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변화된 인천의 도시 역사>
1876년 2월 일본정부와 조선은 ‘조일수호조규’를 맺어 개항을 시작하자 세계 자본주의체제로 편입되면서 주변국들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부산과 원산의 개항이후 인천 개항을 요구하였다.
1883년 1월 인천이 개항되었다. 이때 일본인은 자유로운 통상활동의 보장과 조계지에서는 조선정부가 세금을 징수할 수 없는 전관조례를 설정하여 거의 무상에 가까운 조계지를 대여 받는 혜택을 누린다.
개항 이후 제물포는 영사재판권이 인정되는 치외법권 지대인 ‘조계’, 외국인 잡거가 허용되는 ‘조계 밖 10리 이내’, 조선인만의 지대인 ‘내지’가 설정되지만,
일본인 조계의 협소함으로 일본인들은 조선인 거주지대로 침투하였고, 청나라 역시 조계 설정에 나선 후 각국 조계(만국조계)는 4지구로 구분된다. 조선인들은 각국 조계의 외곽지대에 분포하였다.
개항이 시작되면서 변화된 인천 개항장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청국인, 조계 내의 외국인들이 급증하여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시작되었다. 토지사기, 불법 사기, 밀무역, 아편, 매음 등의 각종 사회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하며 도시 기능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이후 1895년 우체사가 설치되어 근대 우편업무가 시작되었다. 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나는 이 시기 우편부의 가죽가방과 한복을 입고 짚신을 신은 복장이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로 다가왔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시기의 삶과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였다. 풍요와 빈곤, 조화와 부조화로 잃어버린 우리의 정서가 잠시 유리상자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힘없는 나라의 개화기 백성이 적응해야 하는 시간이 그 모습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일본은 1894년 청일 전쟁이 승리하자 인천 - 서울 - 부산 간 군용전신선을 가설하였다. 통신선이 설치되자 일문과 국한문 신문을 발행하고, 일본계 은행과 회사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러일전쟁 승리와 을사늑약으로 인천의 상권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청국 상인들은 1888년 기선회사를 세워 중국과 인천 간 항로를 마련하였다.
구미상사로는 영국계 태화양행, 미국계 타운센드상사, 독일계 세창양행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조선인 상인들은 객주상회사를 조직하였다.
항만정비, 경인철도 부설과 도로 건설 및 택지조성으로 인천항은 국제무역항으로 변모를 시작한다.
개항이 되자 구미와 일본, 중국의 문화가 유입되었으며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신사와 유곽이 번창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대불호텔(1883년)이 세워졌다. 구 일본 제일은행 인천지점(1899년)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 청국조계 구역에 있는 공화춘(1905년)은 그 당시 조선의 모던보이, 모던 걸들이 선망하는 데이트 장소로 현재 자장면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구 각국조계 구역의 서양인들의 사교장이었던 구 제물포 구락부 건물은 현재 중구 문화원으로 사용 중이다.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틴이 설계한 구 만국공원(1888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현재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정부가 1876년 일본과 국교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 개항이 되고 서울의 관문인 인천은 한국근대사의 영욕이 교차하는 역사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었다.
(인천의 도시역사를 역사서와 공지된 홍보지에서 찾아 간략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매립의 도시 인천>
서울 근교의 도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인천을 떠올리게 된다. 가깝다고 생각하였던 인천을 찾아가 그 도시가 지닌 역사의 시간을 마주하였던 날이다. 인천개항장의 거리를 걸으면서 시간을 되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타는 느낌이 들었던 항구도시를 새롭게 바라보던 날이다.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인천 월미도를 다녀오면서 했던 생각은 중국인 거리의 자장면이었다. 특히 자장면은 우리가 자주 먹었던 짙은 갈색이 아닌 붉은색 자장면이다.
오늘에서야 갈색의 자장면은 개항이후 미국의 캐러멜 소스가 섞여서 갈색 자장면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도시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동양의 나라 중국 먹거리에 첨가된 미국 소스는 동, 서양이 합쳐서 글로벌화가 되어가는 현재의 모습을 미리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근대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서울로 향하는 관문인 도시 인천은 서해의 거센 물결보다 더 거센 개화의 바람과 외세로 한반도 근대화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아간다.
인천역에서 내리자 중국인 거리 입구에 자리한 페루는 낯선 도시 북경을 연상하게 하는 색감과 조형물로 첫 인사를 건넨다. 맑은 하늘이 그 색감의 느낌을 더 부각시킨다. 처음 마주하던 페루의 강열한 붉은색은 인천을 떠나오는 그 시간까지 강하게 따라다녔다.
개항 이전 작은 마을이었던 인천과 서울에는 300명 정도의 화교가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는 군대와 함게 40인의 상인을 파견하였고 상업을 천시하는 조선의 정서를 이용하여 빠르게 조선의 상권을 장악한 것이 조선 화교의 시작이며 인천 자이나타운- 푸성귀전(신포국제시장)의 출발이다.
청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상인들이 경쟁을 하던 개화기 국내 제 1의 국제시장은 개항을 하여 외국 자본이 밀려오자 상권을 지키기 위하여 민족상인들이 뭉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지켜낸 상권으로 개항시대를 밝혔다는 신포국제시장으로 서울거리에서 만나는 신포만두가 인천에서 시작된 지역명임을 알아간다.
중국인 거리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페루 앞에서 만나는 일본인 거리의 이국적 풍경과 그 거리너머 언덕위의 각국 조계 구역을 바라본다. 인천이 지니고 있는 갖가지 시간의 역사에서 사라진 흔적을 따라 바닷바람만큼 거세었던 도시 거주민들의 삶을 생각하였다.
그 거리에는 유럽풍의 건축물과 일본의 대표적인 건축물의 모습을 지닌 화양관도 시간이 멈춘 듯 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거리를 걸어가다 만나는 근대문학관의 붉은 벽돌이 서대문 형무소의 붉은 건물을 연상하게 한다. 같은 시간대를 지니고 있는 붉은 벽돌의 건물은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의 우리 역사를 생각하게 하지만, 개항장을 지니고 있는 각 도시에서는 부러워하는 문학관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그 건물을 바라본다. 그 건물에 존재하고 있는 문학서가 우리의 근대 생활의 이면을 볼 수 있다면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긍정의 시선을 보낸다. 근대문학관이 자리한 건물주변은 인천아트플렛홈으로 사용되고 있어 각종 촬영을 나온 젊은이들의 모습과 근대라는 단어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거리에 존재하였던 역사가 오래된 전설처럼 느껴질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 거리의 역사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대불호텔은 남겨진 사진으로 새로 재현되었는데 앞면만 예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불호텔은 1883년에 건립되어 1902년 서울에 건립된 손탁호텔보다 20여 년 앞서 세워져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마시던 호텔이다. 그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던 식민지의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피폐해지는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마시는 커피맛에도 고뇌를 부여했을까 궁금해졌다. 파괴된 역사의 흔적들에서 매립과 매몰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떠오르고 미국이 일본의 원폭투하지점을 선정하면서 역사의 유적이 많은 교토는 제외하였다는 일화를 생각하였다.
인천에서 마주하는 개항장의 역사에는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면서,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등의 경제적 수탈의 중심지역이었음을 새삼스럽게 기억하게 한다. 수탈의 역사로 남겨진 짐을 나르는 하륙군, 지게를 지는 담군, 화물을 포장하는 두량군등 부두노동자를 이름하는 세 단어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인들 삶의 고단함을 알려준다. 이들의 항의가 우리나라 노동자들 쟁의의 처음 시작이었으며 대다수가 영세민, 날품팔이꾼, 외지벌이꾼들로 때때로 규정을 어기고 조계 안으로 숨어들거나 땅의 점유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 거리를 걸으면서 보존되지 않고 사라진 흔적들이 아쉬워진다. 어떠한 수치스러운 역사라도 그 역사를 마주함으로써 미래를 생각하는 시선이 깊어질 수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최근 인천역 앞에 20층이 넘는 고층빌딩이 건립되면서 자유공원에서 바라보이던 전망권이 사라지게 되었다. 인천이 지니는 도시의 매력하나가 또 사라지는 아쉬움이다.
개항지를 돌아 식사 후 자유공원에서 만나는 녹색의 바다바람이 시원하다. 바다바람을 따라 바라보는 먼 바다의 은빛 반짝임에서 커피향을 생각하였다. 근대 건축물 앞에서 20세기 모던 걸의 분위기를 즐겨보기로 한다.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느낌이 일본 어느 거리의 찻집을 연상시킨다. 인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국인 거리보다 오히려 일본의 느낌을 더 많이 지니고 있는 도시이다. 그 거리에 내리는 오후의 햇살이 슬그머니 손을 내민다. 바다열차로 이끄는 유혹이다.
함께 하였던 모든 마음이 바다열차로 향하는데 바다열차의 유혹은 유혹이었을 뿐으로 이미 예매완료가 되어 기대를 외면하였다.
귀가길이 단순한 이웃도시의 나들이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도시가 지닌 변화하는 역사가 한반도 근대화의 아픔과 격동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광무호에 걸려있던 태극기의 모습이 그러하였고 인천에서 4대를 살아오셨다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에도 소중한 것들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는 도시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하였다.
서울의 관문인 인천은 동아시아의 주요 국제도시로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인천 곳곳에 남겨진 개항장의 흔적들이 역사의 시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 시간을 함께 하였던 일본인, 중국인, 서구인들의 삶이 남겨준 흔적의 의미가 깊이 있게 다가왔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글. 사진 풍경소리 황수현>
첫댓글 와.... 대단한 사람이에요, 나는요 그냥 설렁설렁 따라만 다녔는대도 집에오자마자 실신 상태 였는데 이 글을 쓰려고 정신적인 수고를 하면서도 글을 올렸다니 대단하고 또 고마워요...
참으로 예쁘고 좋은 사람 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대충 대충 라기도 하면서 삽시다
샘~~저도 귀가해서 저녁먹고 9시까지 쉬고나서 작성했지요...새벽부터 바빴더니 힘들긴 하였습니다.
샘께서 열심히 빨간불 지켜주시는 대신 탐방후기는 사명감으로요~~~^^
근현대사를 읽는듯, 어제의 감회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피곤하실텐데 밤늦은 시간에 글을 올려주셨으니 그 노고에 위로를 드립니다.
어제는 하루의 의미가 유익한 탐방의 하루였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격려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게 지났던 길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저도 복습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언제나 궁궐크럽에 힘이 되어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조선말 개화기 혹은 절국(絶國)의 시기에 원망이 가득했던 인천항에 한풍(韓風)은 보이지 않고, 화풍(華風)과 왜풍(倭風)으로 덮혀있는 인천의 옛모습에 웬지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탐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학도로서는 생생한 옛자취를 살필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황수현 선생의 상세한 답사기에 다시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녀와서 되돌아보는 시간도 그 시간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선생님~감사합니다!
황선생님~
피곤하실텐데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ㆍ
즐거운 탐방이었습니다ㆍ~🍒🍒🍒
따스한 마음으로 전해주시는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참여 못한 어제의 답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셨군요. 어제 행사를 그림 그리듯이 잘도 묘사하셨네요.
오랜만에 내공 가득한 글을 대하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설명을 들으면 알 것 같은데 나중에는 거긴가..여긴가...헷갈리기도 하면서 정리를 하였습니다.
이름도 특이한 공화춘도 있고~~~
예전 유명했던 아서원 주방장이 사장님이신 요리집의 청요리도 먹으면서~~~
입원하시느라 참여못하신 섭섭함에 위로가 되셔서 다행입니다..^^
챠이나타운을 몇차례 방문했지만 개항의 역사,청과 왜의 조계지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머언 지하철여행이었지만 또 다른 방식의 탐방이 의미있는 하루였고, 인천역사와 탐방현장을 생생하게 정리해주신
덕택에 좋은 공부가 됩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개항장의 안타까운 역사를 들으면서..그 특별한 지역을 방문하도록 늘 준비하시는 선생님의 수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 글은 선생님들 수고에 대한 답례라 생각하였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