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나가보니 눈이, 차들 지붕위에, 그리고 길 양쪽으로 수북히 쌓여있었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넘어로 순백의 아름다움이 달려오는듯 싶었다. 옛날, 초가지붕과 들녁을 덮었던 그 고즈넉한 순백의 아름다운 전경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곧 지저분한 진창길로 변하겠지만, 그래서 온통 짜증이 나게 되기도 하겠고, 미끄러지고 밀리고 하는통에 아수라장이 될수도 있겠지만, 순백의 첫눈이 아름답게 다가오고 참 반가운것은 틀림이 없는듯 하다! 여러가지 잡다한 일들로 웅크리고 쪼들렸던 마음에 선물로 주신 하얀눈을 축복인 것 같다. 결코 잊어버시는 일도, 내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시다는 말씀도 믿겨진다. 오늘 하루도 그런 하루였으면 좋겠다. 꿈인듯 싶기도하고, 언젠가 있었던 일같기도한, 오락가락한 생각들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게 뭐였는지도 잊어버리고 또 넘어간다. 이 나이가 되고서도 철들지 못함을 한탄할 생각도 없다. 지첬다.뭘 할수있겠는가. 아님 나만 밥값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하는 자포자긴가.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하나님, 내가 행복하길 바라시는 나의 하나님을 꼭 붙잡을수만 있다면 더 부족한게 있을까. 아니,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나는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 아이들이 옷을 두껍게 입고 등교했는지에 더 마음쓰고 있다. 그 이면에는 며늘에 대한 쌍욕이 급발진을 한다. 지는 방한 패딩으로 올무장을 했으면서 어찌 자기자식들에게 소흘할까 이해가 안간다고, 아마 만만하거나 내가 힘이 있었으면 벌써 싸대기라도 날렸지 않았을까. 비록 속으로이긴 했지만 벌써 부텨 며늘은 없다. 지들만 시어미를 버린게 아니다. 그럼 서로버린거니까 뒷말할것도 없네? 안보고 살면 좋고, 지워버리고 살면 더 좋겠지만 씁쓸하다. 가족이란 서로 부디끼며 사는것인데, 그 부내낌이 싫어서 피차 손절하게 되는게 오늘날의 현실이라면 어느땐가는 회복을 위해 더 많은 수고를 해야하는 그런 시기도 오긴 할거다.
오늘,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을 한다고 했다. 그런 행사에 참석해본적이 없다. 그런 행사뿐아니라 이런저런 행사에도 관심을 갖어보지 못했다. 내 앞가름이 안된 상테에서 뭘 할수가 있겠는가. 어느 목사님 설교중에, 헌금을 위해서 혹은 전도 봉사를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솔직하고 과감한 말씀아닌가.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을 꼬집었다. 어쩌면 여기에도 결핍이 있어서가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내가 제일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런데, 딸마저 자기가 가장 가난한 사람인것 같다는 고백에 자책하지 않을수 없었다. 움켜줄려고만 하는 내게서 뭘 배우고 무슨 감동을 했겠는가. 나는 그냥 살았다. 누군가에게 해되지만 않길 바랐다. 정말 해되지는 않았는지도 불분명하다. 사기치고 속이고 훔치는것만 죄는 아니라고 한다. 게으른죄가 더 크다고 하니까 할말이 없다. 나보다 더 게으른 사람이 있을까 싶으니까. 오늘도 성서학당 시청을 하고나서 곧바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유혹을 간신히 넘기고 여기 이자리에 앉았다. 이불속과 책상앞이 크게 다를것도 없다. 자거나 깨어있거나 전혀 다르지 않는게 나의 실상이니까. 크게 아픈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렇다고 정말 아픈곳이 없는것은 아니다. 온몸이 다, 손마디가 아픈가 하면 허리가 시큰거리고, 발목이 컬척지근하다 싶으면 종아리에 쥐가나고, 엉덩이가 골반이 아우성이다. 눈앞이 흐리고 귀가 잘 안들리고 콧물이 질질거리고, 어깨도 팔꿈치도 등허리도. 장기쪽에 문제가 있어야 정말 아픈게 되는것 아닌가? 그쪽에 문제가 생겨야 죽을수도 있는게 아닌가. 그런데 그쪽엔 전혀 문제가 없어보인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무탈한 일상이 기적이고 큰 복인것도 틀림이 없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것도 알고는 있다. 그런데 조금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싶은게 과한 욕심일까. 무탈의 일상마저 언제고 흔들릴수는 있다. 그래. 그냥 감사만 하자. 그게 지금 우리들 믿음의 한계 아닌가. 너무 많은것을 바라지 않는게 좋다. 좀 부족하게 사는게 복이라고도 하지않던가. 좀 불편한게 유익이라고 한다. 명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