스 여신" 을 아르테미스 신전에 모셨는데 이 신전을 최초로
기원전 580년에 웅장한 신전을 건축하였고
기원전 356년에 한 정신병자의 방화로 이 신전이 소실되었다.
그리스 건축을 대표하는 최선최미(最善最美 )의 걸작품인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보다도 크고 웅대한 신전으로 다시 창건됨으로써,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때가 기원전 10세기 경이다.
세계7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독교의 영향에 의해
(기독교에서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받드는신으로 거부함)
그 빛을 잃게 된 후 에베소 앞에 흐르는 강물의 토사로 완전히 덮혀
땅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874년 영국인에 의한 발굴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으나
지진으로 파괴되고 133개의 거대한 석주들은 하나 둘 다른 곳으로 옮겨져
지금은 넓은 빈터에 20여미터 높이의 큰 기둥 한 개만 우뚝 서 있어
그 옛날 사람들이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신전은 마치 허상처럼 느껴진다.

- 아르테미스 신전/기둥한개만 서있다.-
 - 아르테미스 신전 여인상/ 에베소 박물관에소장됨 -
알렉산더 대왕 이후 에베소는 로마의 중요한 도시가 되면서 번창기를
맞아 한 때는 인구 25만 명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도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샀다고 전해진다.
에베소의 화려함은 정교한 도시계획에 따라 아름답게 조화 배치된 시가지는
물론 대리석이 연출한 수많은 조각과 건축물이 대변하고 하고 있다.
에베소에는 세 개의 대로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이들 대로 양변에는 대소 공연장, 도서관, 민회, 신전, 유곽, 수세식 공중변소,
창고, 운동장, 체육관, 우물, 목욕탕, 가축시장, 시장터 등이 꽉 들어차 있어
도시 전체가 빈틈없어 보인다.
도시 입구에 들어서면 2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잇는 거대한 반원형
대공연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 원형공연장 원경 -
- 원형공연장 근경 -
이 공연장은 기원전 3세기경에 건축되었는데 로마 시대에
수 차 확대되었으며, 사도 바울이 서기 53년에 에베소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설교를 하교 하였다고 한다.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설교 행적은 성경의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의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말에 흥분한 군중들이
“아르테미스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며 바울을 쫓는 바람에
바울이 할 수 없이 그 곳을 떠나야 했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처럼
아르테미스 신전을 숭배하던 사람들에 대한 전도활동은 쉽지 않았으나
아르테미스 신전이 지배하던 도시는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로
에베소 교회로 변해갔다.
하지만 이즈미르의 셀추크(Selcuk)라는 도시에 도착하면서 빗방울은
좀 더 굵어졌지만 로마의 그 옛날의 신도시를 본다는 기대감으로 이동하는데
저 멀리 터키 국기가 휘날리는 셀축(Selcuk)성이 우람하게 보인다.

- 아르테미스 신전/기둥한개만 서있다.-
그 근방에 세계7대 불가사의 건축물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외로운 기둥 한 주만 서 있다.
가이드가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기에 먼 거리에서
그 실체를 볼 수 있어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에베소를 입장하려고 하는데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는데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우산을 사라고 한다.
상업적인 수완은 터키라고 예외는 아닌 듯하고 아내와 함께
우산을 같이 쓰고 입장했다.
처음 만나는 이곳 에베소의 유적지에 우리나라 삼성에서 제작한
에베소의 역사를 우리 말로 써 있는 것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읽고 있으니 우리 일행은 벌써 저 만큼 지나 간다.
마침 비는 그치고 햇살이 비치고 우리들의 얼굴은 너나 할것 없이 밝은
마음으로 역사의 현장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 에베소입구 인파모솝/이슬 비가내린다.-
에베소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로스(Androklos)의 지휘하에
그리스의 이주민들이 아나톨리아에 처음 정착하게 되었는데 왕자가
신전을 찾아가 그들의 새도시를 어디로 세울것인지에 대해 신탁을 요청하였다.
신탁이 내려지기를 야생 멧돼지 한마리와 물고기 한마리가 있는 곳이
그들의 새도시가 될거라고 했다.
어느날 야외에서 안드로클로스가 생선을 굽다 그 중 한마리가 팬에서
미끄러져 가까운 숲속으로 떨어졌고
이와함께 튄 불똥이 숲에 번지자 사나운 멧돼지 한마리가 불을 피해 뛰쳐나왔다.
신탁의 말을 기억한 안드로클로스는 도망치는 멧돼지를 쫓아가 물고기 한마리가
놓여져 있게 된것을 보고 바로 이자리가 신탁의 자리라 믿으며 여기에
새도시를 만들었다.
터어키 이즈미르주 셀축에 위치한 에베소는 현재는 터어키에 속해있지만
본래는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여 자리잡은 도시이고 한 때는
로마제국의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현재 남아있는 상당한 분량의 유적들 속에서 당시 화려했던 로마의
도시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귀족적인 건축양식이나 서민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공중화장실이나
유곽의 모습 등은 2000년 역사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우리 인간들의
삶에 대한 보편적 모습을 반추하게 한다.
이 작은 도시에는 에베소 고대 유적지를 비롯하여 에베소 박물관,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성 요한 교회,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터,
제 2의 샤프란 블루라고 불리우는 오래 된 쉬린제 마을.....등등
중심도로의 한곳
신전. 이 때는 여러곳에 크고 작은 신전이 있었다.
 - 에베소 아테네 신전 상상도 -
- 셀시우스 도서관에서 대형 공연장으로 가는 중심도로-
돌아보기도 벅찰 만큼 많은 유적과 볼거리가 널려 있다.
걸어서도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시 셀축는 엄청난 유적으로 보면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니다.
기원전 11세기, 그리스에서 온 이오니아인은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도시는 비옥한 토지와 활발한 교역을 통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에게해 연안 도시 국가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항구가 토사로 묻혀져 가고 전염병이 도는 등 도시 기능이
점점 저하되어 가자 현재 에베스 유적이 있는 장소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였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 가면서부터인데수많은 국제 회의가 열리는 곳이며 또한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이 곳은 소아시아의 수도일 뿐 아니라 로마,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 에베소 의 바리우스 목욕탕 - 귀족탕과 서민탕이 따로 분리되어 있음.
 - 목욕탕 바닥/ 모자이크 그림으로 음탕함을 표시 -
무너진 유적지지만 그 옛날 그들의 생활상이 얼마나 화려했는가를
가름할 수 있을 것 같고 목욕탕 문화에 의해 퇴패해 갔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로마의 황제들이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건축물을 보며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고 헤라클레스 문을 통해 평민과 귀족을
구분했다고 하니 역사는 역시 있는자들의 몫이 라는 것을 느꼈다.
에베소는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침 선박 쿠르즈를 이용하여 수 많은 관광객들이 밀려 들어 온다.
유럽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이베소는 관광 비수기인데도 불구하고
평민지구를 구경하기위한 길은 말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중심가의 한 거리. 길 양옆에는 상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귀족들만 출입이 허용된 공간에는 로마 황제였던 안토니우스와
그의 연인이었던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와의 명품 쇼핑을
즐겼다는 거리와 2,000년이 넘는 시기였는데도 대리석을 사용하여
도시를 건설했다는 사실이 믿어 지질 않는다.
 -상점 중심가의 모자이크로 장식한도로 -
상점중심가의 도로. 이도로 양옆에는 보석상등 고급상점들이
있었다고 하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이곳에서
데이트를 하며 보석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아래는 길바닥의 무늬/모자이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버가모 도서관과 함께 고대의 3대 도서관이라는
셀시우스 도서관을 보면서 과연 로마는 로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화려함에 또 도서관 지하를 통해 사창가를 드나들 수 있는 향락의
문화가 발달한 것을 보며 인간들의 욕망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 같았다.
셀시우스 도서관 (위:근경, 아래:원경)
- 마을 뒤 원형경기장이 보인다.-
25,000명을 수용한다는 원형경기장!
그 안에서 검투사들이 피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울부짖었는가를
생각하면 인간들의 잔인함 역사도 전달되어 오는 것 같다.
우리 일행은 아르카디네 도로를 통해 빠져 나왔지만 역사의 고고한
흐름에 의해 인간들이 지배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구를 어떻게 계산할까?
로마의 대표적인 유적인 원형경기장 수용인원에 10배를 곱하면
당시 인구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에베소는 이태리 폼페이 처럼 한순간에 몰락한 도시는 아니다.
폼페이는 화산폭팔로 단시간에 파기된 도시다.
항구도시로 번성하던 에베소는 토사 유입으로 서서히 항구가 매몰되어
도시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과 부디첬다.
 - 이테리 폼페이 원형목욕탕 -
이 목욕탕 안에서 귀족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음탕한 행위가
있었다하고,그런행위들이 화석으로 남아있음.
폼페이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로 인구 2만~5만에
이르는 상당히 큰 음탕도시었다.
신의 怒함을받아 근처 베수비오 화산 의 대폭팔로 도시전채가 화산재로 뒤 덥혀
일시에 사라진도시임. 에베소 도시가 서서히 사라진것과 대조되는도시 이다.
에베소는
또한, 산과 갯벌이 공존한 지형탓으로 말라리아 전염병이 자주 발병해
인구감소를 촉진했다. 더욱이, 지진도 자주 일어났다.
로마시대 최고로 번성한 도시였던 에베소는 그렇게 서서히 망가졌다.
이로 인해, 에베소 유적은 다른 로마도시에 비해 발굴이 늦었고
지금도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에베소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지중해와 동아시아를 잇는 상업 중심도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기원전 620년경 에베소에 세워진 '세계 불가사의 건축물'인 아르테미스 신전(神殿)
에는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에 걸친 수 많은 사람들의 참배할 정도였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 지배와 그후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
그리고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도시는 부흥의 역사를 계속했다.
 - 오데온 -
에베소 의 오데온은 에베소시 의원과 부유층이 함께모여 회의를 하던곳이다.
도시의 중요한 계획을 만들고,가끔 휴식을 겸해 음악을 감상하는곳.
오데온은 2단으로 구성하고 밑 부분은 13줄, 윗부분은 10줄로
좌석을 배치하였음.
1500명 정도 앉을수 있었다고 함.
로마인들은 에베소를 로마 최고의 계획도시로 만들었다.
도시 구조는 귀족 전용공간과 비귀족 공간으로 나뉜다.
귀족 지구는 행정과 입법을 주로 관장했고 일반인 출입도 통제한 흔적이
유적으로 고스란히 증명되고 있다.
황제가 기증한 건물(신전)이 3개나 있을만큼 에페소는 비중이
높은 로마도시이다.
당대 최고의 기술과 자재를 사용했다.
목욕탕, 원형 극장, 셀수스 도서관, 황제 기증 신전 등 당시 건축물은 당시
부흥했던 로마도시를 상징하기 충분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니케의 여신상. 정복과 승리의 여신,-
나이키 상표의 모양을 이 조각상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도시 건설에 동원된 인력은 또 얼마일까?
수많은 인력이 집중 동원됐다.
특히, 큰도로 건설 등 대규모 공사를 감당한 주역은 바로
로마군대였다고 한다.
이렇게 로마인들은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당대 최고 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에베소는 7-8세기에 들어와 아랍인들의 침략을 받았으며
결국 1304년에는 오스만투르크 수중에 떨어졌으며 지진 등으로 급속히
황폐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에베소는 터키에 속하며 그 이름도 '셀축'으로 불린다.
한편, 에베소는 기독교 성지로 유명하다.
예루살렘을 중심 기독교를 서구로 전파한 장본인인 사도 바울이
주로 활동한 도시 가운데 하나인 곳이다.
신약성경에는 바울이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에베소서>가 있을 정도다.
 - 성모 마리아 의 집 -
※ 에페소 앞산 남서쪽 능선 아래 지점(속칭 피나야 카풀루)에
성모 마리아의 집 이라는 곳을 찾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모께서 이곳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고 믿고 있다.
많은 무슬람 순례객들도 자기네 나름대로 성모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다.
- 이스라엘 성모 마리아 무덤교회 내부 -
마리아의 무덤 성당에 자리한 성당. 문간 방향 오른쪽에는
마리아의 시신이 들어갔던 석관이 놓여 있다.
마리아의 무덤은 원래 예루살렘 밖 겟세마니 동산 성당 인근의 올리브 동산
아랫자락에 자리한 키드론 골짜기에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이곳을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유해가 묻혔던 곳으로 여기고 있으며, 에페소에 있는 동정
마리아의 집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4대 복음서의 하나인 <누가복음>과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
저자인 의사출신 누가가 주로 활동한 곳도 바로 에베소이다.
누가무덤은 에베소 유적지 입구에 있다.
 - 누가의 무덤 -
게다가, 사도 요한도 예수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받고,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사도 바울이 순교하자, 요한은 사도 바울 대신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으며 노구에도 불구하고 버가모와 서너마 등에서
선교를 하다가 고문과 유배를 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이런 과정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요한계시록>등을 남겼으며
에베소 옛 시가지에 요한교회가 있고 그 안에 사도 요한의 무덤도 있다.
이처럼, 에베소는 초대 기독교 역사와 밀접한 도시이다.
 - 앞 자리, 요한의 무덤 ,뒷자리 교회-
사도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로 예수님 12제자중 한사람.
에베소를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가니 예약석에
터기 국기와 우리나라 국기를 식탁 위에 준비해 두고 있었다.
평소 아무 감정없이 봤던 태극기도 새로와 보였고 우리 말고도 태극기가
있는 것으로 봐서 더 많은 한국인을 이 레스토랑에 예약을 한 것 같았다.
살기가 좋아져서 견문을 넓히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식사 후에 와인의 고장인 쉬린제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 그리스인이 처음 들어왔을 때 지었던 집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오래된 마을로서 각종 과일주와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이곳의 기후가 지중해성 온대 기후로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일부는 야생이지만 대부분 널고 넓은 산 전체를 올리브 나무로
장식되어 있으니 이 나라에는 올리브 유와 올리브 열매를
염장하여 빵과 토마토를 곁들여 먹는 것이 식사이기에
이 나무가 너무나 소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좁고 위험해 보이는 길을 따라가면 잠시 후에 와인을 파는 가계에
도착했고 우린 와인 두 병을 샀다.
하지만 불과 얼마 있지 않아서 이 와인은 폭탄 와인으로 변해 버린다.
와인에서 탄산까스가 넘쳐나는(마치 콜라처럼)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다음날 터키의 산맥을 넘으며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자매가 산
와인이 뚜껑이 폭팔하는 사고를 시작으로
이틀 뒤 아침에서 그 와인이 넘처버려 터키인 기사가 당황했고
우리들의 와인 역시도 안전하지 못하고 넘처 흘렸다.
차후에 쉬린제 마을로 와인 견학을 하시는 분은 절대로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를.......
와인을 파는 터키인은 우리나라의 게그맨 빰칠 정도로 유머가 있고
감각이 있어 잘 못하면 우리와 같은 ........
2004년 산이라고 자랑한 와인의 최초가격은 18유러 ->
다음에 2병에 25유러 -> 2병에 20유러(한 병에 10유러)
결국은 터키에서 거품을 품고있는 와인 일부는 버리고 먹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쉬린제 마을을 내려와서 가죽 옷 쇼핑을 하러갔다
이국적인 터키의 예쁜 모델이 나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패션 쇼를 진행한다.
패션 쇼가 끝나고 매장에 마련한 물건의 값을 보니 비싸서 별로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패키지 여행을 하고 있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들러야 하기에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곤욕스럽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인솔가이드와 한국인 현지 가이드는 우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기에 그나마 마음은 편하게
파묵칼레에 있는 리커스 리버 호텔로 향했다.
오전 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터키의 남성들이 길가 카페에 앉아
홍차를 마시기도 하고 장기를 두기도 한다.
가이드에 의하면 여자들은 카페에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주로 여자들은 밭일을 하고 남자들은 40~50이 넘으면 일찌감치 은퇴하여
한가롭게 소일한다는 것이다.
기묘한 남성우월주의의 또 다른 모습을 이곳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여자들은 보통 일찍 결혼을 하며 결혼을 하면 문밖 출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날씬한 몸이 바로 불어 버린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결혼 적령기를 넘은 과년한 딸을 둔 집에서는,
자기 집에 시집갈 처자가 있음을 광고하기 위해 빈 병을 지붕 위에
달아놓아 둔다는 것이다.
부동산 팔기 위해 싸인판을 부착해 놓듯이, 아직도 시골에서는 병을 꽂아
놓는 것이 관습이란다. 파묵갈레 근처의 쿄이라는 마을을 지나면서
정말 병을 지붕에 꽂아 놓은 집들을 서너집 만날 수 있었고
일행들은 대발견이라도 한 듯 쾌재를 불렸다.
데니즐리(Denizli) 를 지나 좁은 국도를 지나는 양 쪽에 목화밭에 널려있다.
물론 하얀 속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어
아버지 생각이 불현듯 났다.
우리 자식들을 키우시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
호강 한 번 받아 보지 못하시고 세상을 등졌으니 가슴 아픈
기억 저편에 아련함만이 남아 있다.
언제나 목화밭에 가면 새롭게 돋아 난 목화를 먹기도 하고 그 목화밭
사이에는 참외를 심어 놓기도 하셨고 어떨 땐 수박을
심어 그 옛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기에 그만한 간식이 없었다.
가을에는 만개한 목화를 보면 온 천국이 눈을 뿌려 놓은 듯
하얀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바로 그 목화밭에서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창밖으로 흰 산비탈이 보였다.
신비한 모습을 자세히 보지도 못했는데 계속 지나기에 물었더니
파묵칼레(Pamukkale)란다.
music/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靑 山/한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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